서완석
1955
인물 개인 마을주민
정릉의 마지막 능참봉인 서재국의 아들이다. 정릉 재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릴 적 살았던 정릉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정릉의 토박이로 마을의 역사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패션업계에 종사하고 있으며 2004년 양장(洋裝) 부분 대한민국명장으로 선정됐다.
정릉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599, 18통~20통 (아리랑로19다길)
  • 비고: 교수단지

근거자료 원문

  • 1. 영의정 가문의 마지막 정릉 참봉 후손을 만나다 서완석(남, 60세) 교수단지가 조성되기 전부터 정릉에 살았던 진정한 토박이 서완석 씨는 정릉의 마지막 능참봉이었던 서재국 참봉의 막내아들이다. 정릉 재실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정릉에 거주하는 정릉 교수단지의 산증인이다. 그는 대한민국 양장 명장이자 관련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기 때문에 마을에서 ‘서 교수님’으로 불리고 있다. 서완석씨에게 정릉은 역사문화유적이자 이전에 나고 자란 고향이며, 평생을 함께 한 추억의 공간이다. 그에게 정릉은 집이고 생활 그 자체였다. 어린 시절 재실 뒤 개천에서 미꾸라지와 가재를 잡고 능은 놀이 장소였다. 능 위에서 놀다가 아버지께 꾸중을 듣는 일도 다반사였다. 부친인 서재국 참봉은 여주 영릉 참봉을 오래 하시다가 정릉 참봉으로 오게 되었다. 정릉으로 왔을 당시 재실이 다 헐어서 구황실의 도움으로 1, 2년간 수리를 했다. 서완석 씨가 재실에 살 당시 재실에는 4, 5가구가 함께 살고 있었다. 해방 후 산림청 소속 직원과 평안도 명예군수 등이 와서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능참봉 직을 그만 둔 이후 어머니께서 정릉에서 장사(매점)를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정릉에서 태어나 평생을 정릉에서 지낸 서완석씨는 “이제 정릉을 떠나서는 못 살 것 같다”며 마을에 애착을 드러냈다. 정릉에서 늙어가는 거지. 주위 여건들을 보면 도심 속에 이곳만큼 보존이 잘 되어 있고 환경적으로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다 능 때문이지. 내가 숭덕초등학교에 입학해서 1학년 때는 3부제로 수업을 했고, 그 때 학생 수가 제일 많아서 기네스북에도 올랐대. 고등학교 졸업할 때는 이미 아버지 연세는 팔순을 넘기셨으니 많이 연로하셨지. 내가 공부를 썩 잘 하지는 않았기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나도 이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 당시 친척이 의상실을 하고 있었는데 돈을 꽤 많이 벌었어. 그 때 앙드레 김도 막 뜨고 했을 때지. 그렇게 난 그 친척의 권유로 배우면서 일하기 시작해서 나도 돈을 잘 벌었어. 그러면서 더 배우고자 하는 욕구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됐지. 고등학교 나와서 일을 먼저 시작했지만 지금은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수료했고 교수도 하고 있으니 요즘 시대에 맞는 ‘선 취업 후 진학’의 선두주자가 된 셈이지. 성인이 돼서는 늘 아버님이나 조상님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했는데 2004년도에는 대한민국 명장까지 되었어요. 내가 기술자로 시작해서 대한민국 명장까지 되고 지금은 세종대학교 융합예술 대학원 겸임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지요. 전에는 경희대학교 생활과학대 겸임교수도 오랫동안 했고, 대체로 노력하는 대로 뜻을 이룬 것 같아요. 나는 영의정을 지냈던 가문에서 태어나 국가에서 인정하는 대한민국 명장이 되는 영광은 안았지만 3대가 정승을 지낸 조상님들께는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해요. 그러나 노력하며 열심히 살았고 선친에 이어 나도 정릉을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영원한 고향 정릉에서 남은 인생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서완석(남, 60), 성북구 정릉2동 교수단지, 2014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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