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국
1892 - ?
인물 개인 관료
정릉의 마지막 능참봉이다. 그 당시 재실이 다 헐어서 구황실의 보조를 받아 1, 2년간은 수리를 했다고 한다. 해방 후 구황실이 해체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마지막 참봉이 되었다.
정릉동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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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관료

시기

주소

  • 주소: 02813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508 (아리랑로19길 116)
  • 비고: 정릉(활동)

근거자료 원문

  • (구술자 : 서완석) 여주 영릉에서 참봉을 하시다가 마지막에 정릉으로 참봉으로 오신 거죠.
  • 서대순에게 내려진 칙명(추증교지) 勅命 ○○大夫 行禮曹判書 爲知經筵判義禁府事 春秋館事 同知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經筵日講官 徐載淳 贈諡孝憲公者 ○○○○曰 孝行 ○○○曰 憲 隆熙四年 六月 日 ○○○○ 서완석씨 구술 아버지는 1892년생 서재국. 여주 영릉 참봉 직에 오래 계셨다가 여기 정릉 참봉으로 오게 됐지요. 아버지가 능참봉으로는 마지막이에요. 지금 우리 큰 누님이 98세 되셨는데 살아 계세요. 그 누님 말에 의하면 정릉 참봉을 왔을 당시 재실이 다 헐어서 구황실의 보조를 받아 1, 2년간은 수리를 했대요. 지금 이 사진 왼쪽에 하나 남아 있는 게 그 옛날 재실의 모습이에요. 우리 집안이 대단하지. 나만 좀 그런데 내 6대조 서유녕 할아버지와 5대조 서용보 할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내셨어요. 고조부 서대순 할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내셨고, 그 다음에 증조부 서상익 할아버지는 예조참판을 지내셨어요. 좀 유명해 역사에도 많이 나와. 그 다음 할아버지가 서광민 할아버지고 서광범 할아버지가 우리 작은 할아버지에요. 우리 할아버지 친동생, 그래서 우리 집안이 잘 나가다가 갑신정변 때 풍비박산이 났지. 지금 정월 보름에 제사를 모시는 할머니께서, 그 당시 운현궁 근처에 사셨는데 버선발로 뒷산으로 도망을 갔는데 무척 고생을 했다고 들었어요.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하고 전부 다 역적으로 몰려서 그 때 서상익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친척인 서재필 박사도 서광범 할아버지하고 같이 도망가셨잖아요. 그 때 우리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고 서광민 할아버지가 벼슬을 못하셨어요. 그 후 서광범 할아버지하고 서재필 박사가 복권이 됐잖아요. 복권이 된 후 나중에 우리 아버지가 여주 영릉 참봉이 되신 거지. 이게 우리 98세 누님이 전해준 얘기에요. 어려서부터 집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근데 그 땐 별루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지. 커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까 제사 때마다 누님이 오셔서는 그 옛날 얘기들을 늘 하시니까 그때서야 귀에 들어오는 거야. 가족 역사는 거의 우리 큰 누님에 의해서 아는 거지. 족보로 보면 우리 집안이 대단하죠. 내가 어렸을 적에는 공부 안 하고 뛰어놀면 집안 망신을 시킨다고, 3대가 정승을 지낸 집인데 자식이 공부 안 하고 놀기만 한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우리 때는 또 장발이 유행이었고 기타 둘러메고 다니는 게 멋이었거든. 기타 치고 돌아다니면 “네가 집안을 다 망치고 있구나”하고 걱정을 무지 하셨지. 나는 1955년도 정릉 재실에서 태어났어요. 그 때 우리 아버지 나이 62세였지. 나는 초등학교 5, 6학년 때까지 재실에서 살았고 그 재실이 헐리고도 중학교 마칠 때까지는 정릉 안에서 살았어요. 재실에는 평안도 명예군수도 살았고 아래채에만 두세 집이 살았어요. 위채에는 산림청 소속의 직원인 주사가 근무를 했고, 또 한 집이 살고 그러니까 4, 5집이 항상 살았어. 당시 재실은 살림을 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기에 난방으로 장작을 때는 형태에서 연탄을 땔 수 있게 개조를 해서 살았지. 재실이 헐리면서 우린 그 옆에다 집을 지었어요. 그 때는 땅의 개념이 없으니까 무허가로 막 지었지. 두 번이나 그렇게 짓고 헐리게 되었어.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이 왜 그랬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아마 당시 매점을 하게 되어서 그랬을 겁니다. 매점 바로 옆에다 집을 지은 것이죠. 그 때 문화재 관리국에서 지금의 강남 세곡동 어딘가 거기서 살라고 땅을 내줬다는데 난 어려서 모르겠지만 우리 매형이 거기가 살 만한 곳인지 가 보았는데, 그 곳은 완전 숲속이고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해서 그 땅을 받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지금의 집을 사서 나왔지요. 여기 재실 제기고에는 혼례를 올리거나 할 때 천막서부터 뭐 상은 물론 기러기 사모관대 족두리 이런 거 뭐 비녀까지 다 있었어. 동네에 큰 일이 나면 여기서 다 갔다 했으니까. 아버지는 해방되기 전까지 참봉 직을 지냈어요. 해방이 되고 나서 끝난 거죠. 구황실이 해체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마지막 참봉으로 끝이 난 거죠. 그 때 동네사람들이 아버지를 나으리, 나으리 하면서 불렀죠. 그렇던 분이 참봉 직을 그만두고 뭘 할 수 있겠어. 그래서 어머니가 노점을 한 거야. 먹고 살려니까. 동대문 시장에 가서 물건을 떼서 전차로 돈암동에 내려서는 그 물건들을 머리에 이고 흥천사 고갯길을 넘어왔지. 예전엔 흥천사(당시 신흥사)를 넘어오는 길이 산 고갯길로 밤에는 짐승 울음소리도 들렸어. 그렇게 이고 온 물건들을 정릉 안 지금의 안내표지 앞에다가 펴 놓고 장사를 하신 거야. 그렇게 하다가 문화재 관리국에서 아버지가 참봉 직을 지내셨으니 허가된 매점을 하게 해 주었고, 그 다음부터는 입찰제로 일 년에 한 번씩 얼마씩 내고 매점을 하고 살았어요. 우리가 1호 매점이었고 그 후로 2호 3호까지 생겼어요. 나중에는 매표도 몇 년 했어요. 1970년도 열차 사고로 차편 수학여행이 금지되고 이 근처 학교가 다 걸어서 정릉으로 소풍을 오는 바람에 학생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지. 그 때는 정말 아리랑 시장부터 능 안까지 길이 마비되고 경찰들도 와서 정리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입장료로 받은 10원짜리 지폐가 미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 수입이 꽤 괜찮았지. 매점에서 장난감 뱀이나 물총 뭐 이런 물건들도 잘 팔려서 돈 좀 벌었어. 그런지 몇 년 안 돼 매표는 문화재관리국에서 직접 관리를 하게 됐지. 매점은 1970년대 말까지 운영했을 거예요. 1960년대에는 재실이 멋있어서 정릉에서 영화를 많이 찍었어요. 1년에 3, 4편 정도는 찍은 거 같아. 영화를 그렇게 찍었는데 막상 영화필름을 한 개도 못 찾아서 재실 복원하려고 하는데 애를 먹더라구. 결국 나하고 바로 위에 누님하고 당시 같이 살던 형님하고 셋이 모여 기억을 더듬어서 지금 재실이 복원되고 있는 거예요. 그 때 근무하던 정릉의 김용욱 소장이 참 많은 일을 했지. 그래서 내가 그랬지. 우리가 기억을 해 낼 테니 듣지만 말고 재실의 평면도를 그릴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어. 그래서 그 평면도가 그려지고 덕분에 재실터가 고증을 거쳐 지금 저렇게 짓고 있는 거야. 아버지는 1978년도 86세에 돌아가셨는데, 참봉 직을 그만두고도 생전에는 계속 정릉에 애착을 많이 갖고 계셨어요. 재실에 살 때 구정 설에는 조상 모시기 전에 강씨 마마께 차례를 올렸어요. 재실 마루문을 활짝 열면 능을 바라보게 되니까 떡국을 떠놓고 먼저 차례를 지냈지. 마룻바닥인데 문까지 열어놓으면 그 찬바람이 난 아주 정말 싫었어. 속으로 강씨 마마한테 왜 이래야 하나 생각했지. 가끔은 아버지가 마루에서 곡도 하시고 그랬는데, 아마 그 차례를 지내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한탄스러움이 있었을 거야. 내가 내년에는 또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뜻이지. 문화재관리국 정릉관리소는 나 어렸을 때부터도 산림주사가 파견됐어요. 그 때 산림주사 배주사란 사람이 있었는데 재미 삼아 어린 나한테 술도 먹이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막 그랬다구. 가족처럼 지냈어요. 당시 정릉은 산림주사가 퇴근하고 난 후 밤만 되면 남녀 쌍쌍이 들어와 숲 속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연애장소였어요. 어떤 사람은 숲 속에 들어갔다가 뱀을 밟았는지 물려서 난리를 치고 옷을 찢어서 묶고 지금의 주민센터 있는 쪽에 권 외과의원이 있었는데 그 밤에 거기로 막 뛰어 갔던 기억이 나. 당시 능은 사람들이 놀러 와서 장구와 꽹과리 치며 놀다가는 장소였고 건달이 나무로 불을 때고 그랬는데, 그러면 아버지가 막 뛰어가서 그냥 ‘이놈들!’ 하고 호통을 치면 아버지가 무서워서 건달들이 피했지. 지금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텐데 옛날 건달들은 어른을 알아봤어. 난 참봉의 아들이기 때문에 건달노릇을 못 했어. 정릉 안에서 거지들이 두세 명은 꼭 노숙을 했어요. 우린 밤에는 거지들 무서워서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어. 그 거지들 전두환 대통령 때 다 잡아갔어. 그 이후로 거지가 없어졌지. 어릴 땐 능 위에까지 가서 놀기도 했어요. 그러면 아버지가 보고 소리소리 지르시고, 우린 또 납작 엎드리고 올라가서 놀고 아버지는 또 소리 지르시고, 그렇게 도망 다니면서 놀았어요. 옛날엔 쥐불놀이 엄청 하잖아. 지금은 쥐불놀이 하던 그 돌산을 다이너마이트로 다 깨고 피오레 아파트를 지었지만,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그 돌산에 올라가서 친구들과 같이 쥐불놀이를 하고 오면, 아버지는 제사 지내야 하는 놈이 놀고 왔다고 호통을 치셨지. 아버지와의 이런저런 추억이 깃든 정릉의 재실이 이번에 복원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고 좋으며 아버지한테 효도하는 기분도 드네요. 재실 뒤쪽 아래 방향 양 옆으로 물이 꽤 흘러서 미꾸라지 잡고 가재도 잡고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어요. 근데 이거는(사진을 보며) 재실 옆에 있는 연못이에요. 이 연못은 재현이 안 돼요. 영원히 연못을 볼 수가 없어. 발굴 조사할 때 위원들한테 얘기해서 발굴까지 했지만 나중에 보니 연못은 복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구. 우리 아버지 호가 백년이에요. 산수화가이신 소정 변관식 선생님하고는 형님 동생 하는 막역한 사이였어요. 아버지한테 정표로 산수화도 한 점 주셨지. 소정 선생님이 오시면 야 이년아! 저년아! 백년아! 이렇게 부르시면서 나타나시죠. 능에 거의 매일 오셨거든. 아버지와 소정 선생님하고 몇몇 분이 함께 약수터도 찾아내서 만들었어. 취선대라고 정릉 사무실 뒤편으로 올라가서 있는데 지금은 폐쇄됐어. 그 때 변관식 선생님이 오시면 같이 능 약수터에 앉아서 정담을 나누시고 매점에 내려와서 소주 한 잔 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지. -서완석(남, 60), 성북구 정릉2동 교수단지, 2014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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