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전투
1950.06.25 - 1953.07.27
사건 정치
한국전쟁 중 1950년 6월 26일부터 27일 사이에 미아리고개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전면 남침으로 38도 분계선에 인근한 전선이 무너졌고, 수도 서울이 위협받게 되었다. 6월 27일 북한군을 방어하기 위해 이응준 소장이 이끄는 국군 제5사단과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제7사단이 미아리고개의 좌측과 우측 방어를 나누어 맡았으며, 6월 27일 오후부터 북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은 적군의 진출을 지연시키기 위해 길음교 폭파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전차가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으로 진입하면서 미아리저지선이 무너졌다. 하지만 일부 부대가 방어진지에서 끝까지 저항하거나 국지적인 시가전을 펼치며 북한군에게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길음동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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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고:
  • 유형: 사건 정치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50.06.25 - 1953.07.27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길음동 일대
  • 비고: 미아리고개

근거자료 원문

  • 2. 6·25 事變과 城北區, 그리고 彌阿里고개 1) 6·25事變과 城北區 그리고 彌阿里 6월 25일 未明에 北韓의 일제공격으로 시작된 6·25事變 즉 韓國戰爭은 韓半島전역에 걸쳐 엄청난 상처와 피해를 입혔으며 동시에 숱한 副産物을 낳기도 하였다. 그런 부산물 중의 하나로 이 전쟁은 城北區 특히 「미아리」라는 지명을 온 나라안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널리 알리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우선 6·25사변은 3년 동안에 99만에 달하는 民間人의 死傷者와 모두 7만 9천여 棟의 住宅被害, 延建坪으로 따져 11,911,855평의 주택을 잿더미로 만들었거나 使用不能의 상태로 만들었다. 전국의 19개 市廳中 14개 市廳이 被害를 입었고 144개의 區·郡廳 중에서 80개의 區·都廳이 戰災를 입었으며 각급학교의 교실 3만개, 銀行店輔(金融組合포함) 443개가 잿더미가 되었고 國內 全企業體의 70%가 넘는 1만 4백개의 企業體가 피해를 입었는데 4,673개의 工場(건평 11,181천 평)이 戰災를 입어 거의 모든 生産施設이 稼動不能의 상태에 빠졌다. 戰災被害에도 지역차가 있어 農村보다는 都市에서 더 큰 피해를 입었고 都市 중에서도 서울·인천·천안·대전·김천·진주·춘천·원주·포항 등은 거의 全市街가 灰燼되었으며 평택·성주·왜관·하동 등의 군청소재지도 크게 피해를 입었다. 서울의 경우 6·25전에 191,260동의 주택 이 있었으나 事變으로 34,742동이 全燒되고 20,340동이 半燒된 외에 32,802동이 全破또는 半破됨으로써 被害家屋이 46.9%에 달했으며 9개 區廳 中 2개 區廳이 全燒되고 나머지 7개 區廳이 半燒 또는 半破되었고 277개의 洞事務所中 62개가 全燒破되고 205개가 半燒破되었으며 각급학교 교실 1,802개가 全燒破되고 514개가 半燒破됨으로써 被害 延建坪이 17,383坪에 달했다. 또 各種工場 1,139개가 파괴되어 이를 복구하는데 당시의 화폐가치로 792억원이 소요되어야 했다. 이상에 6· 25의 피해를 대체로 요약하였는데 城北地域 그중에서 특히 「미아리」라는 이름을 온 나라 안팎에 떨치게 한 것은 1950년 6월 26∼28일에 걸친 彌阿里戰鬪와 「斷腸의 미아리고개」라는 가요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서울市 내외의 많은 人士들이 이 미아리고개를 통해 이북에 납치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아래에서 그것을 차례로 소개하기로 한다. 그리고 아래의 소개중에서 「彌阿里戰鬪의 槪況」에 관하여는 國防部 戰史편찬위원회가 1977년에 발간한 韓國戰爭史 제1권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임을 밝혀 둔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56-158쪽
  • 2) 彌阿里 戰鬪 槪況 (1) 미아리 저지선의 형성 彌阿里저지선의 右戰線지휘관이 된 劉載興준장과 左戰線지휘관이 된 李應埈소장은 이곳의 지세로 보아 하루 밤의 지탱은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고, 淸凉里-月谷洞-鍾岩洞-彌阿里를 연결하는 선에 소위 彌阿里지구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당시의 미아리는 서울市에 편입된지가 아직 日淺하였을 뿐 아니라 그 일대가 共同墓地였으며 電車가 다니고 있었던 敦岩洞과는 고개 하나로 경계되어 있어 속칭 「미아리고개」라 불리었다. 이 고개의 북측에는 北漢山系를 水源으로 하는 貞陵川이 동남으로 흘러 中浪川으로 유입하고 있으며, 이 小川은 30m 폭에 양안이 3∼4m의 단애를 이루고 있어 倉洞-彌阿里를 연결하는 吉音橋와 京春街道上의 中浪橋만 폭파한다면 對戰車防壁으로 적격이었으며, 3번 도로가 이 고개를 동서로 갈라 서울로 진입하고 있다. 당초 이 지역의 전투지휘관으로 임명된 李應俊소장이 議政府地區전투사령관과 지휘권을 분할하게 된 것은 지역이 넓고 착잡할 뿐만 아니라 통신시설이 없었던 관계로 이곳의 防守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까닭으로 보인다. 12.00가 지나면서 倉洞線에서는 軍人, 피난민들이 앞을 다투어 山으로 들로 밀려들기 시작하고, 敦岩洞 電車終點에는 부인단체에서 만들어낸 주먹밥이 수십개의 책상위에 山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彌阿里저지선에는 헌병사령부의 헌병과 각 사단 헌병으로 된 낙오자 통제선과 수용소가 설치되었으며, 倉洞線에서 철수한 병력은 일단 여기에서 수용되어 취식한 다음 장교 3∼4명에 사병 80∼90명으로 중대를 임시편성하여 지정된 진지로 재배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16.00에는 저지선의 윤곽이 잡히게 되었으나, 그 총병력은 제 5사단의 2개 대대 및 제 8연대의 1개 대대 병력까지 合하여도 3,000명에 미급하였으며, 이를 지원하는 火器로서는 105㎜ 곡사포 6문, 57㎜ 對戰車砲 8문, 81㎜ 박격포 15문이 그 전부였는데, 그중 57㎜ 대전자포 2문과 81㎜ 박격포 5문은 중랑교 부근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吉音橋의 폭파에는 宋鍾泰, 康昌祚 중위 등이 지휘하는 공병학교 교도대를 배치하였는데, 이에 앞서 이들은 會洞線의 교량폭파에 임하였으나 기술 미숙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분산된 것이며 彌阿里에 집결한 工兵部隊병력은 2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倉洞線을 휩쓴 醜敵은 20여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騎馬를 후속시켜 동일 17.00에 彌阿里線으로 육박하였으나, 그 最左戰線을 담당한 제 20연대 제 1대대(장, 金漢柱 소령)의 일제사격에 이어 이곳 전 병력의 집중사격으로 그들은 1대의 전차를 유기한 채 도주하고 말았다. 이렇게 제 20연대는 서전을 승리로 장식함으로써, 계속 밀리기만 한 이곳 장병에게는 사기와 용기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거기에다 金桂元중령이 지휘하는 6문의 105㎜ 곡사포가 계속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였던 까닭에, 이것이 주효하였음인지 일몰 뒤까지도 그들의 재침을 볼 수 없었다. 이무렵 戰線에 위문차 나온 시민인사들은 확성기를 통하여 『國軍장병 여러분! 서울이 떨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 끝까지 싸워서 적을 물리쳐 주십시오.』하는 내용의 가두방송을 반복하면서 彌阿里街道에서 哀情어린 호소로써 격려하였으며, 어린 女學生들도 위문품을 들고나와 장병을 위문하고 격려하였다. 또한 총참모장은 이 보다 좀 늦은 19.00에 彌阿里戰線을 찾아 李應浚소장과 劉載興준장에게 『이제는 걱정할 것 없다. 美極東사령부는 John H. Church 준장으로 하여금 전진지휘소 (ADCOM) 를 水原에 설치케 하고, 내일부터는 B-29 重爆擊機 100대가 軍을 지원한다. 美軍이 올 때까지 이 선에서 적을 저지하라.』고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그를 수행한 헌병사령관 및 참모들도 밝은 표정으로 낙오병을 수습하여 전력을 보강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159쪽 그림 彌阿里-泰陸地區戰況(6.27) 참조) 이와 같이 이 최후 저지선에서 軍은 首都防守의 최종태세에 임하였으나, 모든 시민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음인지 아니면 18.00부터 방송하기 시작한 『美極東 사령부 전진지휘소 來韓』이라는 내용을 보도하는 都下각 신문의 호외에 위안이 되었음인지 조용한 가운데 밤은 깊어갔고, 두럽게 깔렸던 구름은 빗방울이 되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58-160쪽
  • 제5사단의 상황 : 사단이 이곳에 출동하기 전까지는 사령부를 光州에 두고 제15연대를 全州에, 제20연대를 松汀里(現 尙武臺부근)에, 獨立대대(장, 金琮舜 중령)를 咸陽에 두어 智異山 및 白雲山등지에서 준동하는 공비격멸작전에 임하고 있었는데, 6월 25일 08.00 陸軍本部로부터 『38°선 전역에 北傀軍침입, 제5사단은 전 병력을 12.00까지 龍山驛에 집결시키라 』는 급전에 따라 각 지역에 분산된 부대를 긴급소집하여 출동시켰던 것이다. 사단장 李應浚소장은 陸軍本部의 긴급 출동명령에 따라 제15연대(장, 崔榮喜대령)를 全州에서 서울로 급진토록 부연대장 趙在美중령에게 이르고, 제20연대(장, 朴基丙대령)에 대하여는 이날 長城에서 順天地區로 출동한 제3대대(장, 朴熙東소령)를 順天羅에서 회전케하여 26일 오전에, 또 光陽에서 복귀한 제1대대(장, 金漢柱소령)를 동일 오후에 각각 출동시켰으나, 白雲山(光陽)에서 토벌중에 있는 제2대대(장, 李昌求소령)가 당도하지 않아 잔류대장으로 임명한 李承轍 대위에게 『제2대대가 도착 즉시 서울로 출동하도록 조치하라.』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날 야간 특별열차편으로 상경하여 27일 07.00 총참모장에게 도착보고를 하였는데, 총참모장은 이 자리에서 명령하되 『사단장께서 도착하기 전에 휘하의 1개 연대를 汶山방변에, 또 다른 1개 연대를 議政府방면에 투입하였는데, 이는 전선상황이 위급하여 취한 조치이니 사단장은 彌阿里로 나가 議政府정면에서 철수하는 병력을 수습하고, 淸凉里 북방에 배치할 제8연대의 1개 대대도 통합 지휘하여 首都서울을 防守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陸軍本部는 이 사단을 汶山방변에 투입할 계획으로 먼저 龍山에 도착한 제15연대의 제3대대(장, 崔炳淳 소령)와 제20연대의 제3대대(장, 朴熙東 소령)를, 그때 마침 참모학교 피교육자로서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제15연대장 崔榮喜 대령으로 하여금 지휘케 하여 제1사단(장, 白善燁 대령)에 배속하고, 그 뒤를 이어 도착한 제15연대 제2대대(장, 安光榮 소령)도 제15연대장의 지휘하에 들게 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하여 議政府의 失陷을 확인하게 된 陸軍本部는 水色까지 진출한 동 대대를 급 회전케 하여, 그 뒤에 당도한 제20연대 제1대대(장, 金漢柱소령)와 같이 제20연대장 朴基丙 대령으로 하여금 지휘케하여 彌阿里고개에 배치하여 倉洞線을 보강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유로 사단장은 휘하 부대의 소재도 확인하지 못한채 참모장 朴炳權 대령, 정보참모 金容柱 중령, 작전참모 文亨泰 중령을 대동하고 헌병대장 朴昌錄 대위와 함께 10.00에 彌阿里에 당도하여 △103를 전방지휘소로 정하고, 군수참모 徐慶澤 소령에게는 제18연대(현 육군본부)에 설치한 후방지휘소를 지휘케 하였다. 11.00에 사단장은 △103에서 제20연대장으로부터 부대배치 상황을 보고 받았는데, 제15연대 제2대대가 3번 도로 우측의 △132(전 예술고등학교)에, 제20연대 제1대대가 그 좌측의 △171(당시 공동묘지)에, 그리고 제8연대 제2대대(장, 高白圭 소령)가 △143(回基洞)에 각각 배치되었음을 확인하고, 사단 공병대대장 梁宗益 대위에게 인근 주민을 동원하여 각 대대의 진지공사를 지원케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60-161쪽
  • 제20연대 제1대대의 상황 : 대대장 金漢柱 소령은 倉洞지역 부대의 엄호임무를 띠고 지난밤 △224 - △117에 제1중대(장, 金成龍 대위), 제2중대(장, 金周嗚 대위), 제3중대(장, 金昌德중위), 제4중대(장, 金用琳 대위)를 우로부터 좌로 1선배치 하였으나, 날이 밝은 27일07.00에 地形偵察을 다시 하여 3번 도로의 瞰制가 용이한 공동묘지인 △117의 동측으로 재배치하였는데, 6정의 水冷式 重機關統은 3번 도로에서 교차사격이 가능하도록 하고, 81㎜ 박격포 5문은 △171의 남단부에 배치하여 3번 도로의 삼거리에서 대대 左前面의 교량간에 탄막을 형성토록 하였다. 이때에 대해 전면에는 小橋梁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I兵이 배치되어 폭파장치를 하고 있고, 그로부터 50m 떨어진 도로의 좌측에는 金明煥 대위가 지휘하는 57㎜ 對戰車咆 3문이 이 교량을 목표로 지향하고 있었다. 대대는 그간 共睡擊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重火器중대인 제4중대도 소총으로 장비되어 있었으며, 출동시에 연대 兵器庫에 퇴장하였던 81㎜ 박격포와 기관총, 그리고 2.36” Rocket 咆 등은 열차에 탑재하고 온데 불과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대대장 金漢柱 소령은 집결지인 제18연대 막사에서 장비조작에 경험이 있는 자들로 재편성하고, 중대장도 金周嗚 대위에서 보병학교 초급반 교육을 이수한 金用琳대위로 교체하였다. 그뒤에 대대는 사단 工兵隊와 西北靑年團이 동원한 주민의 지원을 받아 △171에 진지 편성을 완료하고, 연대 通信 장교 韓泰勳 소위 지휘로 연대와의 通信架設도 끝났는데, 이때 사단장으로부터 『곧 美軍이 오고, 증원부대가 갈터이니 진지를 고수하라.』는 전화에 이어 연대장으로 부터 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이날 아침 1대의 L-19 輕飛行機가 『오늘부터 美공군기가 출격하니 안심하라.』는 空中放送이 있었던 터이므로, 곧 美폭격기가 출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飛行機의 爆音은 들리지 않고, 12:00가 지나면서 부터는 倉洞線에 배치되었던 병력이 밀리기 시작하여, 헌병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대대 방어지역을 통과하면서 후방지역으로 빠져 나가고, 피난민도 철수병력 속에 섞여 나오고 있었다. 我軍의 철수가 거의 끝난 것으로 보이는 17:00에 20여대의 戰車와 騎馬隊列이 陣前으로 육박하기 시작하므로 대대장은 이들이 진전으로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 교량에 전차가 이르렀을 때 『사격 개시 ! 』명령을 하달하여 일제 집중사격을 가하게 하였다. 동시에 工兵은 爆藥의 導火線에 정화를 시켰으나 교량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끝나고, 57㎜ 對戰車咆도 先導戰車에 側射를 가하였으나 오히려 戰車로부터 반격을 받기만 하여 그중 1문이 파괴되고 그 사격組員 6명이 적탄으로 전몰하고 말았다. 그리고 제4중대장 金用琳 대위가 편성한 2.36”Roeket 咆의 戰車特攻組는 조작 미숙으로 한발도 발사를 하지 못하였는데, 이를 본 연대 정보장교 文鍾燮 중위는 직접 Rocket 咆를 조작하여 先頭戰車 1대를 각좌시켰다. 이로 인하여 길이막힌 그들은 협로에서 전차를 돌려 되돌아가고 말았는데, 이때 나무와 풀로써 전차를 가장하였던 장갑차와 차량들은 雨注하는 我軍의 포격과 총격으로 박멸되고, 10여대로 보이는 전차만 퇴각하였다, 이때에 여기에서 浮虜한 北傀 戰車兵은 말하기를 『威力偵察 중 체포되어서 분하다. 우리 지휘부에서는 초전에 國防軍보병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였음에 놀랐으나, T-34전차에 상대하는 화기가 國防軍에 없음을 알게 된 뒤로부터는 보병의 전투를 극력 피하고 전차를 주로 하는 전법으로 전환하였다.』라고 진술하였다. 당시의 연대장 朴基丙 대령은 『이러한 일이 있은 뒤부터 비가 몹시 오고 적이 접근하는 기색이 없어서, 그들의 재침을 다음날 早朝로 예상하였다.』라고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61-162쪽
  • 제15연대 제2대대의 상황 : 제15연대 제2대대(장, 安光榮 소령)는 26일 03:00에 全州를 출발하여 同일 11:00에 龍山睡에 도착하였는데, 同購에서 『汶山방면으로 직행하라』는 총참모장의 명령을 받고 곧 水色驛에 이르렀는데, 재차 복귀하라는 陸軍本部의 명령에 따라 대대를 서울市內로 후퇴시켜 제18연대 막사에 수용하였다. 27일 07:00에 제20연대장 朴基丙 대령은 대대장 安光榮소령에게 『貴 대대는 이제부터 내 지휘를 받을 것이며 彌阿里고개 우측의 △132(전 藝術高等學校 뒤 高地)를 점령한 다음 이를 고수하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명령을 받은 대대장은 이날 08:00부터 대대를 미아리 고개로 이동시켜, 제7중대(장, 裵益成 대위)를 동 高地의 동록에, 제5중대(장, 金淳대위)를 북록에, 제6중대(장, 金國柱 대위)를 서록에 전개하였다, 그리고 제8중대(장, 安政熙대위)가 보유하는 81㎜ 追擊咆와 小銃 중대의 60㎜ 박격포로서는 咆兵火力 계획에 맞추어 삼거리에 火集帶를 형성토록 하였다. 그런데 대대는 이날 14:00를 期하여 제20연대장 朴基丙 대령의 지휘에서 벗어나 우측에 인접한 제1연대(장, 李喜權 중령)의 작전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구두상의 지휘권 변경이며, 통신시설이 없었고 부대의 소재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제1연대와는 아무런 접촉도 없이 독자적인 부대지휘를 하게 되었다. 대대는 사단 1兵과 인근 주민의 협조를 얻어 진지구축을 완료하고 대대관측소를 △132에 설정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62쪽
  • 제8연대 제2대대의 상황 : 제2대대장 高白圭 소령이 27일 08:00에 연대장 徐鐘喆 중령으로부터 수령한 명령의 요지에 이르기를 『대대는 淸凉里 북쪽 요선에 전개하여 서울 東北郊를방호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대장은 노량진에 집결한 부대를 청량리로 이동시켜 동일 10.00에 제5중대(장, 安泰甲 중위)를 右 제1선으로 하여 △106(淸凉里 동쪽 1㎞) 에, 제6중대(장, 金福經 대위)를 中央 제1선으로 하여 中浪橋(淸凉里 동북쪽 1㎞) 부근에, 제7중대(장, 金鳳俊 대위)를 左 제1선으로 하여 6143(淸凉里 북쪽 2.5㎞) 에 각각 전개시켜, 제8중대(장, 鄭昇和 대위)의 機關銃소대는 제5, 제7중대에 각각 1개 소대씩 배속하고 81㎜ 박격포소대는 △143동단에 배치하여 대대를 일반지원케 하였다. 이에 앞서 대대장 高白圭 소령은 25일 10:00에 陸軍參謨학교 피교육중 복귀한 연대장 徐鐘喆중령을 따라 水落山(議政府 남동쪽 5㎞) 일대의 지형을 정찰하였는데, 재차 육군총참모장으로부터 하달된 연대의 임무는 『加平으로 이동하여 제6, 제7사단간의 노출된 측방을 방호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대는 연대의 선발대로써 동일 16:00에 加平으로 이동하여 寶納山(加平북쪽 1㎞) 에 진지편성중 26일 19:00 『漢江南岸으로 철수하라』는 연대장의 명령에 따라 이날 07:00노량진에 집결한 것인데, 그 직후에 서울 東北郊의 방어임무를 받고 다시 북상하게 된 것이며, 이때에 제3대대(장, 朴泰云 소령)는 金浦지구 방어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대대는 敵과의 접촉도 없이 세번이나 부대이동만을 하게 되고, 그 결과로 전투력만을 분산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대대가 진지에 진입하여 棄城이 완료될 때까지의 敵情에 대하여서는 말할 나위없고 아군의 전반 상황도 杳然한 상태였으며, 다만 병사들의 이목을 통하여 左인접에 제5사단이 배치되었음을 알았고, 이날 15:00에 제3사단 공병 1개 소대가 中浪橋부근에 나와 있음이 보고되었을 뿐이다. 철수부대의 상황 : 倉洞線에 배치된 부대는 각자 분산으로 그 일부는 泰陵과 구파발의 두 방향으로 철수하였으며, 彌阿里로 철수한 병력만은 대체로 落伍者 收容所에서 소속이나 建制에 구애됨이 없이 80∼90명 1개 중대로 편성하여 재배치하였다. 따라서 각 연대는 그 주력의 소재에 따라 제1연대 혹은 제25연대 등으로 호칭되었는데, 제1연대는 3번 도로 우측인 △164의 동단(鍾岩洞)에, 그리고 제3연대는 貞陵에, 제25연대는 미아리 고개에 각각 배치되었으며, 제16연대는 예비로써 敦岩國民學校에 집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곳에서 며칠만에 처음으로 급식을 받게 되었고, 탄약도 분배되었으나 山을 따라 철수한 부대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부대에게는 아무런 후방지원도 없었던 것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62-163쪽
  • 陸軍本部의 情況 : 총참모장 蔡秉德소장은 金鍾泌중위의 상황보고에 따라 서울 고수에 대한 그의 신념을 번복하고 陸軍本部와 在京부대를 12:30부터 始興으로 철수토록 하여, 15:00에 步兵학교로 이동하였다. 陸軍本部의 뒤를 따라 始興으로 이동한 美 軍事顧問단장 대리 William H.S. Wright 대령은 東京의 MacArthur 元帥로부터 『중대한 결심을 할 단계에 이르렀으니 원 위치로 복귀할 것. 상황을 낙관해도 좋다.』라는 지령을 받고, 이를 총장에게 전하였다. 이에 따라 총참모장은 그의 결섬을 또다시 변경하여 복귀명령을 하달하게 되었고, 이미 철수한 부대들은 17:00를 전후하여 원 위치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각 부대는 철수할 때에 통신시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에, 상당 시간 통신의 마비를 면치 못하게 되었으며, 거기에다 軍의 뒤를 따랐던 일부 시민들도 다시 서울로 귀환의 길을 재촉하는 등으로 漢江橋와 龍山 일대는 車輔隊列과 往復人波로써 혼잡의 극을 이루게 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63-164쪽
  • (2) 弼阿里저지선의 붕괴 彌阿里에 저지선을 형성한 李應俊 소장과 劉載興 준장은 각각의 담당 지역내의 방어진지를 확인하고, 敵 戰車의 진출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헌병으로 하여금 동원케 한 각종 차량 수십대로써 삼거리일대의 大路를 폐쇄케 하는 한편 모든 曲射火器로써 이 일대에 火集帶를 형성케 하였으며, 57㎜ 대 전차포와 2.36” Rocket포 등 對戰車火器는 이 고개 의 좌우측에 배치하여 吉音橋上에 지향케 하고 각종 小火器는 야간에도 최저 표척사격이 가능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工兵장교 松鍾泰, 姜昌祚의 양 중위가 지휘하는 工兵은 吉音橋에 배치하여 전차가 다리 위에 이르렀을 때 폭파시키도록 그 임무를 부여하고, 이의 실시가능성을 수 3차 점검하고 확인하여 倉洞線에서와 같은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양 지휘관이 방수태세를 굳히고 적의 야습에 대비하였으나, 이들 부대를 통할지휘할 수 있는 통신수단이 없었다. 특히 야간작전에 있어서는 통신의 의존도가 증대되는데 유일한 연락수단인 傳令의 활용도 줄기차게 쏟아지는 폭우와 칠흑같은 夜暗으로 무위하게 되었으며 각 부대를 통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빗물에 잠긴 散兵壕내의 장병은 호 밖으로 나와있게 되고, 노변에 배치된 병사들은 인근 민가의 처마밑에서 비를 피해야 하는 실정에 있었다. 이때에 여러 지휘관들은 『敵이 야습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단하였다는 것인데 그 까닭은 그들이 38°선을 돌파한 이래로 夜襲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이날 17:00 한차례 크게 패퇴한데다 폭우로 인하여 機動의 제한을 받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23:00가 지나면서 비는 점차 멎기 시작하였으나 전투위치를 이탈한 자들은 잠이 들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무렵 서울의 곳곳에서는 총성이 울리면서 曳光彈의 불꽃이 상공을 누렸다. 이는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잠입한 것으로 보이는 敵 遊擊隊의 소행으로써 그들의 전투부대와 호응하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으나 我軍은 이를 막연히 간과함으로써 江건너 불 구경과 같이 지나치고 말았다. 한편 汶山 방면으로 侵襲한 敵은 我 제1사단에 의하여 奉日川북쪽에서 저지되고 있었으나, 倉洞을 침습한 北偶 제4사단은 그 여력으로 서울을 강점하려고 彌阿里를 목표로 육박하였다. 그러나 我軍의 완강한 항거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각한 것으로 보였는데, 그들은 미리 잠입시켰던 遊擊隊의 호응을 받아 24.00를 전후하여 彌阿里를 급습하였다. 이때 이를 목격한 제15연대의 朴東甲 이등상사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삼거리에 설치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偵察兵의 유도를 받으면서 吉音橋로 접근하였다.』고 하였다. 戰車의 폭음에 놀란 병사들은 졸음에서 깨어나 적의 접근을 알리는 총성을 울렸고, 敦岩洞 電車 終點에서 6문의 105㎜ 곡사포를 지휘한 金漢柱 중위는 이를 확인키 위한 照明彈을 발사하였다. 비와 안개로 인하여 뚜렷하지는 않으나 戰車로 보이는 10여개의 물체가 照明下에 부각되자마자, 고개 좌우측에 배치되었던 57㎜ 對戰車咆와 2.36” Rocket咆 및 機關銃등이 일제사격을 가하여 이 戰車에 명중시켰으나 오히려 태연하게 고개로 접근하면서 戰車咆와 機關銃을 난사하여 어둠속의 彌阿里고개를 불바다로 화하게 하였다. 그들은 사격을 가하면서도 유유히 고개를 넘어 서울로 闖入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28일 01:00의 일이었다. 이를 확인한 모든 장병들은 경악한 나머지 각개 분산하고 말았으며, 丘陵지대에 배치된 대부분의 부대들은 날이 밝은 다음 敵 보병부대의 急射를 받고 비로소 서서히 칠수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서울의 最終堡壘인 彌阿里 저지선이 허무맹랑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64-165쪽
  • 가) 右戰線의 상황 : 彌阿里 저지선의 右戰線을 담당한 劉載興준장은 △164(彌阿里고개 우측)를 前方指揮所로 하여 同高地의 서단에 對戰車火器와 병력을 중점적으로 배치하고, 姜文奉대령으로써 道路障碍物 설치와 吉音橋 폭파장치의 준비상태를 확인 점검케하여 對戰車 방어책을 강구하는 한편, 右戰線에 배치된 부대와는 전령으로써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 제1선의 제8연대 제2대대와는 수차에 걸친 전령의 파견에도 불구하고 연락이 유지되지 못하고, 그러는 동안 폭우와 함께 밤은 깊어갔다. 劉載興 준장은 敵의 야습은 없을 것으로 보았으나, 날이 밝으면 大攻勢가 예상되는 그들의 戰車와 大兵力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陸軍本部의 계획과 대책을 알아보기 위하여 22:00에 陸軍本部에서 총참모장을 만났다 그러나 총참모장으로부터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은 듣지 못하고 『陸軍本部를 漢江이남으로 철수할 것이니, 劉 준장은 빨리 돌아가 李應俊 소장과 상의하여 彌阿里戰線을 고수하라.』는 질책만을 받고 전선으로 돌아갔는데, 총참모장의 복안으로 보아 종국은 서울을 포기하고 陸軍本部를 한강 남쪽으로 철수시키기 위한 하나의 조처로써 彌阿里 戰線을 형성시켜 엄호임무를 수행케 하였던 것으로 추찰하였다. 戰線으로 복귀한 劉載興준장은 즉각 군수참모 尹永模소령을 전방지휘소로 불러 필요한 지시를 하고 明朝에 감행할 작전에 대비케 하였다. 한편 참모장 金鍾甲 대령은 倉洞線에서 사령부 요원과 같이 철수하여 사단장과는 연락을 유지하지 못한 채, 연락장교단장 李龍文 대령과 함께 철수병력 수습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며, 군수참모 尹永模 소령은 軍需 지원요원들과 같이 敦岩派出所로 철수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군수참모 尹永模 소령은 그때의 상황을 술회하기를 『나는 軍需支援 특별참모들과 倉洞線에서 철수하여 敦岩派出所에 있었는데 23:00에 연락장교로부터 사단장이 찾는다는 말을 듣고, 彌阿里고개 남쪽에 자리한 사단 전방지휘소로 갔다. 사단장은 나에게 「明朝를 기하여 반격할 것이니 탄약과 給食分配를 05:00이전에 완료하도록 하되, 제6사단 병력까지도 이에 포함시켜 준비하라.」고 지시한데 이어 「사령부의 불요불급한 行政要員과 중요서류 등은 곧 鷺梁津으로 철수시키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미 夜深한 때인지라 給食問題는 병참중대장 崔昌爆 대위에게, 兵器 및 彈藥問題는 병기부장 李載龍에게 각각 분담시켜 이를 05.00 이전에 완료하도록 강력히 지시하고, 城北警察署에서 참모장을 만나 사단장의 뜻을 전하였는데, 이 때에 참모장은 경리참모에게 일부 行政要員과 사단 運營資金 및 중요서류 등을 3/4 ton車에 실어 떠나게 하였던 것이다 그 뒤 그를 만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 漢江橋 폭파시 變을 당한 것이 아닌가 본다. 이와같은 조치를 취하는데 1시간이 경과되었을 무렵 彌阿里고개에서는 교전하는 銃砲聲이 요란하게 메아리쳤다. 나는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車를 몰아 지휘부로 달렸으나 敦岩洞 電車길에 이르렀을 때 굉음과 함께 고개를 넘어오는 戰車의 대열과 부딪치게 되었으며, 이에 놀라 차를 급 회전시켜 전투준비에 여념이 없는 軍需지원요원들을 대동하여 西永庫에서 漢江을 건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서울 방호를 위하여 지휘관 참모가 동분서주한 보람도 없이 사태가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또 무엇을 어떻다고 할 것인가. 運이요, 命이라고 할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제8연대 제2대대의 상황은 省略) 제1연대(흔성)의 상황 : 제1연대(장, 李喜權중령)는 △164의 동록에 배치되었으나, 27일 밤의 폭우와 함께 그 일부는 시내로 잠입하여 참모장 金鍾甲 대령에 의하여 城北경찰서에 수용되고, 잔여병력이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에는 이미 敵의 전차가 침입한 뒤였으므로 각개 분산하여 각 渡船場을 찾아 漢江을 건너게 되었다. 제15연대 제2대대의 상황 : 제2대대(장, 安光榮 소령)는 彌阿里고개 업구에 해당하는 △132에 진지를 편성하고, 敵의 夜聲에 대비하여 주간에 高地에 배치한 기관총이나 2.36”Rocket咆를 低地로 옮겨 射向을 吉音橋에 지향케 하였다. 그러나 적의 전차가 진전에 육박하였을 때는 대대의 대부분이 잠 들고 있었으니, 당시 吉音橋의 경계임무를 맡고 있던 제5중대원의 목격담에 따르면 한 兵士가 접근하는 敵의 정찰병에게 『停止누구냐 !』고 誰何하자 상대방은 咸鏡道의 사투리로 소리를 지르면서 그 咆兵의 가슴에 총검을 찌르고, 전차를 유도하며 앞으로 나갔다고 하였으며 또한 附言하기를 『1개 분대로 보이는 정찰병이 전차보다 30∼40m 앞을 전진하였는데, 吉音橋에 이르러서는 먼저 교량의 상태를 확인하고 뒤로 돌아가서 戰車兵에게 이상이 없다고 전달하는 소리를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戰車를 먼저 발견한 제5중대 초병들의 총성이 울리면서 고요했던 彌阿里고개에는 또 한차례 彈雨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제5중대장 金淳 대위는 戰車가 눈앞에 다가옴을 목격하자 곧 수류탄을 들고 전차에 뛰어 올랐으나 그들이 발사한 기관총으로 장열하게 전사하였다. 이를 본 선임장교 李昌道 중위는 朴東甲 이등상사와 같이 전차에 뛰어오르려 하였으나 該 戰車群은 이미 고개 중턱을 오르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제6중대장 金國柱 대위도 2.36” Rocket咆를 비롯한 全火器룰 전차를 목표로 집중발사케 하였으나, 鐵甲에 맞아 반사를 일으킬 뿐으로 그대로 속력을 가하여 고개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로써 20여분간의 포효도 사라졌고 동 고개는 다시 고요속에 묻히게 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65-167쪽
  • 나) 左戰線의 상황 : 彌阿里방어선의 좌 전선을 담당한 李應浚소장은 △103(彌阿里고개 左側)를 전방지휘소로 하여 제20연대 (-2)를 △171의 동록에 제3연대 (-2)를 △224와 △ 171간에, 그리고 제25연대 (-2)를 △224동록으로 조정 배치하고, 제16연대 (-2)는 이미 말한대로 敦岩國民學校에 집결시켜 예비로 하였다, 對戰車 방어 대비에 있어서는 우 전선과 같이 확인한 바 있거니와 심한 소낙비가 내리기 때문에 敵의 侵襲 예상시기를 다음날 早朝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22:00가 지나면서 후면의 市街地 곳곳에서 曳光彈이 오르기 시작하고 전방에 배치한 일부 병사들이 동 고지로 몰려들었다. 李應俊 소장은 한 士兵을 붙들고 『왜 후퇴 하느냐?』 하고 물으니까 그 兵士는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고 하면서 시내로 들어가 버렸다. 이상히 여긴 동 소장은 연락장교를 보내 상황을 확인해오도록 하였는데, 칠흑같은 夜暗으로 인하여 인접부대를 찾지못하고 돌아왔던 까닭에 다시 사단 참모장 朴炳權 대령과 정보참모 金容柱 중령으로 하여금 육군본부로 가게하여 이 저지선을 고수하는 것인지 아니면 철수하는 것인지 육군본부의 확고한 방침을 알아 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朴炳權 대령이 육군본부에 당도하였을 때는 23.30이였다. 狀況室에서 작전국장 張昌國 대령을 만났는데, 동 대령은 『나로서는 어떠한 조치를 취할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고 하여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정보참모 金容柱 중령과 車를 타고 敦岩洞 電車終點에 닿기도 전에 전방에서 전차의 궤도 소리가 들렸다. light를 끄게 하고 金 중령으로 하여금 확인토록 한 바, 전차임이 분명하였는데 4대를 확인하였다. 車를 돌려 길 가에 세워 놓고 포복을 하다시피 하여 전방지휘소까지 갔을 때에는 이미 李應浚 소장은 보이지 않고 작전참모 文亨泰 중령과 몇몇 장교들이 남아서 철수명령을 하달하고 있었다. 참모장 朴炳權 대령은 工兵대대장 梁宗益 대위에게 『各 부대를 景武臺 뒷 高地로 철수하도록 전달하라.』라고 이르고 參謨要員과 같이 01:30에 △103를 떠나 “아리랑 고개” 경유로 서울市街地를 횡단, 西永庫에서 漢江을 건넜으니, 예하 부대에게는 철수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다. 한편 李應俊 소장은 △103에서 참모장 朴炳權 대령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24.00가 되도록 오지 않았다. 잠시 뒤 전속부관 崔德彬 중위는 『사단장님 벌써 敵戰車가 통과했습니다.』라고 보고한데 이어 옆에 있던 작전참모 文亨泰 중령도 『이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육군본부의 동정을 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李應俊 소장은 작전참모 文亨泰 중령에게 『28일 00.30를 기하여 현 전선을 철수한다. 전 부대는 노량진으로 집결토록 전달하라.』는 구두명령을 하달하고 △103를 떠났다. 그뒤 文亨泰 중령은 철수명령을 전령편으로써 전달케 하였으나 전달이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를 회상하여 李應俊 소장은 말하기를 『首都 서울 방수를 위한 최종의 보루를 단 하루도 지탱하지 못하고 물러서야하는 심정은 착잡하기 한이 없었다. 헌병대장 朴昌錄 대위의 호위를 받으면서 육군본부에 당도한 것은 02:00였는데, 나를 본 참모부장 金白一대령은 「이거 어찌된 일이냐」고 당황해 하였다. 그 옆에는 작전국장 張昌國 대령 정보국장 張道英 대령도 있었으나 敵 戰車가 시내로 침입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사단 후방지휘소에 있던 군수참모 徐慶澤 소령은 이날 밤 雨中임에도 曳光彈이 계속 오르고 있음을 수상히 여기고 戰線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본부중대장 崔民壽 중위와 같이 사단 전방지휘소를 방문키로 하였다. 이들이 彌阿里고개를 오르고 있을때, 고개를 넘어오는 전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車를 세운 徐慶澤 소령은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다가오는 전차에 접근하였는데, 이때 不意에 機關銃射擊을 받은 徐慶澤 소령은 그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를 보고있던 崔民壽중위는 급히 차를 회전시켜 사단 후방지휘소로 돌아가 철수를 서두르게 하였으나 이미 漢江橋가 폭파되어 西永庫에서 배편으로 한강을 건너게 되었다. 제25연대(흔성)의 상황 : 연대장 金炳徽 중령은 27일 19.00에 混成兵力 500여명을 수습하여 彌阿里고개 좌단에 전개시켰으나, 그 뒤 姜文奉대령의 지시에 따라 부대를 三陽洞으로 이동시켜 배치하였다. 이날 初夜半에 偵察隊로 보이는 1개중대 규모의 敵이 대대 전변에 나타났으나 그들은 전투를 회피하는 듯이 곧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전선은 소낙비만 내릴뿐 고요하였다. 그로부터 3시간이 지난 뒤 검은 물체의 대열이 3번 도로를 따라 미아리 고개로 접근하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장병이 졸고 있었던 까닭에 이를 알지 못하였다, 연대장 金炳徽 중령도 그간의 피로가 겹친 탓으로 깜박 잠이 들었는지 東天이 밝았을 때는 敵전차대열과 보병부대의 대열이 남하중에 있었다. 그리하여 연대장은 부대를 永登浦 방면으로 철수시킬 복안으로, 작전주임 曺南喆 소령과 정보주임 姜應燮 대위 등 本部要員을 시켜 부대를 北岳山(中央廳 뒷山)으로 철수 시켰는데, 이곳에 집결한 병력은 300여명이었다. 거기서 내려다 본 서울 시가의 곳곳에는 이미 北傀旗가 게양되고, 靈泉派出所앞에는 전차 3대가 보였으며, 西大門形務所쪽에서는 萬歲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해가 진 다음 小集團으로 漢江을 漢江하도록 침투시켰는데, 마지막 남은 50여명은 敵정찰대에 의해서 발각되어 紫霞門에서 분산되었으며, 연대장 金炳徽 중령은 北漢山에서 2일간을 보낸 뒤 변복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廣莊洞에서 漢江을 건넜다. (제3연대(혼성)의 상황 省略) 제20연대 제1대대의 상황 : 연대장 朴基炳대령은 서전에서 승리를 거둔바 있는 제 1대대(장, 金漢柱소령)를 격려하면서 연대 군수주임 金瀅栽 대위로 하여금 탄약과 식사를 추진케 하였다. 대대는 그 뒤에도 我軍의 배치상황을 探索하려는 1개 중대 규모의 적 정찰대를 물리쳤으며, 야간전투에 대비하여 그 右半은 부대대장 吳泰泳 대위가 그 左半은 대대장 金漢柱 소령이 직접 지휘키로 하였다. 그러나 이 대대에서도 밤 사이에 적 전차가 저지선을 뚫고 서울로 침입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28일 날이 밝아서 적의 대부대가 남하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상황이 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대대장은 즉시 EE-8전화기로 연대장과 사단지휘소를 호출하였으나 응답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었던 부대들도 보이지 않은 까닭에 전령을 보내어 연대와 사단 지휘부를 확인케 하였으나 그 소재를 찾지 못하였다. 이에 당황한 대대장은 부대대장과 各 중대장을 거느리고 現 진지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자리에는 지난 밤 탄약과 식사를 운반하고 쏟아지는 비로 인하여 돌아가지 못한 군수주임 金瀅栽 대위도 같이 있었다. 그리하여 대대는 28일 06:00서울 地理에 밝은 제 1중대장 金成龍 대위를 선두로 하여 철수하기 시작하였는데, 선두 부대가 三仙橋 부근에 이르렀을 때 敵전차가 포격을 가하면서 추격하였다. 이에 당황한 대대는 安岩川으로 뛰어 내려서 개울을 따라 뚝섬으로 빠져 나가게 되었다, 대대가 漢江邊에 와서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기에 앞서 점검한 결과 태반의 병력과 각종 共用火器를 잃게 되었음이 확인되었는데 이 손실중에는 成鶴喆 대위, 朴淑淸 중위, 金琮寬 중위 등을 포함한 2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철수제대의 뒤를 따르던 제 4중대(장, 金用琳 대위)와 제 3중대(장, 金昌德 중위)는 선두부대가 흩어지는 것을 보고 다시 북상하여 北岳山, 紫霞門 쪽으로 철수하였던 것인데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처럼 많은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단되었던 것이다. 제16연대(혼성)의 상황 : 연대장 文容彩 대령은 27일 19.00에 1개 대대 미달의 混成병력으로써 敦岩國民學校에 집결하여 彌阿里지구 전투사령부의 예비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22:00가 지나면서 부터는 시내의 여러 곳에서 曳光彈이 오르기 시작한 까닭에 전령을 시켜 어느쪽에서 울리는 신호인지를 확인토록 지시하였으나, 보낸 전령은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曳光彈의 신호만은 계속 오르고 있었다. 이때에 부연대장 李源長 중령은 연대장에게 의견을 구신하되 『戰線은 조용한데, 지금 曳光彈이 오르고 있는 것은 침투한 敵의 신호로 보이며, 우리는 敵의 포위망 속에 있는지도 모르니 그들에게 전멸을 당하느니 보다 안전한 곳으로 철수하였다가 後圖를 策할 것이 가하다고 사료됩니다.』라고 하였으나 연대장은 『상부의 명령없이는 철수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완강히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예광탄은 더 심하게 오르는 것 같이 보였고 주위의 조용함은 더욱 더 불안감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부연대장 李源長 중령은 철수할 것을 재차 건의한 결과 연대장은 이에 동의하고 부대를 漢江 남쪽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와 같이 되어 연대는 동일 24:00를 기하여 철수를 강행하였으며, 同 대열이 驚梁津 水源池를 통과할 때에 後方에서 “꽝”하는 폭음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반면에 彌阿里고개에 분산 배치되었던 연대의 일부 병력은 敵전차가 서울에 침입한 뒤에도 철수치 않고 항전하여 國軍의 기개를 고양시키기도 하였는데, 그는 동 연대 제 3대 대장 대리 崔敏燮 대위와 동 대대의 韓金錫 중위 등이다 崔敏燮 대위는 동 대대 정보관 金熙碩 대위가 지휘하는 혼성 1개 소대와 같이 제 25연대 지역에 배치되었는데, 敵의 전차가 방어 정면에 통과하자 철수하려는 소대를 제지시켜 28일 06.00에 후속하는 적 1개 대대 규모와 교전한 결과 30여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인 소대는 敵 기관총 사격에 제압당하여 흩어지고 말았으며, 철수시기를 잃은 崔敏燮 대위는 끝내 한강을 건너지 않고 敵 治下의 奉日川, 汶山등지에서 遊擊戰으로 그들의 치안을 교란시키고 있다가 9.28수복 이후 그의 공적을 인정받고 軍에 복귀하게 되었다. 또한 韓金錫 중위는 28일 07:00 그의 左右側인접부대들이 철수하고 난 다음에도 소대를 昌信洞 돌산(활터)에 배치하고 시내로 침습하는 敵보병에게 집중사격을 가하게 하여 그들을 분산 지연시키게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67-170쪽
  • 3) 斷腸의 彌阿里고개 6.25사변이 일어나서 서울이 적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 그 시간이 너무나 짧았기 때문에 대다수 서울市民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그대로 서울에 눌러 앉아있었다. 서울이 人民軍治下에 들어가고 中央廳에 人民委員會, 서울市廳에 서울市 人民委員會가 들어 있었던 敵 治下의 생활이 만 3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던 초기에는 미처 피난가지 못한 派出所소장이나 洞長같은 인물들을 잡아 이른바 人民裁判이란 이름의 直決 死刑執行을 했으나 그 후 약간 질서가 잡히고 부터는 많은 사람들을 구속 수감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韓寶敎·方台榮·金思演 등 일제하에서 中樞院參議 등을 지낸 親日派도 있었지만 金奎植·趙素昻·安在鴻·白寬洙·吳夏榮·元世勳·金若水 등등 巨物政治人들, 崔奎東(당시 서울大學校 총장)·玄相允(당시 高麗大學校총장) 등과 같은 제 1급 교육자, 白麟濟(당시 白病院원장)와 같은 저명한 의사, 그리고 辯護士등에서부터 區廳長·구청직원·刑務官·洞長·洞직원, 중앙 각 부처 또는 각종 지방청의 간부와 직원, 大韓靑年團員, 韓電이나 일반 기업체의 중역과 회사원, 牧師 등의 宗敎人, 신문기자, 義勇軍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地下에 숨어 있던 대학생들, 심지어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끌려갔었다. 서울市內外에서만 1,500명 가까운 인물들이 이때 구속·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당시의 城北區관내에서만 밝혀진 숫자로 225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는 安在鴻·趙素昻과 같은 거물 政治人, 孫晉泰(歷史學者, 당시 서울大學校 文理科大學學長), 丁奎昶(성균관대학 교수) 등과 같은 學者, 蔡容默 변호사, 洪必求 서울도자기회사 사장 등 비교적 저명인사도 포함되어 있지만 20세도 안되는 중학생도 있었고 女子大學에 다니는 아리따운 처녀도 있었다. 동직원도 청년단원도 노동자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 서울市 人民委員會와 人民軍은 이렇게 구속·수감중에 있었던 人士들을 강제로 北送하기 시작한다. UN軍이 仁川에 상륙하고 서울을 향해서 侵功해온 1950년 9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서였다. 그런데 이들을 拉致해 北으로 끌고 가는 主된 行路를 敦岩洞-미아리고개-우이동-議政府로 잡은 것이다. 이들이 어떤 상태로 끌려갔느냐 하는 것은 필자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6.25사변이 채 끝나기도 전인 1951∼52년 경에 半夜月에 의해 作詞되고 李在鎬에 의해 作曲되었으며 歌手 이해연이 불러 오늘날에도 모든 국민의 心琴을 울리는 「斷腸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말이 깨끗하게 단장된 현재의 미아리 고개 그 광경을 너무나 잘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노래말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1. 미아리 눈물고개 임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쪽 목 묶인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그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2. 아빠를 기다리다 어린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그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70-172쪽
  • 4) 被害와 復舊 6.25사변이 일어나자 서울市內에서 가장 빨리 敵의 유린을 당한 곳이 城北區였고 또 1951년의 1.4후퇴는 모든 區에 공통된 일이었으나 城北區는 유독 4.25후퇴라는 것을 또 한번 경험한다. 즉 中共軍의 介入으로 일단 平澤地方까지 내려갔던 UN軍이 平澤阻止線에서 敵의 공격을 격퇴하고 江原道 鐵原·金化地區까지 北上할 수 있었으나 1951년 4월 22일서 30일가지 약 10일간 계속된 敵의 공격이 현 道峰區 牛耳洞까지 내려오자 4월 25일에 城北區등 서울 北部일대 주민에게 피난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피난은 4월말에 敵이 다시 北上퇴각함으로서 약 10일만에 해제된 것이었다. 6.25사변으로 彌阿里전투는 치열하였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미아리 이북지대에는 일반주민의 수가 극히 적었으므로 미아리 전투에 의한 官民의 피해는 별로 대단치가 않았다. 또 美제 5空軍의 폭격으로 서울의 중심부(종로·중구)와 龍山·麻浦 등지는 거의 잿더미가 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다행이 城北區 관내는 공습 등이 없어 建物파괴 등의 피해는 별로 대단하지가 않았다. 6.25사변이 거의 끝나가던 1953년에 時事通信社에서 발행한 「서울 再建相」이란 책자는 城北區의 被害와 再建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城北區廳의 復歸開廳은 1951년 3월 27일이었으며 당시 선발대로서 區廳職員 6명이 입경하여 殘留市民의 救護事業에 착수 노력중 4.25후퇴로 재차 일시 南下하였다가 즉시 廳長 인솔하에 직원 선발대가 입경하여 당시의 殘留區民 1만 5천여명의 구호사업을 전개하며 점차 行政事務를 착수하였는데 本 廳舍의 피해는 다행히 전무하였으나 불행히도 직원중에 行方不明이 5명이나 있었다 하며 備品器具등은 全失상태였던 것을 復歸 始務以來 銳意 復舊에 노력한 결과 현재는 종전과 같이 거의 완비되었다 하고 직원도 전부 復職 중에 있다고 한다. 주민은 事變前 15만여명에서 현재 6만여명이 복귀하였으며 區民의 生活程度는 戰亂으로 인하여 흩어진 살림살이를 갖추기에 분망할 뿐 아직 확고한 生活對策이 수립되지 못하여 要救護對象者는 유상·무상 受配者를 합하여 약 3분의 2를 점유하고 있다 한다. 同廳의 애로를 보면 첫째 財政의 不圓滑로 (行政)운영상에 지장이 크며 細窮民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관계로 洞政운영의 困難, 救號對象者數에 비하여 配給量의 부족, 糧穀增塵에 있어 가장 緊要한 營農資金의 부족 등이라 하며 현재 진행중에 있는 사업은 崇德國民學校 校舍新築期成會를 조직하고 8백여만원 예산으로 石造建物을 신축코저 진행중이고 鍾岩川 提防 축조공사를 진행중이라 한다, 區廳長 金仁培는 서울 출생으로 당년 48세이며 京畿中學을 졸업후 官界에 투신이래 25년간 서울市에 근속하는 중 東大門區 稅務課長, 서울市衛生課長·司計課長·人事課長을 역임한 후 現 廳長에 부임하였다 한다. 總務課長 李徹珪씨는 淸州農業學校출신으로 在學당시에 普通文官試驗에 합격한 수재이며 일제시대부터 계속 官界에 종사하였고 서울市 司計課長署理를 거쳐 現職에 부임하였다 한다. 社會課長은 申應範, 稅務課長 朴泰俊, 學務課長 全憶根, 戶籍兵務課長 李震榮, 建設課長 孫泳學 제씨이고, 洞聯合會長은 서울市軍警授護會 副會長인 金一씨이며 현재 각 동에서 再建하는데 노력중인 洞會長은 다음과 같다. 城 北 제1동 洞會長 趙泰友 〃 제2동 〃 金 一 東小門 〃 許 鈺 旭丘西 〃 閔 東 〃東 〃 金大元 東仙南 〃 金万? 〃北 〃 權寧基 〃東 〃 柳寅輔 安岩西 〃 高容泰 〃東 〃 申榮喆 貞 和 〃 李載根 鍾 岩 〃 朴泰俊 貞 陵 제1동 〃 李順成 〃 제2동 〃 崔鍾환 彌阿理 제1동 〃 鄭星漢 〃 제2동 〃 金麟基 月 谷 〃 李鍾昌 長 位 〃 崔鍾욱 樊 〃 金漢植 牛 耳 〃 李允植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72-174쪽
    1950.06.27~06.28 미아리 전투에 대한 설명
  • 창동방어선을 돌파당한 국군은 소대·중대 단위로 분산되어 미아리방어선으로 후퇴하였다. 이보다 앞서 채병덕 총참모장은 27일 아침 7시경에 제5사단장 이응준 소장을 미아리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하고 의정부지구전투사령관 유재흥 준장과 함께 미아리방어선에서 서울방어를 위한 최후의 결전을 하도록 하였는데, 창동방어선이 무너진 뒤 약 2시간이 지났을 때부터 철수병력이 미아리 일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때 유재흥 준장도 미아리방어선 현지에 도착하였다. 창동방어선에서 철수한 병력을 재편성하고 후방에서 증원된 국군 제5사단 제15연대 2대대, 제20연대 1대대 및 수도경비사령부의 제8연대 2대대 등이 합류하여 도합 3,000여명의 병력이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막기 위한 미아리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지휘계통의 혼란을 막기 위해 좌측부대는 이응준 소장이 우측부대는 유재흥 준장이 지휘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창동방어선을 돌파한 북한군은 149고지(지금의 신일고등학교 뒷산)에서 일단 진격을 멈추고 전황을 살피고 있었으므로, 상황은 잠시 동안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국군은 방어진지를 편성하면서 길음교와 중랑교에 폭약을 설치했다. 다리를 폭파하여 북한군 전차의 진격을 막기 위함이었다. 방어진지 편성과 교량 폭파 준비를 끝마쳤을 즈음 서울시 애국부인회와 여학생 위문단이 미아리전선을 방문하여 국군 장병들을 위로 격려하였다. 이들은 돈암동 전차종점 광장에서 대형 가마솥 100여개를 걸어 놓고 주먹밥을 만들어 장병들의 허기를 달래주었다고 한다. 전투를 치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장비와 식량의 보급이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장병들의 사기라고 할 수 있다. 애국부인회와 여학생 위문단의 위로 및 격는 거듭되는 패배로 떨어져 있는 국군의 사기를 북돋는 역할을 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때 한차례의 해프닝이 있었다. 27일 낮 채병덕 총참모장은 미아리방어선으로 달려가 미아리지구전투사령관에게 “28일부터 B-29 중폭격기 100대가 국군을 지원하러 온다”라고 말했다. 이 소식은 당연히 일선 장병들에게 전해졌다. 총을 쏴도 포를 쏴도 끄떡없이 왁왁 밀고들어오는 북한군의 T34/85 전차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장병들에게, 조금만 더 버티면 월등한 장비를 갖춘 미군이 지원하러 온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가뭄 끝에 단비와도 같았을 것이다. 장병들의 사기는 악화일로의 전황과는 달리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기다리던 미군의 지원은 서울이 함락된지 3일 후인 7월 1일이 되서야 뒤늦게 이루어졌다. 후일 채병덕 총참모장의 발언은 장병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즉흥적 발언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도 나오게 되지만, 실제로 당시 육군본부는 곧 미군이 참전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27일 오후 4시 쯤 주한 미 군사고문단장 대리 라이트 대령이 미 극동군 총사령관으로 부터 “서울로 복귀하라, 미 공군과 해군의 제한적인 공격이 한국에서 전개될 것이다. 힘을 내라!”라는 내용의 전문을 받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보다 3시간 전 시흥까지 후퇴했던 육군본부는 다시 서울로 복귀했다. 또한 이 시각 방송에서는 맥아더 사령부가 전방 지휘소를 서울에 설치했다는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물론 이 뉴스는 맥아더가 15명의 현지 시찰단을 파견한 것이 잘못 알려진데 따른 오보였다. 하지만 이 같은 소식들은 국군에게 조금만 버텨내면 미군의 지원으로 서울을 지켜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그리고 그 희망이 장병들의 사기를 올려 다가올 전투에서의 승산없는 싸움에 목숨을 내걸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사기만으로 극복하기엔 국군과 북한군과의 사이에 놓은 전력차라는 이름의 강이 너무나도 넓고 깊었다. 북한군의 공격은 27일 오후 5시경부터 시작되었다.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의 선두부대가 20여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기마부대를 후속시켜 미아리방어선 600~700m까지 진격해 왔다. 김한주 소령이 지휘하고 있던 제20연대 제1대대는 이들의 진로에 집중사격을 실시하여 1대의 전차를 격파하는 등의 전과를 거두고 북한군을 일시 후퇴시켰다. 하지만 27일 자정 북한군의 2차 공격이 시작되었고, 국군의 방어진지가 차례로 돌파되기 시작했다. 국군이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한 길음교 폭파도 폭파시기의 판단착오로 인해 교량폭파에 실패함으로써 북한군의 전차가 길음교를 통과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제15연대 2대대가 중심이 되어 북한군 전차를 막기 위해 모든 화력을 퍼붓는 육탄공격을 20여 분간 감행하였으나 김정순 대위 등 장병들의 희생만을 남기고 실패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즈음 장병들이 휴대한 탄약마저 떨어져 가고 있었다. 28일 새벽 1시, 5~6대의 북한군 전차가 미아리방어선을 최초 돌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아리방어선이 붕괴되었다. 국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대부분의 부대가 분산되어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일부 부대는 방어진지에서 끝까지 저항하거나 서울시내에서 국지적인 시가전을 펼쳐 북한군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만으론 서울로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의 기세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57-60쪽
    1950.06.26~06.27 미아리 전투에 대한 설명
  • 미아리 전투는 1950년 6월 26일부터 27일에 미아리고개에서 벌어진 한국전쟁의 전투이다. 한국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기습적인 전면 남침으로 38도 분계선에 인근한 전선이 무너졌고, 이어서 38도 분계선으로부터 45km에 불과한 수도 서울에 대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국군은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창동-미아리 등지에 저지선을 펴고 여기에서 남침을 극력 저지하려 하였으나, 북한군의 전차 앞에는 속수무책이 되어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넘기고 한강 선에서 다시 대진케 되었다. 미아리 전투는 이응준(李應俊) 소장이 이끄는 국군 제5사단과 유재흥(劉載興) 준장이 이끄는 제7사단이 미아리고개에서 치른 최후의 서울 방어 전투였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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