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아름다운 사람들
2012.06
인물 단체 주민자치
성북동의 역사문화에 대한 안내와 해설을 제공하는 마을기업이다. 성북동과 한양도성 탐방코스를 주로 맡아 한다. 성북초등학교 녹색어머니회 등 모임이 역사탐방 부모 커뮤니티로 발전하였고 해설 수요가 증가하자 서울시 마을기업 만들기 공모를 통해 협동조합으로 정식 출범하였다. 2013년 11월 성북동의 주택 한 층을 빌려 정식 사무실을 개소한 이래 해마다 전문 해설사를 양성, 배출하고 있다.
성북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성아들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단체 주민자치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2012.06

주소

  • 주소: 02836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56-3 (성북로 16길 16-30, 1층)

근거자료 원문

  • 성·아·들은 ‘성북동의 아줌마들, 성북동의 아이들, 성북동의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엄마들 모임이다. 평범한 아줌마들이 아이들의 성북동 역사교육을 직접 하자는 취지로 뭉쳤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스스로 먼저 공부를 하고 있으며, 여러 형태로 진화·발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활동이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동참하는 운영방식을 유지하고, 아이들과 주민에게 필요한 일을 고민하며, 협동조합까지 공부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90쪽
  • 함께 하는 운영위원은 공동대표 2명, 총무, 감사, 간사 각 1명, 운영위원 3명 이렇게 여덟 명입니다. 아는 사람끼리 연결이 되어서 구성이 된 것이기 때문에 자녀들이 유치원에서부터 초·중·고등학교 그리고 재수생까지 다양하게 있습니다. 운영위원 8명이 포도송이처럼 엮여있는데, 아예 다 아는 사람은 아니고, 한 다리 건너서 아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면은 있고 오며가며 보기는 했는데 관심 있는 분들끼리 모이게 되면서 이렇게 직접 만나고 연결되었지요. 모임의 주축을 이룬 임원 이외에 같이 역사교육을 받는 회원들이 있습니다. 1기 모집에 30명 모으기로 했는데, 거의 30명 다 모였죠. 초반에 저희 학부모들 그리고 아는 사람까지 해서 절반 정도 모였고 네이버 카페를 보고 전화문의하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성북동에 계신 분들도 많지만 아닌 분들도 있어요, 역사라는 말에 연세가 높은 분들의 문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연령층을 나눠서 교육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 시작은 모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성북동 주민센터를 주로 활용하고 모임은 성북동 주민이 운영하는 카페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91쪽
  • 엄마들과 지역의 어르신들이 함께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업 예산의 80%는 강사비예요. 처음에는 강사비가 절반, 아이들과 탐방하는 데 절반으로 했는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하려면 지식을 먼저 가져보자는 생각으로 강의 수를 늘렸어요. 강의 구성은 마을만들기 센터에서 담당하는 마을관련 10강, 역사 유적지 공부로 구성된 10강이 있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야 하니까 긴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까지 공부를 합니다. 11월 말까지 강의가 끝나고 나면 12월 한 달 동안 아이들이랑 같이 탐방을 갑니다. 올해 말에 이번 사업이 끝나는데, 내년 봄에는 더 업그레이드를 해서 새로운 사업을 다시 시작할 예정입니다. 교육을 받는 데 학부모 외에도 관심이 많으세요. 오늘은 노인정 회장님께서 전화하셔서 같이 수업을 들을 수 있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지역에서 오래 사신 분들의 얘기를 듣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여기 지역 분들 반응이 굉장히 좋아요. 그렇게 첫 회의 때 반 이상이 등록해주셔서 아주 좋았습니다. 교육은 마을만들기와 역사스토리 강좌로 진행합니다. 교육은 화요일, 목요일에 2시간씩, 20번 강의로 총 40시간입니다. 수강료는 2만 원인데 무료로 하면 책임감을 못 느껴 쉽게 빠질 수 있어요. 책임감의 의미가 큽니다. 20강의 강좌는, 처음에는 10강의 예산을 받았는데 20강으로 늘어나니까 비용이 초과되어서 마을만들기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았어요. 원래는 역사 강좌만 하려고 했는데 마을만들기와 관련된 일이기도 해서 마을소개, 마을만들기에 대한 내용도 넣었습니다. 강사는 ‘마을만들기지원센터’ 쪽에서 마을만들기 강좌를 담당하고, 성북동 역사는 ‘우리미래’라고 하는 사회적 기업의 선생님께서 오셔서 10강을 진행해주세요. 스토리텔링 하시는 분, 워크숍 하시는 분, 응급처치하시는 분은 각각 따로따로 섭외를 했습니다. 주변에서 저희 커리큘럼이 체계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열 번 정도 모여서 회의를 계속하다 보니까 아이디어가 나오더라고요. 강사 선생님 섭외도 발품을 팔아서 여기저기 문화센터를 뒤져가면서 했습니다. 회의한 내용을 잘 정리 해주시는 분이 계셔서 그 분이 사업계획서를 써주셨어요. 그러면서 느낀 게 애들 키우시던 주부들의 숨어있던 끼가 나오게 되고, 엄마들의 자아발전에도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예요. 사실 저 같은 경우에도 메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지금 성북동 스토리(역사문화책) 교재를 만드는 중인데 저희가 듣게 될 강의책자를 토대로 아이들을 위한 교재도 만들 생각입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92-94쪽
  • 혼자 남아있는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습니다. 성북동에도 맞벌이가 많아요, 저소득층 애들도 많은 편이지요. 돈 많은 집의 아이들은 성북초등학교에 잘 안 와요. 그래서 재적수에 비해 저소득층이 많은 편이지요. 사실 이걸 시작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요새 학교는 매주 토요일에 놀잖아요. 그런데 힘드신 부모님들은 토요일이라고 쉴 수 없는 형편이다 보니 아이들은 집에 혼자 남아있어요. 그래서 선생님을 섭외해서 토요일에 역사탐방을 갔는데, 그건 비용이 많이 들어요.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는데 어쨌든 사교육의 일부이지요.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게 동네에 공부할 것도 많은데 굳이 밖으로 나가야 할까 그런 거지요.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다 보니 엄마 공부가 되는 거예요. 이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으신 분들은 지금 초등학교 4학년 학부모님들이예요. 사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기도 했어요. 애들이 엉뚱한 질문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고민이 되기도 했지요. 예산을 받고 돈이 나오니까 어! 진짜 하는 건가? 했지요. 그런데 또 든 생각이 뭐냐면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는 것도 좋지만 우리 엄마들 계발을 위해서라도 배워보자. 그렇게 공부한 후에는 아이들에게 얘기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엄마가 유식해져보자! 라는 생각을 한 거죠. 우리 아이들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해줄 수 있다면, 다른 아이들과도 같이 얘기할 수 있을 테고 그게 바로 해설가가 아닐까,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 같아요. 원래 강의도 10강만 하려고 했는데 배울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배우자고 20강으로 늘렸습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92쪽
  • 성북동아름다운사람들(성아들)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성아들은 성북동 관광지를 갖다가, 주민들, 관광 오는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해설사들이에요.
  • 성북로 옆에 둥지를 튼 ‘성북동의 아름다운 사람들’-일명 성아들-은 성북동을 방문하는 관광객들과 학생들에게 이 동네의 역사문화에 대한 안내와 해설을 제공하는 마을기업이다. 성북동과 한양도성 탐방코스를 주로 맡아 한다. 성북초등학교 녹색어머니회 등 모임이 역사탐방 부모 커뮤니티로 발전하였고 해설 수요가 증가하자 서울시 마을기업 만들기 공모를 통해 협동조합으로 정식 출범을 본 경우다. 2013년 11월 성북동의 주택 한 층을 빌려 정식 사무실을 개소한 이래 해마다 전문 해설사를 양성, 배출하고 있다. 성북동의 오래된 장소들이 볼거리로만 머물지 않고 생생한 배움의 장으로 남게 된 데에는 성아들에 속한 해설사들의 남모르는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19
  • [ 54 ] 김순희(협동조합 성아들 이사장) 1. 인터뷰 개요 피면담자 - 성 명 : 김순희 - 주소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직 업 : 협동조합 성북동아름다운사람들 이사장 면담자 : 한동현(한국외대 글로벌콘텐츠연구소 연구원) 면담 일시 : 2016. 6. 22. 면담 장소 : 성북동아름다운사람들 사무실 2. 인터뷰 내용 한동현(이하 한) : 오늘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사장님 뵈니까 얼굴이 굉장히 환하시고 강원도 출신이라서 그런지 활력이 넘치시는 것 같아요. 일하시는 것은 어떠세요? 김순희(이하 김) : 시골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늘 바빠요. 염소도 키우고 강아지도 키우고 양봉도 해보고 싶어서 하려고 하고 있고, 민박도 아래층에 하고 있고, 위층엔 식당도 하고 있고, 서울에 있을 때는 항상 바빴는데 (강원도 평창으로) 가니까 더 바쁜 것 같아요. 한 : 그러면 서울에 계시는 동안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김 : 서울에 있을 때는 제가 성북구 내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어린이 안전교육을 했고 서울시에서 하는 어머니 자전거협회가 있어요. 거기에 있으면서 자전거 안전교육도 하러 다녔어요. 성북구 관내에 있는 초등학교의 녹색연합회장이었어요. 그래서 그 활동을 오랫동안 했어요. 10년 동안 봉사하다가 학교에서 추천을 해가지고 추천받은 분들만 모여서 자전거협회를 만들었어요. 자전거 사고가 너무 많이 나니까 안전교육을 아이들도 시키고 어린이집, 노인정 다니며 교육을 시킴으로 인해서 이제 사고를 줄어들게 하려고…. 한 : 자녀분은 다 여기 성북구에서 출생했습니까? 김 : 그렇죠. 다 성북초등학교에 다녔어요. 한 : 몇 두셨나요? 김 : 3명이요. 딸 둘, 아들 하나 한 : 지금은 다 컸구요? 김 : 네. 막내아들은 대학교 1학년이구요. 딸들은 스물아홉, 서른? 한 : 다 키우셨네요. 이제 마음껏 바깥 활동 하셔도 되겠어요. 김 : 그렇지 않아도 계속 했습니다. 하하하. 남 : 이런 자전거 안전교육 활동과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시면서 성아들(성북동의 아름다운 사람들) 활동도 같이 하시게 되었나요? 김 : 성북 성아들 단체가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는 제가 자전거협회 다닐 때 봉사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노인정에서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그렇게 하다보니까 성북초등학교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유동인구가 별로 없어요. 그러다보니까 저 같이 봉사를 자주하는 엄마들은 전교에 있는 아이들을 전부 다 알 정도였어요. 그것이 계속 봉사를 하면서 이어지다 보니까 성아들 활동사업을 시작할 무렵엔 제가 강원도 가있었어요. 전화로만 계속하고 조합원으로만 들어가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이사장 하시던 분이 못하시는 바람에 저보고 하라 해서 저는 간단하게 조금씩, 조금씩 봉사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일이 많더라고요. 제가 협동조합에 대하여 몰랐던 거고, 그래서 그런지일이 많더라고요. 많이 힘들었어요. 하하. 하지만 요즘에는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혔고 이사진들이 바뀌면서 각자의 맡은 역할만 하면 되니까 그래도 지금은 안정적으로 되었어요. 지금은 자주 안 올라와도 될 것 같고 지금은 거의 전화로 업무를 보고 있어요, 전화나 톡으로 다 되니까. 한 : 아. 그러면 이전에 성북구에 거주하시면서 자녀를 키우시고 자녀분들 학교에서 활동을 하시면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셨는데 그러면서 아시는 분들이 모이셔서 활동을 하다 보니까 성아들 같은 팀웍 좋은 협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거군요? 김 : 네. 그랬어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68-269쪽
  • 한 : 이사장직을 맡게 된 것은 언제부터에요? 김 : 지금 2년? 딱 2년 되었어요. 한 : 이사장직 맡고서 지금 까지 우리가 이렇게 해왔는데 조금 더 이런 방식으로 바꿔서 성아들 활동을 해보고 싶다 던지 이러한 계획 같은 것 가지고 계신가요? 김 : 계획이라면… 협동조합이 저 혼자의 계획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가 예전부터 봉사활동과 여러 가지 활동을 하다 보니까 성북동도 그렇고 정릉도 그렇고 아이들이 참… 못 먹고 못 살고 부모 없이 살고 할머니와만 살고 너무 걱정되는 아이들이 많아요. 예전에는 제가 도움도 주고 물건도 전달하고 했었거든요. 그런 아이들이 편하게 학교만 다닐 수 있게, 먹는 것을 걱정하지 않게끔… 학교에서 거의 다 해주고 있으니까 먹는 것만 걱정하지 않게 끔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방과후에 공부도 시키고 그런 것들을 해주었었어요. 도시락을 가져다준다거나 이런 것들을 했었거든요. 음식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 들을 확대하게 되면은 남는 부분은 할아버지 한 분을 또 후원해 드렸었거든요. 뒤에서 이렇게 도와드리는 것… 성아들로 인해서 먹거리나 그런 것들을 나누어 드리는 그런 사업을 같이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 사업은 진짜 해보고 싶어요. 하다보면 할아버지 분들이 특히 덜 드세요. 같이 좀 도와주고 했으면 좋겠어요. 제 생각이에요. 한 : 성아들이 어머님들이 주된 모임이다보니까. 어머니들의 마음을 좀 더 드러낼 수 있는 걸로 확장했으면 좋겠고, 독거노인이나 어린 학생들의 음식 이런 부분의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죠? 김 : 그쵸. 제가 부자면은 그냥 해드리겠는데 부자가 아니니까…. 제 생각에는 그런 일들을 같이 겸해서 할 때에는 얼마든지 이루어지거든요. 한 : 말씀하신 것처럼 협동조합이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뜻을 모아서 같이 움직여야 하니까요. 김 : 근데 요즘 우리 성아들 식구들 나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데, 요즘에 엄마들이더라도 제가 음식 같이하자고 하면은 싫어하고 설거지도 하지 않을라고 하고… 그런 일 자체를 자기 집에서도 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일벌이지 말라’, ‘이사장님 일벌이지 마세요’ 이러는 거야 자꾸 그러니까 이게 축소가 되고…. 저번 7월달엔 식사 하나 30분이 온다고 했는데 저 혼자 하래요. 저는 강원도에서 오고 이틀을 소비해야 하는 것인데 제가 혼자 이것이 되겠습니까? 그런 애로사항… 조합원은 40명 정도 있지만 지금 활동하시고 계시는 분들은 해설하시는 분들은 10명 안팎이거든요. 그런데 이분들 가지고 해야 하는데 이분들은 해설만 하려고 하고 다른 일은 버거워 하시고 본인들이 해설을 이곳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하니까 시간 조절이 안되는 것이에요. 아까도 말씀 드렸었지만 협동조합이 저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시작했을 때 그 마음이면은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런 것이 되는데 지금은 처음에 시작했을 때 그 마음이 아니고 해설사 분들만 계시니까 좀 어려운… 상황이죠 한 : 오늘 말씀해주신 것에서 이사장님의 고민이나 성아들이 한 단계 성장하는 것에 있어서 그런 어려움과 고민이 잘 묻어나는 것 같아요. 초기에 팀웍이 잘 짜져서 성북구 지역투어에 대하여 집중을 했고 거기서 좋은 성과를 얻었는데 2단계에서는 조금 더 다른 활동을 곁들어 가면서 확대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시는 것 같네요. 그러면 지금 성아들에서 이렇게 활동하시고 지역에 이런 문제가 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성아들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 성북구나 아니면 성북구청 기관에서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바라는 것이나 필요한 것이 있을까요? 김 : 도시락 같은 것을 요청하는 두 기관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할 때 저 혼자서는 벽에 부딪힐 때가 많아요. 유관 기관들과 연결해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은 해보고 있어요. 한 : 그런 푸드 사업에 대해서 주변 기관들이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간접적으로라도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씀이시죠? 김 : 그렇죠.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69-270쪽
  • 한 : 그러면 지금 성아들에서 이사장을 맡고 계신데 성아들에 대해서 간략하게만 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자랑거리도 좋고, 아니면 어떤 활동을 주로 하고 있는지 이런 것도 좋습니다. 김 : 저희가 처음에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길로밖에 못 가는데 초기에 모였을 때는 저희가 다양한 걸로 하자 그랬는데 지금은 성북동에 있는 문화유적지만 투어를 다니고 있어요. 한 : 아, 성북동 투어에 집중하고 계시다? 김 : 네 지금은 그것밖에 못하고 있어요. 처음에 모여서 이야기 할 때는 여러 가지를 한번 해보자 해서 만들어 진 것인데 지금은 한가지 밖에 못하고 있어서 좀 약간 아쉬워요. 한 : 그런데 하나의 단체가 좋은 팀웍으로 한 가지 활동에 집중하는 것도 저는 좋은 모습이라고 생각을 하구요. 그러면 어떻게 성북구 투어에 집중하고 계신지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투어가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중요한가요? 김 : 그것은 대답이 정확할 줄은 몰라도, 아이들을 가르쳐 준다고 다른 지역으로 해설사를 보냈어요. 지금 우리 해설하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성북동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보냈는데 그게 붐이 일어났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 지역부터 알아야겠다 그래서 엄마들이 해설과정을 공부해서 우리들이 하자해서 해설자 양성과정을 하게 되었고, 그 분들이 처음에 많이 하셨는데 지금은 그분들 대신 또다른 전문가 분들만 활동하고 계세요. 조합원들은 다 남아 있는데 처음에 뭉쳤던 분들이 각자의 자리로 좀 찾아가시고 그랬죠. 한 : 취지가 굉장히 좋은 것이 우리 자녀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서 공부를 시키듯이 우리 지역도 공부하고 더 잘 알기 위해서 어머님들이 다 나서서 공부하시고 우리 지역을 소개해주는 그런 모임을 가지게 된 것이군요? 김 : 네. 우리가 이곳에 살면서도 제가 27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도 제가 심우장에 놀러갔었어요. 친구가 그쪽에서 살아가지구… 그렇게 중요한 곳인 줄도 모르고 계속 갔던거죠. 해설을 듣지 않으니까 그냥 가서 하루 종일 놀다가 오고 관심이 없어가지고 지나치고 말았던 거죠. 아무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했던 곳이 그렇게 의미 있는 곳인 줄 몰랐어요. 성북동 자체가 박물관이잖아요. 이제야 박물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에요. 예전엔 몰랐어요. 귀중한 것도 모르고 그냥 왔다 갔다 돌아만 다녔던 것이에요. 이제는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 아이들한테 알려주고 싶고 외부에 나가는 것 보다 우리 동네가 더 많고 좋은데? 이렇게 되었어요. 한 : 항상 거주하신 곳을 둘러보실 때는 그냥 보통의 일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해설을 듣고 나니까 완전히 새롭게 다르게 보이더라…. 김 : 그쵸!, 완전히 박물관, 박물관이죠. 성북동 자체가. 한 : 그러면 해설을 듣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인가요? 아니면 해설을 들어보자 해서 된 것인가요? 김 : 사실 처음에는 해설을 들을 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이사장을 해야 한다고 해서 저는 그냥 예전에 봉사하듯이 봉사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조금 다르다고 하니까 제가 관심을 가지고 해설사 선생님들 몇 번 따라다니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에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69쪽
  • 한 : 성아들 협동조합에 대해서 좀 더 여쭈어볼게요. 조합원 분들은 총 몇 분 정도 계신가요? 김 : 조합원만 41명이요. 한 : 전부 어머님들이신가요? 김 : 아니에요. 활동하고 계시는 남자 분들은 현재 4분 정도는 꾸준히 하고 계세요. 한 : 방금 3기라고 하셨는데… 김 : 양성과정이 있으니까. 3번 있어요. 남자 분들도 배우고 싶어서 오시구요. 열심히 하시고 계세요. 한 : 혹시 이사장님께서 성아들이 생길 때 첫 창립 멤버인가요? 김 : 창립 멤버는 맞아요. 그런데 그때는 활동을 안 하고 시작할 때 시골에 있으면서 저하고 전화는 많이 했죠. 한 : 그러면 혹시 처음에 몇 분이 창립 멤버로 시작한 것이에요? 김 : 한, 10명? 우리가 처음부터 막 모일라고 한 것이 아니고 그냥 우리는 늘 모여 있었어요.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봉사활동이나 이런 것들을 하면서 늘 모여 있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그냥 그대로 하면서 한명, 한명 중간에 들어온 것이죠. 한 : 아, 그렇군요. 초기는 10명 정도로 해서 시작을 한 것이군요. 굉장히 참 좋은 조직인 것 같아요.거의 대부분은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막 끌어 모으는데 그렇게 안 하시고 어머니들이 봉사활동 평소에 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친분관계를 쌓으시고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우리 해볼까? 누구 엄마도 해 이런 식으로 퍼진 것이군요? 김 : 맞아요. 성북동 자체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27년 살았다고 했잖아요? 저는 여기서 명함도 못 내밀어요. 성북초등학교에 우리 남편도 여기 다녔어, 우리 애들 할아버지도 여기 다녔어, 그리고 우리 아들도 여기 다녀 3대가 다니고… 거의 그래요 다. 그러다 보니 다 아는 사람들이에요 다. 선후배 관계 부모 친척 이렇게 다 연결이 되요.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이고 제가 녹색연합회장 할 때는 제가 무슨 다른 학교에서 활동할 때는 성북초등학교 엄마들이 다 와서 도와주고 외부에서 오면 학교 엄마들이 전부다 와서 해주고 녹색방이라고 사무실이 하나 있는데 매일 엄마들이 있어요. 아침 활동을 하면 늘 하나 가득 모여 있었어요. 제가 할 때는 저녁까지. 아이들 누가 등교 늦게 하면은 다 챙겨주고 또 학교에 늦게 남아있으면 이 아이는 왜 늦게 까지 학교에 남아있을까 조사도 하고. 그러다 보면 쟤는 누구, 얘는 누구 그러다 보면 선생님들이 저희한테 부탁해요. 저 아이가 학교도 잘 안나오고 그런데 한 번 알아봐 줄 수 있냐고… 그러다 집에 가보면… 그런 아이들이 여럿이 있었어요. 할머니 하고 사는 아이들도 있고 엄마랑 둘이 사는데 엄마가 거의 페인같이 살고 방이 이 바닥이 무슨 색깔인지 알 수 없을 정도 망쳐(?) 놓고… 그리고 밥통도 열어보니까 곰팡이도 싹 피어 있고 그런 아이들이 많은 것이에요. 그런 것들 때문에 관심가지고 하다 보니까 아이들이 너무 불쌍한 거에요. 솔직히 이 사회가 거창하게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회가 착한 사람들만 있으면 행복하지만 한두 명 때문에 티비 나오고 하잖아요. 더불어 잘 살아야지, 더불어 행복해야지. 저도 아이들 키우지만 아이들 자체가 순간적으로 일탈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가정이 정말 부부간에 반듯하게 서 있으면 아이들도 잠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마음 붙일 때가 없으면 아이들이 일탈했다가 돌아오는 기간이 늘어나잖아요. 전 그냥 스스로 느껴지더라고요. 안타깝고, 그런 것들 때문에 아이들한테 좀 관심을 좀 가졌으면 좋겠는데…사는 것이 다 바쁘니까 그런 것들을 신경을 못 쓰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에요. 그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런 좋은 조직을 가져다가 썼으면 좋겠지만… 성북초등학교 엄마들 가지고 운영을 했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처음에 활동할 때 봉사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1년이지… 너무 하면은 내 주머니 꺼내놓다 보니까 엄마들이 지치는 거야. 그러다보니 이제 자신의 일을 하러 가시고 그러다 보니까 성아들이 이런 것이 있다 소리 듣고 양성과정을 와서 수업 듣고 공부하고 해설하게 되니까. 그 분들이 잘하니까. 계속 하게 되는 것이죠. 한 : 그러면 그 전문가 분들은 여기 성북구에 사는 주민들은 아닌 것이에요? 김 : 성북구에 살아요. 미아리에 사시는 분도 있고 성북구에 사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데 원래는 성북동 안에 있는 엄마들과만 하려고 한 것인데… 빗나간 것은 있어요… 약간. 한 : 성북동 안에 있는 성북초등학교 녹색반 어머니들이 주된 멤버죠? 김 : 그렇죠. 하다보니까 녹색반 엄마도 단체장들이랑 다 친해서 너무 친해서 같이 했는데 그렇게 모여서 같이 한 거에요. 한 : 아하, 그러면 지금 현재는 양성과정이 3기까지 끝이 났고 4기까지 예정이 되어 있고요? 김 : 그쵸. 해야 하는데… 하긴 해야 하는데. 한 : 어떤 고민이 있으신거에요? 김 : 그럼요. 양성과정 하게 되면 비용이 400만원 이상 들게 되는데, 그걸 비용을 대야 하는데, 저는 하고 싶은데 다른 분들이 그거 돈 쓰면 안된다, 그러시니까. 하지만 좀 다양하게 움직일라면 솔직히 양성과정을 해야 하는 것이 맞아요. 일하고 있는 분들은 당신들이 일이 주어질 까봐 이사장님 그 일을 왜 하냐고… 지금도 우리 일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왜 하냐고 그러지. 조합원들은 처음에는 아이고… 다 들통나네, 하하하하, 해야 하는 것이 많은데 여러 가지로 부딪쳐요. 한 : 어떤 조직이든 활동이 오래될수록 생각하는 바가 서로 다르니까 그런 차이가 드러나는 것 같아요. 김 : 정말로 내가 공부해서 이 마을을 내가 알아가고 다른 분들한테 알려주고, 약간의 봉사를 한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들과 같이 일했으면 좋겠어요. 같이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 : 이사장님께서는 마을을 위하는 일이 꼭 투어를 위한 문화해설 뿐만 아니라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는 부분도 필요하고 더 활동을 넓혀가자는 것이지요? 김 : 맞아요. 해설을 딱 하고 남으면 두 시간 정도 남거든요. 해설하면서 오지랖이라고 욕하긴 하는데 좀 어려운 애들도 도와주고 좀 그러는 것도 성북동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다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다 서로 아니깐 쟤 누구다 쟤 많이 컸네 등등 이런 저런 애로사항들을 아니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70-272쪽
  • 가족이 된 이웃, ‘같이’의 가치 성. 아. 들 : 성북동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 성아들. 성북동 아름다운 사람들. 참으로 포괄적인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성북동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그 중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이 있을까. 성북동에서 오래 살았지만, 길을 지나며 생면부지의 주민들을 수없이 마주친다. 이 많은 사람들, 성북동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인 단체, 마을기업, 협동조합이 우리 ‘성아들’이다. 아직은 성북동의 아름다운 사람들 모두가 모였다고는 할 수 없다. 이 포괄적인 이름은 성북동의 아름다운 사람들 모두를 품고 싶은 마음을 담은 것이다. 성아들은 당돌하게도 성북동을 대표하는 마을공동체가 되려는 욕심을 지니고 있다. 성북동은 정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살아가는 마을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마을이라 생각하고 들여다보는 성북동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성북동이 지닌 많은 역사문화유적들은 모두의 재산이다. 그것을 지키고 가꾸는 일은 모두의 관심과 노력 속에서만 가능하다. 얼마 전, 성북동이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되어 성북동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 단순한 관심을 넘어 애정과 노력이 더욱 필요해진 것이다. 성북동 밖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게 커진 만큼, 이제 성북동 안의 사람들은 그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하고 우리의 생활과 연결하여 생각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한 여러 움직임들이 더 활성화되길 바라며 그 한 축을 담당하는 성아들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성북동 아름다운 사람들 협동조합은 예쁜 로고도 만들고 사무실도 내고, 이제는 제법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는 단체가 되었다. 그 관심은 도움의 손길로 이어져 2012년 개소식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동안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왔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일도 그 도움 속에서 가능했으며, 이로 인해 지금의 성아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2년여간 성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 글에서 보여드리고 싶다. 지금도 마을공동체를 위해 애쓰시는 많은 분들이 계시고, 앞으로 만들어 보려고 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 분들에게 용기를 드리고 싶다. 우리도 해냈으니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라고 말이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30-131쪽
  • 성북동 아이들, 성북동 아줌마들 한 걸음, 한 걸음, 더디지만 힘찬 걸음을 내딛고 있는 우리의 처음 시작은 사실 이렇게 큰 그림이 아니었다. 지금 성아들의 그림을 칠판에 그릴 수 있다면, 처음에는 메모지에 겨우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성아들 구성원 대부분은 학부모이다. 그 중에서도 아줌마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관심은 아이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아줌마들이 모여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집안 이야기도 하고, 남편 흉(?)도 보면서 자연스레 모임이 이어졌다. 성아들의 시작은 그렇게 어디에나 존재하는 학부모회처럼 흔하면서도 활발한 아줌마들의 모임이었다. 성북초등학교 학부모회를 중심으로 녹색어머니회, 도서명예교사회 등 활동적인 아줌마들이 모였지만, 치맛바람을 휘날리는 그런 류의 극성 아줌마들은 아니었다. 내 아이만을 생각하는 게 아닌, 우리 아이들 모두가 행복하고 안전한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는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려고 모여서 이야기하는 그런 모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지 흥미로운 화두가 던져졌다. “요새 동네에 뭐가 많이 생기는 것 같지 않아?” 그랬더니 너도나도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 큰 길 가에 ○○가 생겼더라. 맞아, 옆에 슈퍼 아저씨가 걱정이 많더라”하는 등등. 사실 성북동은 조용한 동네다. 번화가에서는 새로이 상점이 들어서고 음식점이 생기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지만, 성북동에서는 그런 것들도 얘깃거리가 될 만큼 조용하고 변화가 적은 동네다. 여러 역사문화유산들이 곳곳에 놓여 있어 그것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은 많았지만,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북동 전체에 퍼져 있기에 공원이나 유원지처럼 소란스럽게 관광객들이 몰려든 것은 아니었다. 관광객이 아닌 방문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성북동에도 잔잔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우리들도 그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동네가 변하고 있는지 보려고 평소와는 달리 유심히 둘러보았던 적인 있다. 매일 다니던 길도 두리번거리며 걸어보고, 마을버스를 타게 되면 괜스레 창밖 너머를 오랫동안 바라보기도 하였다. 처음 보는 건물과 상점들. 왠지 성북동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성북동이 발전하고 있구나. 재개발, 재개발 말이 많던데 조금씩 시작되고 있는 건가”하는 우려도 생겼다. 그 며칠 뒤, 아줌마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성북동이 발전되면 뭐가 좋은 거야?” 이 질문에 바로 나오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편해진다는 것. 하지만 그 답을 들은 우리들은 어쩐지, 편하지만 우리 동네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즈넉하다 느끼고 살았던, 우리가 살던 성북동의 모습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성북동에 놀러 오는 사람들은 늘 말한다. 서울에도 이렇게 좋은 곳이 있냐고. 그 느낌을 우리 아이들도 성북동에서 자라며 느끼길 바랐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적을지라도 한 번 불기 시작한 변화의 바람이 점점 세질 거라고 다들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성북동의 모든 사람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할 수 도 없는 노릇이고, 우리의 바람이 성북동 모든 사람들과 일치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다 보니 성북동이 곧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우리 동네가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우리가 변화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럼 우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해?” 그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북동의 변화에 대한 의구심은 그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확장되었다. 무분별한 변화와 발전으로 인해 망가져가는 여러 지역들의 사례는 의구심을 더 크게 만들었다. 동네의 변화와 발전을 그 안에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변화와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하게 된 시기였다. 메모지를 꺼내 펼쳐 들고, 어떤 것이든 작은 그림이라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시기이기도 하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32-135쪽
  •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을 만나다 의문을 기회로 만들자는 당찬 (지금에서야 당차다고 말하지만, 그 당시에는 멋모르고 덤볐다고 하는 것이 맞다) 포부와는 달리, 막상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수다의 주제만 바뀌었을 뿐,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에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을 만나게 되었다. 사업의 요는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지원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마을공동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도 이 때 처음 알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가 무언가 하려고 했던 결심을 구체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공모사업에 신청을 하려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했고, 명확한 목표가 필요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는 단순히 모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회의를 하게 됐다. 아줌마들의 회의는 보통의 회의와는 달랐다. 우리가 모이는 시간은 보통 점심시간 전이나 저녁 늦게였다. 아침에 식구들 챙기고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나서 점심시간 전까지, 식구들 저녁밥 차려주고 난 후의 저녁시간. 우리 동네 챙기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가족들을 챙기는 일이었다. 가족을 내팽개치고 동네를 위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가 바로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동네를 만들기 위해서였으니까.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는 회의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고심했던 시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어느 날, 회의장소에 가던 길이었다. 등산객 차림의 어떤 분이 길을 물어오셨다. “길상사는 어디로 가야 되요?” 이 동네에 살면서 족히 수십 번은 들었던 질문이기에 답하기는 수월했다. 그렇게 길을 알려드리고 회의를 하러 가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성북동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구나”하는 생각. 그날 회의에서 바로 관광객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우리 동네에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 같지 않아?” “그렇지. 수연산방에 차 마시러 오는 사람도 많고. 나 방금도 오면서 길상사 가는 길 알려주고 왔어. 나도 가끔 그래. 그런데 우리니까 어디 있는지 알지, 외지에서 찾아가려면 좀 어렵긴 해. 표지판 같은 것이 잘 안 되어 있긴 하지.” 등등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우리는 성북동에 살아오면서 수많은 관광객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물어물어 성북동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렇게 둘러보고 가기에는 성북동의 진정한 모습들이 너무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성북동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성북동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성북동 투어 쪽으로 가닥이 잡히자 또 하나, 아이들과 연관된 이야기들도 나왔다. “아이들은 이곳저곳 박물관이나 문화체험 같은 활동들을 돈을 내며 다니고 있다. 멀리서 차비 들여가면서도 성북동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왜 우리 동네를 다녀볼 생각을 하지 않았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닌데.” 정작 가까이 있는 우리 아이들조차도 성북동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 간의 소외에 대한 문제도 거론되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형성되는 그룹들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반드시 엄마들이 활동이나 아이들의 활동에서 소외되는 일부가 있게 마련이다. 최소화하려는 노력들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성북동 둘러보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내 아이만 소중하게 여기는 엄마들이 아니라, 내 아이가 소중한 만큼 내 아이 곁의 아이도 소중하게 여기는 엄마들의 모임이었기에 가능한 생각들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가 정해졌으니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다시 시작되었다. 좋은 생각들이 생각만으로 끝나지 않게 하려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의견들은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모두가 진심으로 이루고 싶은 바람이 되었다. 살짝 눈을 감으면 아이들이 성북동 곳곳에서 행복해 하는 모습들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 아름다운 꿈을 위해 먼저 우리는 성북동의 역사문화유적을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체크해 보았다. 우리도 자주 접해서 아는 것이지, 깊게 아는 것은 없었다. 우리가 먼저 알자,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성북동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제대로 알려주자. 펼쳐 놓은 메모지에는 조금씩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36-140쪽
  • 성북동에 놀러와~ 이러한 과정을 지나 우리는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을 신청하기 위한 사업계획서 작성에 몰두했다. ‘사업’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기에, 사업계획서는 당연히 필요했다. 하지만 사업계획서 작성은 쉽지가 않았다. 아무리 도전이 위대한 것이라 해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이때부터 성아들과 문서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말로는 몇 시간씩 떠들었던 것도 정해진 틀에 맞추어 적어 넣으려고 하니, 키보드 자판만 멀뚱멀뚱 쳐다보게 되었다. 답답한 마음이 커지면서 짜증도 늘고 종내에는 모니터에 대고 소리도 많이 질렀던 것 같다. 누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런 사업들을 문서작성 잘 하는 일부 단체들이 다 점유한다. 문서상으로는 의미 있고 활동적이지만, 그런 사업들을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우리 같은 단체들이 이런 문서를 작성하면서 많이 힘들어 했겠구나 싶었다. 담당자를 앞에 놓고 말한다고 생각하고 쓰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서로를 독려해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화했던 것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것을 사업계획서라고 제출할 수는 없었다. 회의를 거듭하며 우리가 할 일의 뼈대를 잡고 살을 붙이며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 나갔다. 그 모습을 하나하나 계획서의 틀 속에 넣다 보니 어느새 번듯한 사업계획서가 되어 있었다. 사업계획서까지 만들어 놓으니 처음의 마음보다 하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정말 하고 싶고, 해야 할 것 같은 일들이었기에 그런 마음까지 담아내고 싶었다. “아이들과 함께 성북동에 살고 있다”는 말이 우리에게 풍기는 향기는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향기를 좇아가며 계획한 우리의 사업명은 ‘성북동에 놀러와~’였다. 이때의 우리 계획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는 문구가 있어서 옮겨 본다. 앞으로 몇 년 뒤 많은 관광객들이 성북동에 놀러오면 성북동 주민이 가이드가 되어, 성북동의 역사 문화를 배우고 만끽하며, 성북동 주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성북동 주민이 운영하는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성북동 주민이 만든 기념품을 사가고, 성북동 주민들이 함께 만든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즐거운 추억을 가지고 돌아갈 것입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되어 성북동은 주민의 자랑이고 일터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성북동에서 성북동 주민들이 살아갈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우리는 ‘함께 꾸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주체가 되고 싶었다. 그 첫 번째는 성북동 주민이 성북동 가이드가 되는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성북동 역사문화해설사 양성과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40-142쪽
  • 성북동을 제대로 알려드립니다 성북동 역사해설사 양성과정을 개설하려면 먼저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 과정도 쉽지가 않았다. 비단 아줌마들이라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배우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랬던 우리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교육프로그램을 만든다니,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지만 처음에는 막막함뿐이었다. 결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곳저곳 수소문해서 많은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기존에 역사해설을 하시는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진행 과정을 참고하기도 하고,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면서 차례차례 만들어 나갔다. 이렇게 총 20강의 교육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20강이나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해설사 양성과정은 말 그대로 해설사를 키워내는 과정이었다. 배우고 익혀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는 사람을 양성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내용들을 교육과정에 담아내다 보니 20강도 많은 것이 아니었다. 집중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성북동의 역사를 재미있게 들을 수 있게 하려고 스토리텔링 강의도 넣다보니 오히려 20강이 모자라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해설사로서 투어를 다닐 때 함께 하는 사람들 중에는 특히 아이들이 많을 것이기에 안전에 대한 교육도 필요했다.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안전사고에 대비할 수 있도록 응급처치 강의를 들었다. 그런 다음, 성북동의 역사를 비롯해 강의실에서 배운 모든 것들을 직접 눈으로, 몸으로 느끼기 위해 성북동 곳곳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양성과정에 참여할 수강생을 모집할 차례였다. 어려움은 곳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민센터나 구청에서 개설하는 여러 강좌들을 신청해서 들을 때는 몰랐는데, 강좌 하나 개설하여 수강생을 모집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전단지도 만들어야 했고, 현수막도 걸어야 했다. 아줌마들에게는 이 역시 익숙하지 않은 일들이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은 아니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며 남편의 아내, 아이의 엄마였던 우리가 스스로 구성원이 되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것은 새로운 기쁨이고 보람이었다. 어려움만큼 도움의 손길도 많았다. 성북초등학교의 협조로 홍보전단을 학교 가정통신문형식으로 전교생에게 배부하여 학부모들의 관심을 높였고, 성북동 주민센터의 협조로 수강생 접수를 받고, 주민센터의 전광판 광고를 통해 공신력도 높일 수 있었다. 현수막도 주요 길목에 게시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홍보 활동이 훨씬 수월했다. 여러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과연 신청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우려는 계속되었다. “진행하고 있는 우리들끼리만 하는 거 아니야?”하며 주고받는 농담 속에도 마음 한 구석 불안감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친구 한 명씩 꼭 데려오자며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기우였다. 짧은 기간의 홍보에도 주민들의 문의가 폭주했다. 56명이 신청하여 중간에 접수를 마감해야 했다. 강의실 사정상 30명 이상을 수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출석률을 고려하여 36명의 수강생을 선발하는 것이 최선이다. 수강자 선정 기준은 주부이고 학부모인 분들, 그리고 의지를 최우선으로 정하였다. 탈락하신 분들 중에는 남자 분들과 어르신들이 많았는데 향후 다른 과정으로 찾아뵙겠다고 한 분, 한 분 전화를 드려 죄송함을 전했다.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한 것에 성북동의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너무나 기뻤다. 성북동에 대해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분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싶었다. 이렇게 36명의 수강생과 함께 제1기 성북동 역사문화해설사 양성과정이 시작되었다. 첫 강의는 ‘마을만들기 이해’였다. 우리는 단순한 해설사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함께 살아가는 해설사가 되려는 것이었기에 마을에 대한 이해, 마을만들기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했던 것이다. 워크숍을 진행하며 마을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졌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렴풋이나마 이해했던 마을만들기에 대해 심도 있게 알고 나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더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마을만들기 이해를 시작으로 ‘우리 동네 알아보기, 역사 강의, 역사탐방, 응급처치, 스토리텔링, 탐방코스 개발’의 강의들을 이어갔다. 강의를 마치고 나서 수강자들에게 돌린 평가 설문의 결과, 전반적으로 과정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서 준비했던 모두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심화과정을 개설할 때 반드시 듣고 역사문화해설사로 활동하겠다는 분이 전체의 1/3이나 되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 성북동의 문화유산이 성북동 주민들을 모아주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과정이 끝난 수료식 날, 수료증을 릴레이로 수여하며 감격의 포옹을 할 때에는, 이미 모두 한 식구가 된 기분이었다. 그 날의 기쁨은 한 장의 메모지에 완성된 그림이 되어 자리 잡고 있었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42-145쪽
  • 성북동 전문 해설사와의 만남 성아들의 활동을 보면 성북동 역사문화해설사를 양성하고 성북동 역사문화해설사를 양성하고 성북동 투어를 다니는 일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북동의 역사문화유적은 정말 소중한 것들이고,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하는 것들이기에 그 가치를 널리 알리는 일에 초석이 되는 해설사 양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성북동 전문 해설사들은 성북동의 가치를 알려주는 성북동 알리미가 된다. 그 중 박예순 해설사, 장원선 해설사와의 일문일답 내용을 옮긴다. ○ 해설사 양성과정을 어떻게 알게 되셨죠? ● 박예순 해설사(이하 박): 저는 아는 지인의 소개로 성북동에 역사해설사 양성 수업이 있다는 걸 전해 들었어요. 성북동 주민만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성북동 동사무소로 달려가 신청서를 작성했죠. ● 장원선 해설사(이하 장): 작년 이맘때쯤 성북동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길에 걸려 있는 성북동 역사문화해설사 1기 양성과정이라는 현수막을 보고 신청해서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 시작하는 마음이 어땠나요? ● 박: 저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예요. 아이들을 보살피는 역할이 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죠. 그 동안 다녔던 수업들도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글쓰기, 종이접기, 북아트, 떡 만들기 같은 수업들이었어요. 성북동 역사 해설 수업 역시 첫 시작은 아마도 아이들 생각이 먼저였던 것 같아요.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마음이었죠. ● 장: 처음에는 우리 고장인 성북동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어서 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성북동을 알려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요즘은 외국인들에게 성북동을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해설사에 대한 애정이 커지고 있습니다. ○ 해설사가 되고 나서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 박: 성북동에 살면서 가깝지만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이나 문화재들이 저에게 점점 더 가까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성북동에 애착이 생기게 된 것 같아요. 성북동 1기 역사해설사 양성 수업이 끝난 이후에도 그런 저의 마음은 지속이 되었고, 몇몇 1기 수업을 들은 동기들과 스터디를 꾸준히 해나가면서 저를 준비하는 과정의 시간을 보냈어요. 막연하고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만나서 공부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서로를 지적해 주기도 하고 격려해 주기도 하다가 보니, 심화과정을 개설해서 수료하게 되었죠. ● 장: 해설을 하면서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한다는 자체가 무척 떨렸고 매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성북동의 많은 이야기들을 알려준다는 자부심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던 것 같습니다. 처음 해설을 했을 때는 목소리도 떨리고 중간에 해설부분을 까먹기도 하고 빼먹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이제는 해설을 마치고 같이 사진도 찍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다음 해설 때는 더 잘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성아들 운영진이신데, 해설사와 병행하기 힘들진 않나요? ● 박: 운영진에 들어와서 같이 도와줄 수 있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는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과연 내가 운영진에 들어가도 될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됐거든요.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성아들의 모습이 저에게 아줌마도 뭔가 할 수 있다는 힘을 느끼게 해주었고 자극이 되었어요. 혼자서는 어렵지만 힘을 합하면 뭔가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느껴졌죠. 사회생활에 경험이 부족한 저는 운영진에 들어와 새로운 경험과 일들을 겪으면서 제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고, 엄마로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 뭔가 하고 있구나 하는 자신감까지 생겼어요. 때로는 힘든 일도 있지만 그런 일이 있어야 발전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고 하잖아요. ● 장: 마을 사업으로 시작한 해설사라서 해설뿐 아니라 여러 가지 마을 사업과 관련된 일들도 같이 해야 해서 힘들기도 하지만, 내가 하고 싶어 시작했던 해설사라는 직업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나가고 개척해 나가는 일들이 신기하기도, 재미있기도 하고 저 스스로 대견하기도 합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시작하게 된 일이잖아요. 해설을 하면서 성북동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성북동에 대해서 알아갈 때 이 일의 보람을 느낍니다. 아이만 키우고 살았던 저에게 일자리가 하나 생겼다는 것에 감사해요.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소통하면서 나 혼자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가 생겨서 외롭지 않습니다. ○ 해설하시면서 재미있었던 일 하나씩만 말씀해 주세요. ● 박: 재미있었던 일이라기보다, 처음 성북동 투어를 했던 때가 기억이 나네요. 저희 아이들을 데리고 했었는데도 떨렸어요. 최순우 옛집에서 설명하는데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혼났죠. 내셔널트러스트를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기는 어렵잖아요. 쉽게 설명해 주려다 보니까 내용이 뒤엉켜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겨울이었는데도 등에 식은땀이 쭉 났죠. 그 이후로도 해설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때만큼 떨린 적은 없어요. ● 장: 저는 한양도성에서 아이들과 보물찾기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이들에게 역사문화유적을 설명하는 것은 지루할 수도 있는데, 놀이를 접목시켰더니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성북동의 역사문화유적과 체험학습을 연결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46-148쪽
  • 짜장면 한 그릇, 그리고 다시 도전 2012년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을 마치고 나서 우리에 대한 평가를 할 겸, 아리랑 시네센터에 모였다. 영화나 한 편 보고 마무리하자는 의미였다. 물론 2013년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정말 좋다, 성아들 대단하다, 앞으로도 좋은 활동 부탁한다”라는 평을 받았지만 1년 동안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고 실은 생각보다 더 쉽지가 않았다. 공동체로 모여 있지만 모두의 생각이 같을 수는 당연히 없었고, 의견 충돌 후 그것을 조율하는 과정들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피곤한 일이었다. “1년 동안 수고했다” 정도의 의미로 활동을 마무리하고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영화를 보기 전, 커피 한 잔을 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1년 동안을 되돌아보니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시간들이었다. 멋지게 만들어 낸 결과 뒤에 감추어진 치열한 과정을 모두가 가슴 속에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지 말자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힘들었지만 그 속에서 찾아낸 많은 의미들 또한 모두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지난 얘기들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무언가 아쉽다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아쉬움 속에서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다시 해낼 용기도 자신도 없었기에 누구 하나 해보자고 섣불리 말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이것도 했으면 좋았을 걸, 이건 이렇게 할 걸 그랬네, 이건 왜 못 했을까”라는 아쉬움들만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집에서 놀면 뭐해”라는 얘기들이 나오고 “해볼까?”라며 다시 슬금슬금 용기 있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2013년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에 도전하려 하고 있었다. 아쉬움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되었고 얘기는 끝을 몰랐다. 영화 상영 시간은 이미 지난 지 오래였고, 허기가 졌다. 짜장면 한 그릇씩 먹으며 2013년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는지 2012년보다 훨씬 더 방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성아들은 종착역에 내리지 않고 순환열차를 한 번 더 타기로 한 것이다. 지금도 성아들 식구들이 모여 짜장면을 먹을 때면 그 때 이야기들을 한다. “이 짜장면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며 그 때를 떠올린다. 힘들었던 순간들을 짜장면에 같이 비벼 먹으며 후루룩 넘겨버렸던 그 때를 말이다. 2013년 사업을 마무리하는 자리를 갖게 되면 탕수육까지 먹어야겠다. 2014년에 성아들이 해낼 일들은 지금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지만, 그만큼 값진 일들이 될 테니까. 우리 앞에 있을 수많은 것들을 탕수육 소스에 버무려 먹어야 그 힘으로 버텨내지 않을까.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49-150쪽
  • 일석이조란 바로 이거, 랑. 랑. 봉 말로만 나누는 것보다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해준 활동이 있다. 바로 랑. 랑. 봉, <엄마랑 아이랑 봉사활동>이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야, 엄마가 데리고 다니면서 무엇을 하자고 하면 하지만, 중학생, 고등학생 아이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중학생, 고등학생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봉사의 즐거움도 느끼게 하면서,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봉사활동 점수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다. 함께 하는 아이들에게 봉사활동 점수를 줄 수 있도록 성북구청 자원봉사센터에 자원봉사단체 등록을 하고 회원 모집을 시작한 결과, 준회원을 포함하여 102명이나 가입하였다. 시작은 아이들과 동네 골목을 청소하러 다니는 것부터였다. 이 활동은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의미가 있었다. 평소 아이들과 함께 이동하는 길들은 뻔하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는 이동이었다. 그러나 랑. 랑. 봉 활동을 하면서 다니는 길들은 청소를 위해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골목에 담겨 있는 우리들의 추억을 아이들과 공유하며, 다 함께 성북동의 사람들이라는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2013년, 성아들은 지역 내의 다양한 행사들에 참여하여 성북동 알리미를 자처하였다. 홍보 부스를 설치하고, 전단지를 배포하고 관광객들의 도우미 역할까지 했는데, 여기에도 랑. 랑. 봉 회원들의 맹활약이 있었다. 2013년 성북 다문화 음식 축제에서 “May I help you?”라고 적힌 목걸이를 착용하고 많은 외국인들의 도우미가 되어 주었다. 도움도 주고, 실전 영어회화도 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동네에 외국인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이 알게 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북정마을 월월축제에서는 성북동 홍보부스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며 관광객들에게 성북동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음식점이나 명소를 중심으로 질문해 오는 관광객의 안내를 도맡아하던 아이들은 덧붙여 숨은 성북동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그 모습을 본 우리들은 우리가 해 나가고 있는 일들이 처음에 간절히 원했던 결과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뿌듯함이 더 커졌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50-151쪽
  • 교육이 우선이다 성아들이 하는 모든 일에는 우선시되는 것이 있다. 바로 교육이다. 물론 성아들뿐만 아니라 모든 마을공동체들이 교육을 통해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있다. 마을만들기 공모사업, 부모커뮤니티 사업, 마을기업, 협동조합, 우리는 이 모든 것에 공통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교육 받으러 참으로 많이 다녔던 것 같다. 교육 받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란 날들이 많았다. 공부를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된 우리들이 다시 무언가를 새롭게 배운다는 것은 꽤 버거운 일이었다. 졸기도 하고, 집안일을 핑계로 빠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가 억지로 시킨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매우 큰 원동력이었다.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 우리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기에 꾸준히 교육에 참여했다. 이런 교육들이 마을에 대한 이해를 높여가고 우리들 스스로의 역량을 키워주었다는 것을 2012년의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 때 받은 교육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성아들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교육을 받으러 다니면서 마을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난 것도 큰 소득이었다. 모두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을을 사랑하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유대감만으로도 충분히 소통하고 공유할 것들이 많았다. 그런 유대감은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고충들을 풀어놓을 때 더 강해졌다. 공동체마다 성격이 다르고 구성원도 다르지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해소에 대한 어려움은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만남에서 “우리에겐 이런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아 맞아, 우리도 그랬었어. 우리는 그때 이렇게 했었지”하며 갈들을 해소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나눌 수 있었다. 공동체 내에서 털어놓을 수 없었던 많은 이야기들도 다양한 공동체와 함께 나누면서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 같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마을과 관련된 많은 분들을 만나오고 있지만, 마을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 나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것도 같이 모인 사람들의 몫이다. 강의실 안에서, 강의실 밖에서 그런 것들을 배우고 공유하는 것도 교육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한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53-154쪽
  • 엄마가 먼저 배운다 성아들의 활동이 성북동 투어를 중심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아들 모두가 해설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해설사를 하고자 모인 모임이 아니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역사해설사 양성과정을 직접 만들고 수강했던 사람들 중에서 해설사 활동을 안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설사를 양성하는 것만으로 이 일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다시 성북동 아이들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성아들의 구성원들이 육아를 전담하고 있던 엄마들이었기에, 역사해설사 양성과정을 진행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줄어든 엄마들이 많았다. 부모커뮤니티 사업을 신청하여 생생과학교실을 진행하였다. 이 활동의 취지는 간단했다. 엄마가 먼저 배워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엄마가 먼저 배울 필요가 있었다. 엄마가 먼저 배운 뒤에 아이들의 수업 때, 보조교사로 참여하여 아이들과 함께 과학실험을 하였다. 엄마들의 과거 경력이 빛을 발했던 활동이었다. 경력단절 여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주부들이 다시금 그 힘을 보여주었다. 생생과학교실을 하게 된 것도 과거 과학 선생님이셨던 구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일종의 재능기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선생님을 주축으로 하여 수업을 준비하였기에 내실 있는 수업이 될 수 있었고, 아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수업을 준비할 수 있었다. 성아들의 구성원들에게는 아직 발현되지 못한 엄청난 잠재력이 남아 있다. 엄마들의 경력이 바로 그것이다. 앞으로 성아들이 하게 될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경력을 활용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쳐주며, 그것을 다시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일들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하다 보니, 아이들 먹을거리에도 신경을 쓰게 되었다. 명색이 엄마들과 함께 하는 수업인데, 마트에서 사 온 과자나 음료수를 아이들 간식이라고 먹일 수는 없었다. 집에 있으면 아이들에게 직접 해 준 밥을 먹이고 싶지, 배달음식이나 인스턴트 음식을 먹이지 않으려는 마음과 같은 것이었다. 삼각김밥 대신에 엄마가 싸주는 주먹밥을, 탄산음료 대신에 엄마가 갈아 만든 과일주스를 먹이고 싶은 마음이 바탕이 되어 착한 간식 만들기를 병행하게 되었다. 이것 역시 아이들과 함께 했다. 자기가 먹을 간식을 직접 만드는 즐거움을 아이들이 충분히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착한 간식 만들기를 하고 나서 집에서 아이가 자꾸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먹자고 조른다는 엄마들이 많아졌다. 그럴 때면 삼삼오오 모여서 아이들을 데리고 착한 간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성아들의 활동들이 생활 속으로 녹아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공유하는 것도 교육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한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55-156쪽
  • 우리, 그리고 모두의 공간이 생기다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56-3 1층. 성아들 사무실의 주소다. 보통 사무실의 주소라고 하면 ○○빌딩일 것이다. 하지만 성아들 사무실의 주소는 지극히 골목에 들어와 있는 가정집일 것 같은 느낌이 나지 않는가. 맞다. 실제로도 성아들 사무실은 가정집이다. 가정집을 사무실로 얻고 나서, 우리들의 손으로 직접 리모델링을 했다. 자기들 집도 안 하면서 사무실 일에는 어찌나 발 벗고 다들 나서시는지, 이 역시 앞서 말한 자율성의 가능성이다. 사무실을 처음 방문하는 분들은 찾아오면서부터 문의가 많다. 어떻게 가면 되죠? 참 설명하기가 어렵다. 우리들끼리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다. “여기를 어떻게 찾아오냐고? 여기 ○○네 집 앞이야” 우리는 성북동 주민들이기에,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외지인에게는 엄청나게 복잡한 설명을 곁들여야 이곳으로 안내할 수 있다. 그래서 약도를 만들고 사진을 찍어 길안내도 만들었다. 11월 26일, 개소식 날에는 저 멀리서부터 사무실을 찾아오는 알림판을 만들어 곳곳에 붙이기도 했다. 요즘에도 길을 못 찾아 어디로 가야되느냐는 문의 전화를 많이 받고 있지만 귀찮거나 싫지 않다. 그것이 골목 찾아오는 재미일 테니까. 개소식 준비를 하며 사무실에 모여 라면을 끓여 먹고,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명색이 개소식인데 테이프 커팅식을 해야 하지 않냐, 다들 그렇게 한다, 커팅식을 할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오니까 우리도 하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커팅식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니었다. 준비할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안 할 수는 없으니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한 멋들어지게 해내고 싶었다. 논의와 검색이 반복되던 중 누군가가 이런 것도 있다면서 자기의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끊는’ 테이프 커팅식 대식 ‘푸는’ 손수건 매듭풀기 하세요.” 커팅식은 끊어버리고, 절단해 버리는 느낌이다. 그러나 매듭풀기는 묶여있던 것을 푸는 것, 해방, 자유, 친화를 의미하는 느낌이었다. 그래, 바로 이것이 마을만들기, 마을기업, 협동조합의 의미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것이겠구나 싶었다. 바로 손수건을 수배하였고 다행히 길음 소리마을의 도움으로 협찬을 받을 수 있었다. 30개의 매듭이 풀릴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소식 날 엄청나게 많은 분들이 성아들 사무실을 찾아주셨다. 사무실로 다 들어오지도 못할 정도였다. 들어오고 나가기가 힘들어, 커팅식을 먼저 진행하기로 했다. 나란히 늘어선 내빈 분들에게 길게 늘어뜨린 손수건을 쥐어 드렸다. 의아해 하시던 내빈 분들에게 매듭풀기의 의미를 설명해 드리자 모두 미소를 지으시면서 손수건을 쥐셨다. 사회자의 구령에 맞추어 일제히 손수건의 매듭을 풀었고 손수건은 바람에 펄럭거렸다. 그렇게 풀어낸 손수건은 각자 하나씩 선불로 드렸다. 끊고 나면 바로 버리는 테이프 커팅식의 허례를 벗어버린 감동의 순간이었다. 구청장님께서도 매우 만족하며, 앞으로의 구청행사에서도 테이프 커팅식을 매듭풀기로 모두 바꾸라고 하셨다는 후문이 들리고 있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60-162쪽
  • 나오는 말 정말 쉴 새 없이 달려온 2년여 간의 시간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느림보걸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정작 우리는 멈춤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중간에 정리할 시간도 없이, 무언가가 생기고, 해야 하고, 하고 싶고, 해 왔던 시간. 이번에 성북마을 이야기 책 발간을 위해 글을 쓰면서 그동안의 일들을 짧게나마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글을 쓰면서 이 글을 보게 될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걱정하지는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선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찬 일이었다는 것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고 싶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닌,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2년간의 일기를 쓰는 느낌이었다. 매순간 느꼈던 감정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해서, 어쩔 때는 웃기도, 어쩔 때는 눈물짓기도 하면서 이 글을 적어 내려갔다. 고마웠던 분들이 너무나도 많이 생각난다. 그리고 미안함을 전하고픈 분들도 많이 생각난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하다. 이제는 받은 것들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성아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마지막으로 성아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던 김창숙 선생님의 기고 글을 지면에 옮겨본다. ‘사람’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성아들 / 김창숙 오늘도 부지런히 서둘러 성북동 주민센터를 찾았다. 역사에 대해, 문화재에 대해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수강생들이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오신 분, 그동안 전업주부로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신 분, 새로운 직업을 찾기 위해 나오신 분, 좀 더 공부를 해 보려고 나오신 분, 그냥 친구 따라 나오신 분 등 이곳에 모인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학입시를 앞둔 학생보다 더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열의를 다하고 있다. ‘성북동’은 나에게 많은 인연을 만들어준 지역이다. 큰 바위처럼 역사 문화의 지킴이로 자리 잡고 있는 간송미술관, 삶의 중심을 잃었을 때 방향을 잡게 해주는 심우장, 많은 사람에게 마음의 평안을 안겨주는 길상사, 문화재 지킴이로 평생을 살다 간 최순우 선생의 옛집, 역사의 시간만큼 그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성북동은 학창시절부터 찾던 곳이다.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어느덧 답사가 몸에 배었고, 우연한 기회에 학생들과 함께 답사하면서 역사와 문화를 재미있게 공부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만난 친구들이 바로 성북초등학교 학생들이다.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있는 몇몇이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때부터 동생으로, 지인으로 이어진 성북동 아이들과의 인연은 어느덧 성북동 지역의 문화재를 직접 지키고 알려나가겠다고 만들어진 ‘성아들’과의 인연으로 연결되었다. “안녕하세요. 성북동의 ○○팀 엄마인데요, 저희가 성북동에 살면서 우리 아이들한테 우리 동네 문화재를 좀 더 알리는 일을 하고 싶어서 모였는데요…….” 처음에는 학부모로 만난 어머니들이 이제는 어른학생으로, 마을기업의 관리자로 만나게 된 것이다. 강의실에서 처음 만난 어머니, 아니 학생들은 약간은 수줍어하면서도 뭔가 해내겠다는 열의가 가득한 것이, 그 의지 하나만큼은 하늘을 뚫을 듯했다. 강의가 거듭될수록 성아들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끊임없이 메모하고, 쉬는 시간이면 이것저것 질문도 하셨다. 그 중 어떤 분은 과연 제대로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셨지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면 못해낼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과정은 찌는 듯한 무더위까지도 밀쳐내고 어느덧 끝이 났다. 하지만 이내, 좀 더 심도 있는 공부를 해야겠다며 자발적으로 나선 분들에 의해 심화반이 꾸려졌다. 다시 강의실에서 만난 모습은 이제 실정에 나서야 한다는 마음에 전보다 더욱 강렬한 눈빛이었다. 학창시절이 한참 지나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끝까지 버텨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싶었다. 함께 공부하면서 친해진 분들이 서로 챙겨주고 의견도 나누면서 힘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 힘의 원천이 바로 ‘사람’에게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제는 성북동 곳곳에서 아이들에게 유적지 곳곳을 안내하고 설명해 줄 선생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이들의 끄덕임과 눈빛 속에서 가르침의 기쁨을 느낄 것이고, 역사를 설명하면서 책임감 또한 생길 것이다. 우리 동네 문화재를 우리가 알려주자는 어머니들의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된 성아들이 이제는 마을기업으로 거듭나고 성북동지킴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말이 실감난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66-168쪽
  • 쉽지 않은 길, 협동조합으로 2012년의 기억들은 모두 2013년의 성아들에게 비옥한 거름이 되었다. 제2기 성북동 역사문화해설사 과정부터 심화과정, 랑.랑.봉 활동까지 하면서 서울시 마을기업 선정을 준비하는 과정이 녹록치 않았다.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고, 그에 따르는 교육도 너무 많았다. 아이를 돌봐야 하고, 집안 살림을 해야 하는 엄마들이 시간을 자주 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때가 참 힘들었던 것 같다. 해야 할 것은 많은데, 할 수가 없던 상황들. 그래도 여기서 접을 수는 없었다. 성아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우리는 서로 도와가며 힘든 준비과정을 거쳤고, 그 사이 성아들은 마을기업으로 선정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서울시 마을기업박람회에도 참가하였다. 예전의 우리들에게 박람회는 그저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 가는 곳일 뿐이었다. 신기한 것도 많고 체험할 것도 많아서 아이들과 함께 가면 너무 좋아하는 그런 곳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가 그 주체가 되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마을기업이 된 성아들을 알리고, 성북동을 알리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그것도 직접 해야 했다. 성아들 활동을 하면서 맞닥뜨린 많은 것들이 수동적이었던 우리를 능동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마을기업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에게 여유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규정이 바뀌어서 마을기업으로 선정된 단체는 2개월 내에 협동조합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처음엔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언젠가 뉴스에서 접한 적이 있었던 협동조합의 설립에 대한 내용, 몇 명만 모이면 아무나, 누구나 설립할 수 있다고 들었던 협동조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코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준비해야 할 서류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도장 찍을 곳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이때가 문서와의 전쟁이 절정으로 치달았을 때다. 그럼에도 당당히 서울시 마을기업에 선정되고 공간지원금 1억 원을 받아낸 것은, 그 동안 성아들이 쌓아온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마을만들기 공모사업을 통해 단련된 내공이 없었다면 몇 번은 고꾸라졌을 일이었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57-158쪽
  • 자율성, 그 한계와 가능성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나서, 조합원 명부를 찬찬히 살펴 본 적이 있었다. 그 이름들을 하나씩 보고 있으니 조합원 한 명, 한 명에 담긴 추억이 떠올랐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협동조합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 대한 준비도 없었다. 서류를 작성하고, 정관을 만들고 하는 실무적인 준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어떻게든 해내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마음의 준비는 그렇지가 않았다. 협동조합이 되기 전에도 내부적인 갈등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일이 많아지자 서로가 맡아야 할 것들도 많아졌다. 확장을 반대하는 목소리, 현상유지에 힘을 쏟는 것이 좋다는 의견들도 있었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현실화하는 방법까지 같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진행되었고, 자율성을 전제로 활동해 왔기에 어떤 것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끌고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었다. 권리가 주어지면 그에 의무가 따른다. 하지만 어떠한 권리도 주지 않으면서 의무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율적인 모임의 한계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갈등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잠시 덮어두고, 혹은 모른 척하고 진행되는 것들이 많았다. 언젠가는 다시 꺼내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언제 다시 꺼내야 할지, 다시 꺼내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확실히 모르겠다. 그럴 만한 용기가 생기고, 준비가 되었을 때 분명히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앞으로 발생할 갈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을공동체를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점을 향해 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 속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분명히 발생한다는 것을 꼭 알았으면 한다. 같은 곳을 보는 마음 하나만 갖고 뭉치는 것이기에, 서로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고, 서로의 처지를 다 털어놓을 수 없는 경우들도 생긴다. 모든 상황에 맞는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더 이해하고 더 부대끼고 더 소통해야 조금이나마 그 답에 가까워질 것이다. 갈등이 두렵거나 싫어서 주저하거나 멈출 필요는 없다. 때로는 잠시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또 돌아오곤 한다. 그리고 다시 함께 한다. 자율성이 가진 한계이면서, 동시에 가능성이다. 그걸 제재하거나 막아서는 안 된다. 과정 속에서 분명 마찰이나 서운한 감정들이 생기겠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시간 또한 마을공동체가 살아가는 시간의 한 부분이다. 친구와 싸워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옆집과 마찰 한 번 없는 사람이 있을까. 자율성은 가능성을 항상 보여주고 있다. 그 가능성을 믿고 두려운 마음을 잠시 접어두길 바란다.
    김경아 외 7인, 2013, 성북마을 이야기, 159-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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