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는 1957년 피난민 정착촌이 생긴 이래로 삼양동과 월곡동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1959년에 월곡동에도 유솜(USOM)이 원조하는 주택이 들어선다는 입소문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성북구 일대에 무허가 건축물이 봇물 터지듯이 지어지게 되었다.
서울시는 4대문 안에서 수재나 화재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들을 교외로 내몰기 시작했다. 집이 없어진 이재민들은 정부가 준 변두리의 국공유지 땅으로 옮겨졌다. 정착촌이라고 불리는 달동네는 그렇게 생겨났다. 이듬해에는 도시계획선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도동, 쌍림동, 효창공원 일대에 있던 판자집 철거민들이 미아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울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미아리로 유입되면서 해마다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고 달동네가 형성된 것이다.
도시 빈민의 쫓고 쫓기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법정 최소 면적에도 미치지 못하는 8~12평의 땅을 주면서 정착촌을 조성했기 때문에 달동네는 무허가 주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거 때가 다가오면 무허가 판자촌을 합법화시켜 주겠다고 했지만 선거가 끝나면 도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철거는 반복되었다. 미아리정착지사업은 하나의 선례가 되어 성북구, 영등포구, 성동구 등 무려 20개 지구에 43,509가구분의 판자집 정착촌을 만듦으로써 이곳을 중심으로 그보다 몇 배 되는 무허가 건축물의 난립을 초래했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무허가 건물난립의 근원적인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연차정리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일환으로 무허가 건물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제등록기간(1965.2.15.~1965.3.15.)을 주어 신고하게끔 하면서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무허가 건물의 등록제 실시, 둘째, 수도, 전기시설 일체 불허, 셋째, 구청의 구역제 실기, 넷째, 무허가 건물 건축자 처벌 등이다. 그러나 법의 강력한 집행 의지와는 별개로 선거 때가되면 무허가 건물의 양성화를 공약으로 내거는 정치인과 선거를 의식한 정부여당의 일관되지 못한 법집행으로 말미암아 주택사정은 날로 악화되어만 갔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83-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