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정회
1936.04 - 1946.10.01
인물 단체 주민자치
1930년대 성북동 지역사회 운동을 주도한 이신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을운영조직이다. 성북정회의 활동으로는 신규 요정의 철폐 요구, 수도부설 진정운동, 버스 운전시간 연장 요구, 전염병원 설치 반대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성북동
  • 「뻐스」운전시간(運轉時間) 연장(延長)을 진정(陳情) 대표오씨(代表五氏)가 동서통(東署通)해 경전(京電)에 성북부근(城北附近) 주민(住民) 궐기(蹶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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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북정연맹(城北町聯盟) 결성식거행(結成式擧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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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뻐스」운전시간(運轉時間) 연장(延長)을 진정(陳情) 대표오씨(代表五氏)가 동서통(東署通)해 경전(京電)에 성북부근(城北附近) 주민(住民) 궐기(蹶起)
  •  성북정연맹(城北町聯盟) 결성식거행(結成式擧行)

기본정보

시기

  • 시대: 일제강점기
  • 시기: 1936.04 - 1946.10.01
  • 비고: 1946년 성북동회로 명칭 변경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근거자료 원문

  • 이신구를 중심으로 꾸려진 성북정회는 주민들의 참여가 바탕이 되었기에. 주민들과 함께 꾸준하게 지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존에 성북동에 있던 요정들에 대해서 주민들의 안면(安眠)을 방해하지 말 것과 풍기가 문란하여 학생들의 교육에 장애를 초래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차량출입을 통제해 교통사고의 위험을 줄일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더 이상 요정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서 성북동이 요정촌이 되는 것을 막아냈다. 지역 주민운동 ‘성북정회’ 1938년 2월 <동아일보> 기사에는 ‘하수도 설비가 없는 데다가 수도까지 없어 우물물을 음료수로 하는 성북정에 전염병 요양원(폐결핵환자 요양원)이 설치된다는 것을 알은 성북정 육천주민은 보건상 이것의 반대운동을 이르킨다함은 기보한 바이니 십육일 오후 칠 시부터 정회회관에서 임원 삼십오 명이 출석하야 토의한 결과 교섭위원 육 명을 다음과 같이 선정하야 병원경영자인 정홍섭 씨에게 중지 권고를 하고 그래도 불응하는 때는 주민대회를 열고 동시에 요로 각 당국에 진정하기로 되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지금은 결핵을 정복해 결핵의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 기사를 보면 요양원을 반대하는 것이 단순한 지역이기주의 현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결핵은 상당히 위험한 전염병이었다. 일제강점기 한 분석에 의하면 1930년대 전체 조선인의 25%가 결핵환자로 판정되었으며, 이는 거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수도시설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 전염병의 확산은 더 컸었다. 성북정회가 수도시설정비를 요구한 것은 성북동 전체 주민의 바람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태준을 비롯한 다른 문인들도 폐결핵환자 요양원을 반대하였다. 성북정회를 비롯해서 성북동에 살고 있는 주민이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성북동을 보존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내용은 주민이 동네를 지켜낸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성북동에 사는 이신구라는 젊은 엘리트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주민과 성북동에 기거하고 있는 문인들의 힘이 없었다면 성북동의 마을공동체는 활성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28-29쪽
  • 1930년대 성북정회城北町會의 출범 1930년대 성북동 지역사회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이신구李信龜였다. 그는 1897년 3월 4일생으로 성북구락부를 주도했던 서광훈보다 4살 위였으며, 성북리 189-5에서 거주했다. 이신구는 서광훈에 비해서 상류층에 속한 인물이었다. 일본에 유학하여 1917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정경학부 예과를 졸업하였으며, 1920년 같은 대학 정경과 2년 과정을 수료했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정주오산고등보통학교 교원, 1925년부터 1927년까지 경성협성실업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성북리 구장城北里 區長을,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숭인면협의회원을 역임했다. 1936년 성북동이 경성부로 편입된 이후에는 성북정 총대城北町 總代를 담당했다. 1939년에는 경성부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이신구가 성북리의 구장을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구장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메이지대학 출신에 고등보통학교 교사 출신이라는 점이 기본적으로 작용했다. 이것에 더하여 지역 학교였던 삼산학교를 살려내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삼산학교는 지역 청년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에 빠져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신구는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신구의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이 신문기사에서는 이신구를 ‘항상 사회사업에 유의하던’ 인물로 묘사했다. 이신구가 성북동이라는 지역사회에서 주민 대표직을 맡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경력과 함께 마을의 현안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지역사회에 능력과 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신구가 성북구 구장이 된 1931년부터 1934년 시기에 성북리에는 여러 가지 지역주민운동이 있었다. 먼저 주민단합을 공고히 하는 지역축제들이 개최되었다. 1931년과 1932년에는 단오일을 맞아 ‘단오원유회’, ‘단오위안회’라고 불리는 마을축제가 열렸다. 1933년 7월에는 성북유치원이 설립되었다. 이 유치원은 성북리의 유지들이 설립했으며 원장은 유양호柳養浩였다. 성북리에는 성북유치원을 후원하는 후원회가 조직되었다. 구장이었던 이신구, 성북구락부의 구성원이었던 박성근, 이종린 등이 이사직을 담당했다. 이들의 활동에 의해 성북유치원을 위한 의연금이 모집되었다. 성북유치원이 설립된 지 2년 후인 1936년에는 성북리에 새로운 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의 이름은 영명학교永明學校였으며 신설목적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학령초과아동을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이학교의 원장은 이의석李義錫이었으며 이춘길李春吉, 유일劉鎰, 이희철李熙哲, 김상욱金湘旭 등이 이 학교의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무보수로 이 학교에서 일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1930년대 성북리에는 지역주민운동이 활성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신구의 역할과 함께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눈에 띄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92-94쪽
  • 성북정회의 활동 (1) : 신규 요정의 철폐 요구 1936년 4월 성북리가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일정한 명칭이 없던 성북동의 마을운영조직은 ‘성북정회’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마을일을 해오던 청년들과 유지들은 성북정회의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정회 총대로 이신구가 선출되었다. 성북정회는 성북동 주민들의 불만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 중 첫 번째는 마을의 주택지에 요정料亭을 허가한 행정당국에 문제를 제기하고 신규 요정의 설립 허가 조치를 취소 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성북정에는 당시 유명했던 음벽정飮碧亭이 있었다. 성북정 주민들은 음벽정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음벽정이 생긴 이후 도로는 좁은데 자동차의 왕래가 심해져 통행에 불편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성북정에는 학교, 유치원, 예배당, 야학 등이 있었고, 1,500여명의 학생이 머물고 있었으며, 선생과 연구자 80여명이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 요정이었던 음벽정은 풍기상, 위생상 좋지 않은곳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또 다른 요정이 설치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이에 이신구를 포함한 5명은 성북정회를 대표하여 동대문경찰서에 방문하여 요정허가의 부당함을 진정하였다. 그리고 동대문 경찰서로부터 현재 있는 음벽정을 제외한 신규 요정은 허가하지 않겠으며 불편한 도로는 수리해주겠다는 답변을 얻었다. 이와 동시에 음벽정에도 요구사항을 제출했다. 하지만 음벽정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음벽정 측에서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실천하지 않자 주민들은 다시 정회를 열고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성북정의 주민들은 지속적인 요정 추방 운동을 벌이면서 성북동의 요정촌화를 막아낸 것이다. 성북정회에서 음벽정에 요구한 사항 요구조건 一. 도로진애道路塵埃를 방지할 것. 一. 도로파착道路罷鑿을 수시 보수할 것. 一. 업무시간을 준수하여 정민町民의 안면安眠을 도圖할 것. . 一. 요정에 오는 거마車馬를 서행徐行케 하여 통행인의 위험을 방지할 것. 一. 도로 협착처에 가교架橋를 완전히 설치할 것. 一. 요정에 오는 자동차가 정내 통과시 주의사항을 요정 구내에 게시함을 용인할 것. 一. 요정 소속인원이 정내에서 후주행악酗酒行惡하여 정민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동시에 극해極害를 끼치는 때에는 요정주料亭主가절대책임을 질 것. 소화 11년 8월 5일 성북정회 대표 일동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94-96쪽
  • 성북정회의 활동 (2) : 수도부설 진정운동 성북정회의 두 번째 활동은 수도부설 진정운동이다. 수도에 관련한 문제는 새롭게 경성부에 편입된 모든 지역의 문제였는데 성북정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36년 현재 성북정에는 약 800호, 4,00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물 한 개가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겨울철은 말할 것도 없고 여름철에도 혜화문 안에 있는 수돗물을 비싸게 사 먹어야 했다. 또한 불이 나면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주민들은 성북리가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수도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경성부로 편입된 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수도가 부설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성북정회에서는 이신구, 김창학, 윤병철 등 지역 유력자들이 발기인이 되어 경성부 수도과에 수도부설을 촉진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활동의결과 1937년 우선적으로 수도가 부설될 지역에 성북동이 포함되게 되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98쪽
  • 성북정회의 활동 (3) : 버스 운전시간 연장 요구 성북리가 경성부에 포함되면서 문제가 되었던 큰 문제 중 하나는 교통문제였다. 1931년 당시 경성부내의 인구수는 36만 5천이었고자동차 보유대수는 200대가 되지 않았다. 총독부 경무국의 조사에 따르면 1934년 성북리가 속했던 숭인면을 거주지 주소로 신고 한 사람들 중에는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당시 성북리에 큰 별장을 가진 부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소유한 자동차 등은 그들의 원거주지에 신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예외 상황 등에도 불구하고 숭인면 내에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당시의 이곳 주민들이 경성부 시내로 가려면 도보가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1930년대 전반기, 경성을 출발하는 시외버스는 현재 수유리에 있는 화계사와 안암동에 있는 개운사까지 다녔는데 하루에 2차례를 왕복하는데 그쳤다. 시내버스가 성북지역에 들어간 것은 1935년에서 1936년 사이였다. 이때 시내버스는 돈암동과 종암동까지 운행되었다. 시내버스 노선이 확장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는 인구의 증가로 인한 교통수요의 증가였다. 성북리가 속한 숭인면의 경우 1928년 당시 4,593호, 22,185명이었던 인구가 1933년에는 7,416호 36,797명으로 증가했다. 두번째는 1936년에 있었던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과 시가지계획령의 시행이다. 경성부는 경성부의 구역확장으로 새롭게 경성부에 편입된 지역주민의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시내버스 운영은 원래 경성부에서 운영했다. 하지만 버스의 운영은 매번 적자에 직면했다. 『동아일보』는 1931년 1월말 기사에서 경성부에서 경영하는 버스의 성적이 좋지 않으며 존폐론이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울러 2년간 결손액이 약 3만원이라고 했다. 1931년 8월에는 경성부가 경영하는 버스의 결손액이 10만원이라고 보도했다. 경성부가 경영하던 버스와 경쟁관계에 있던 교통수단은 전차였다. 이전차를 운영하던 회사가 경성전기주식회사京城電氣株式會社였다. 경성전기주식회사는 부영府營 버스가 경영난에 허덕이고 존폐여부에 처해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버스의 운영권을 사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경성전기회사의 제안에 총독부와 경기도, 경성부 관계자들은 교통문제 전반에 걸쳐서 토의를 했다. 그 결과 1933년 3월 10일자로 경성전기주식회사가 21만 8천원을 경성부에 지불하고 버스 운영권을 양도 받는 것이 결정되었다. 경성부 소유였던 버스 54대, 화물차 1대, 차고, 사무소, 공장 등이 경성전기주식회사 소유로 이전되었으며 버스와 관련된 종사자들의 소속 역시 바뀌게 되었다. 1933년 4월 1일부터 경성부 시내버스는 경성전기주식회사 소속으로 운행되었으며 버스의 색은 은색으로 바뀌었다. 경성전기주식회사는 버스 노선을 전차 노선과 병행시키지 않았으며 원칙적으로는 전차가 다니지 않는 곳을 운행구간으로 택했다. 버스를 전차의 보조수단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지금과 유사하게 환승제도를 채택한 것이 눈에 띈다. 즉 전차를 내리면 버스를 탈 수 있게 하여하나의 표로 환승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었다. 경성전기회사는 이러한 제도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다고 한다. 버스와 전차 간에 환승이 자유롭고 요금은 그대로인데 이것은 “당시 일본 국내에서도 그 유래가 없었던 것”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1936년 당시 성북정 주민들은 경성전기회사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이것은 경성전기회사의 버스 운영 방침에 대한 반발로 폭발되었다. 경성전기회사는 창경원과 종로5정목에서 혜화정 정류소까지 이르는 버스 운행을 전차운행에 비하여 매우 빠르게 종료했다. 경성부로 왕래하던 성북정 주민들의 불편함은 매우 컸다. 성북정 주민들의 항의로 기존 9시까지 운영되던 버스는 9시 45분까지 연장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차가 운행되는 시간보다 2시간 30분이나 빨리 종료하는 것이었다. 버스가 끊긴 후 성북정 주민들은 전차에서 내려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동아일보』는 “비와 눈이 내리는 밤 전차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들의 불평은 발자국마다 커졌다”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1936년 6월 3일 성북정 주민들은 동대문 경찰서를 거쳐 경성전기회사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의 내용은 전차 시간에 맞추어 버스 시간을 연장해 줄 것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98-102쪽
  • 성북정회의 활동 (4) : 전염병원 설치 반대운동 성북정회의 또 하나의 활동은 마을 내에 전염병원 설치 반대운동을 한 것이었다. 1938년 2월 성북정에 전염병자를 위한 요양원이 설치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을 접한 성북정 주민들은 병원설립에 대한 반대의견을 표출했다. 하수도 설비가 없으며 수도시설이 없어서 우물물을 먹는 성북정에 전염병자를 위한 요양원이 만들어질 경우 주민의 건강상에 많은 위험이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병원은 성북동 상류지역에 설치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성북정 주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1938년 2월 16일 성북정회 회관에서 임원 35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먼저 교섭위원을 정해서 병원경영자인 정홍섭鄭弘燮에게 중지 권고를 하자는 것이 결정되었다. 만약 불응할 때에는 주민대회를 열고 동시에 당국에 진정하기로 결정했다. 교섭위원 6인은 서광전徐光前, 이휴선李烋善, 국수열鞠壽烈, 김창학金昌學, 김순철金順哲, 이신구李信龜였다. 회의의 결정에 따라 성북정회에서는 정홍섭에게 폐결핵 환자 수용을 주목적으로 하는 병원을 설치하는 것을 중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홍섭은 병원이름을 내과라고 하고 계속 병원설립을 진행했다. 이에 성북정 유지 85명이 다시 모여 병원 설립을 반대하는 운동을 진행하였다. 이후 정홍섭이 경성보건의원京城保健醫院이라는 이름으로 병원을 열자 주민 630여 명은 병원에 반대하는 진정서에 날인했다. 이 진정서를 가지고 이신구, 김창학, 윤병철 등 8명이 동대문경찰서로 가서 제출했으며 병원이 운영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는 의견을 밝혔다. 이와 같이 성북정회는 지역사회의 이익을 도모하고 주민의 불편사항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성북정회의 활동이 모두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상당 부분 수용되었으며, 일정부분 경성부의 도시정책에도 반영되었다. (남기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02-103쪽
  • 전염병원설립중지를 경영자에게 교섭 하수도 설비가 없는데다가 수도까지 없어서 우물물을 음료수로 하는 성북정에 전염병 요양원이 설치된다는 것을 알은 성북정 6천 주민은 보건상 이것의 반대 운동을 일으킨다 함을 보도한 바와 같다. 16일 오후 7시부터 정회회관에서 임원 35명이 출석하여 토의한 결과 먼저 교섭위원 6명을 다음과 같이 선정하여 병원경영자인 鄭弘燮씨에게 중지 권고를 하고 그래도 불응하는 때는 주민대회를 열고 동시에 당국에 진정하기로 되었다. 徐光前, 李烋善, 鞠壽烈, 金昌學, 金順哲, 李信龜 『동아일보』 1938. 2. 28.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47
  • 성북정민 재분기 - 요양원 설치 중지 최후권고 연명서 제출 부내 성북정에서는 의사 정홍섭 씨가 폐결핵 환자 수용을 주 목적으로 하는 병원을 설치함에 대하여 동정 주민이 정회를 열고 반대운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우선 전기의사 정홍섭 씨에게 수차중지권고를 하였으나 병원이름을 교묘히 내과라고 과명만을 내세우고 의연히 병원설치를 진행 중임으로 주민 측으로는 지난 6일 7시에 동정회관에 동정유지 85명이 다시 모여 다음과 같은 반대의 적극 운동을 결의하였다. 『동아일보』 1938. 4. 8.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48
  • 그러할 무렵 李泰俊(이태준) 鄭芝溶(정지용) 李孝石(이효석) 趙容萬(조용만) 등의 [구인회]가 나타났다. (뒤에 朴泰遠(박태원) 李箱(이상) 金裕貞(김유정) 등이 참가). 구인회는 해외문학파와는 달리 순수문학을 정면으로 들고 나온 그룹이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72
  • ○ 성북정 주민들의 일제 식민지 당국에 대한 요구 사항 - 신규 요정의 철폐 요구(1936. 8) ㆍ이신구를 포함한 주민 5명이 성북정회를 대표하여 동대문경찰서를 방문하여 신규 요정 허가의 부당함을 진정 → 동대문경찰서의 답변 : 현재 음벽정을 제외한 신규 요정은 허가하지 않겠으며 불편한 도로는 수리해 줄 것. ㆍ성북정회의 음벽정에 대한 요구사항 1. 도로진애(道路塵埃)를 방지할 것. 2. 도로파착(道路罷鑿)을 수시 보수할 것. 3. 업무시간을 준수하여 정민(町民)의 안면(安眠)을 도(圖)할 것. 4. 요정에 오는 거마(車馬)를 서행(徐行)케 하여 통행인의 위험을 방지할 것. 5. 도로 협착처에 가교(架橋)를 완전히 설치할 것. 6. 요정에 오는 자동차가 정내 통과시 주의사항을 요정 구내에 게시함을 용인할 것. 7. 요정 소속인원이 정내에서 후주행악(酗酒行惡)하여 정민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동시에 극해(極害)를 끼치는 때에는 요정주(料亭主)가 절대책임을 질 것. ㆍ주민들의 적극적인 진정과 요구로 성북정의 요정촌화를 막아냄.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1-112쪽
  • ○ 메이지대학 출신 인텔리 이신구(李信龜), 1930년대 성북동 지역사회운동 주도 - 성북리 구장(區長): 1931년~1934년 - 숭인면협의회 회원: 1835년~1936년 - 성북정 총대(總代): 1936년~1939년 (성북정회 출범) - 경성부회 의원 당선 : 1939년 ○ 학교의 유지와 설립 삼산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 - 삼산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 지속 - 성북유치원 설립(1933. 7.) ㆍ성북리 유지들의 지원으로 설립(원장: 유양호) ㆍ성북유치원 후원회 조직 및 의연금 모집 - 영명학교(永明學校)의 설립 ㆍ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령초과아동 교육 기관(원장: 이의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1쪽
  • 수도 부설 진정(1936. 6.) ㆍ1936년 현재 성북정에 약 800호에 4,000여 명 거주하고 있었으나 수도 부설이 안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물 개수도 태부족 → 여름철에도 혜화문 안의 수돗물을 사다 먹어야 하고 신속한 화재 진압도 어려운 형편 ㆍ1936년 (고양군에서) 경성부로 편입된 이후 수도 부설을 기대했으나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신구, 김창학, 윤병철 등 지역 유력자들이 발기인이 되어 경성부 수도과에 수도 부설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 ㆍ경성부는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937년 우선적으로 수도가 부설할 지역에 성북정을 포함 - 버스 운행 시간의 연장(1936. 6.) ㆍ1936년경 경성부에 새로이 편입된 성북정과 돈암정의 인구 증가 및 교통 수요 증가로 이 지역과 시내를 연결하는 버스 노선을 신설했으나, 부영버스의 소유 회사인 경성전기회사는 종로5정목을 거쳐 혜화정 정류소까지 도착하는 버스 운행을 매우 빠르게 종료했기 때문에 늦은 밤 성북정 주민들의 불편 초래 “비와 눈이 내리는 밤 전차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들의 불평은 발자국마다 커졌다” — 『동아일보』 1936. 6. 4. ㆍ1936년 6월 3일, 성북정 주민들 동대문경찰서를 거쳐 경성전기회사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전차 운행 시간에 맞추어 버스 운행 시간을 연장해 줄 것을 요구 - 전염병원 설치 반대(1938. 2.) ㆍ1938년 2월 성북정에 전염병자를 위한 요양원이 설치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ㆍ성북정 주민들, 상하수도 시설이 없는 성북동에 전염병 환자를 위한 요양원이 들어선다면 주민 건강에 많은 위험이 있게 될 것이라며 병원 설립 반대 운동을 추진 ㆍ병원경영자 정홍섭은 ‘경성보건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병원을 열자 성북정 주민 630여 명이 공동으로 병원 경영에 반대하는 진정서 제출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2쪽
  • 3. 1930년대 성북정회(城北町會)의 활동 ○ 일제강점기 성북동 주민 관련 신문기사 ● 성북구락부, 한양청년연맹에 가맹 경성부근에 있는 청년단체를 망라하여 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을 조직하고 활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성북동에 있는 성북구락부(成北俱樂部)에서는 지난 8일에 임시총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 『동아일보』 1925. 8. 12.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2쪽
  • 하윤실씨가 지난 20일에 삼산교장으로 취임 이십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시외 성북동에 있는 삼산학교는 수 년래로 경제적 타격을 받아오든 바 이번 조도전(早稻田)대학 고등사범과를 졸업하고 현재 보성고보에 교편을 잡고 있던 하윤실씨가 지난 20일에 교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자진하여 교편을 잡고 동분서주한 결과 시의 성의에 감복한 몇몇 인사도 적극적으로 후원키로 되어 신학기를 이용하여 더 한층 사회적으로 활동을 개시할 터이라 하며 우선 제일계획으로 지금까지는 4년제 이던 것을 6년제로 연장하고 교사도 금년도 안에는 기어히 증축할 터라는 바 더욱이 하씨는 학창시대부터 특히 무산 아동의 동심에 착안하여 전공으로 연구하였다하며 여류작가로 동씨의 부인인 김일엽(金一葉)씨도 자진하여 교편을 잡기로 하였다더라. — 『동아일보』 1930. 3. 29.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3-114쪽
  • 성북야학원 설립 성북소년회에서 돈이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무산어린이를 위해 야학원을 설립하고 보통학교의 일, 이, 삼, 사학년의 아동을 모집한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27. 7. 6.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3쪽
  • 교실에 난로 없어 200 생도 고생 경성 근방 삼각산을 배경 삼고 경개절승한 성북동에 있는 삼산학교는 옛날 융희 2년 고 황수연씨의 설립으로 그간 이십년 동안에 수백명의 졸업생을 내어서 사회에 다대한 공헌이 많았는데 그간 춘풍추우 역경속에서 겨우 유지하다가 고 황수연씨 애손(愛孫) 김수영 씨가 맡아 경영하던 중 6년 전에는 교육협성회(敎育協成會)의 윤갑병(尹甲炳) 씨와 김동근(金東瑾) 씨가 많이 활동하다가 그들도 역시 감당키 어려워서 지난 오월 경에 사직하매 그 동리 유력 청년 수명이 침식을 잊어 가면서 눈물 섞인 열성으로 유지하는 중이라는데 요사이 혹독한 추위에도 경비가 없어서 2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과 선생이 불도 피우지 못한 교실에서 목불인견의 현상이라 하며 성북동에는 시내 부호별장이 20여 곳이나 있으나 삼산학교의 비운에는 세상이 모두 냉정할 뿐이라 하여 그곳 주민들은 매우 근심중에 있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28. 12. 13.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3쪽
  • 삼산교에 서광 시외 성북동에 있는 삼산학교는 그간 비운에 빠젓든 바 그곳 유력 청년의 희생 덕으로 활동한 결과 항상 사회사업에 유의하던 동리유지 이신구(李信龜)씨가 그 정경을 보고 정신적, 물질적으로 다대한 찬동과 활동을 하여 제구 불비를 착착 준비중이라는 바 이 소문을 들은 동소문외 일대 인사와 이백 명 되는 학부형들은 이씨의 열(성)을 칭송하며 따라서 삼산학교는 사립학교로서는 앞으로 상당한 학교가 되리라고 칭송한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28.12.17.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3쪽
  • 이원우 씨의 독지 시내 황금정에 사는 이원우(李元雨)씨는 항상 공익 사업에 공헌이 많은 바 이번 시외 성북리에 있는 삼산학교의 경비 곤란함을 듣고 동교의 과동할 석탄 전부를 담당하였음으로 동교 직원 및 학부형 간에서는 이씨의 독지(篤志)에 감사함을 말지 않는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29. 1. 30.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3쪽
  • 성왕히 거행할 경성 어린이날 20여 개 세포를 가진 경성소년연맹(京城少年聯盟)에서 경성어린이날 거행에 대한 재경 소년단체대표자회의를 열었다. 구역을 정했는데 성북소년회 담당 구역은 동소내외(東小內外) 일대였다. — 『동아일보』 1929. 4. 30.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3쪽
  • 학령초과아동 위해 영명학교 신설 “부내 성북정의 유지들은 동리에 학령초과아동이 많이 있으나 그들은 배울 길이 없어 가두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든 나머지 학령초과아동의 교육을 본위로 하는 영명학원(永明學院)을 창설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미 50여 명의 입학지원자도 있게 되었으므로 10일에는 동학원 개원식을 거행하는 동시에 직원까지 선거하였다고 하는데 그 결과 이의석(李義錫)씨는 원장에 취임하게 되고 이춘길(李春吉), 유일(劉鎰), 이희철(李熙哲), 김상욱(金湘旭) 등 제씨는 직원으로 취임하게 되었다는 바 전기 제씨는 전부가 무보수로 동학원을 위하여 힘쓰기로 되었다 한다.” — 『동아일보』 1936. 4. 12.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4-115쪽
  • 성북유치원 설립 유지 몇사람이 유치원을 설립하려고 했다. 그 준비가 끝나서 7월 1일 동리예배당에서 개원식을 했다. 이름은 성북유치원이고 원장은 유양호(柳養浩)이다. —『동아일보』1933. 7. 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4쪽
  • 성북유치원에 내는 의연금 성북유치원후원회에서 이사 이종린(李鍾麟), 박성근(朴性根), 이신구(李信龜)씨 등의 활동으로 의연금이 들어왔음. 원감 장혜자(張惠子)는 원아들을 친자식 같이 친절히 훈육한다. 이 유치원의 앞날을 기대하고 있음. — 『동아일보』 1934. 1. 14.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4쪽
  • 전차구역제를 철폐하라 “경성부는 인접 1읍 8개면을 합쳐 면적 9방리(方里) 인구 육십삼만의 대도시가 되었다. … 부의 확장은 부의 울타리를 넓힌 것으로 제일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부내의 교통문제일 것이다. … 행정구역의 담만 헐고 교통구역의 담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확장된 새 경성부의 제일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살림이 한 살림 되는대는 무엇보다도 교통의 장벽을 철폐하는 것이 긴급한 일이니. … 경전(京電)은 구역철폐에 대하여 성의가 없고 부당국 역시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 새로 편입된 곳은 세민(細民)이 많이 사는 곳으로 요금구역제에 가장 큰 손실을 받는 이들이다. 또한 행정구역이 통일됨에 따라 부내출입이 빈번해지는 데서 생기는 교통비의 손실이 덧붙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누구보다도 그들이 구역철폐를 열망하고 있다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경성부는 새로운 겅성부의 빈곤한 부민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면서도 보고만 있을 것인지 … 새로운 경성부의 구역을 보자. 동으로는 청량리·왕십리 방면, 서로는 마포·서강 방면, 북으로는 성북·부암·홍제 방면이요. 남으로는 노량·영등포 방면이니 거기에는 무수한 빈민이 주접(住接)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대부분은 도시자유노동자요, 행상이요, 공장노동자들인 만큼 그들은 경성부 사회정책의 주요 대상이 되는 생활군이다. 그들이 열망하고 있는 전차, 버스구역 철폐에 등한한 태도를 가진다면 이는 새 경성부의 새로운 실태가 아니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경전(京電)이 부의 공공사업을 대행하는 처지에 있으면서 폭리를 탐하여 그 ‘시빌 서비스’의 책무를 저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괘심한 일인가” — 『동아일보』 1936. 4. 2.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4쪽
  • 버스 운전시간 연장을 진정 숭인정, 혜화정, 성북정 등 수만 주민의 경전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기어코 폭발되어 3일 조정환(曺正煥), 이근영(李根榮)씨 외에 5인의 주민대표들이 동대문서를 거처 경전 당국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창경원과 종로5정목에서 헤화정 정류소까지는 버스는 전부터 전차 운전 시간에 비하여 분수 없이 빨리 걷어가므로 참다 참다 못한 주민들은 수차 직접 간접 항의 교섭하여 밤 9시에 걷어가는 것은 9시45분까지는 연장시켰으나 전차에 비하면 두시간반이나 빠르니 더구나 비 눈 뿌리는 밤 같은 때 전차에서 내려 터덕터덕 걸어가는 사람들의 불평은 발자욱마다 커졌다 한다. 만일 이번에 운전시간을 연장치 않으면 어떠한 수단을 쓰던지 성공하여 보려고 대표 제씨는 그 대책을 강구 중이라고 한다. — 『동아일보』 1936. 6. 4.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5쪽
  • 성북정 요정촌화에 주민이 궐기진정 성북정은 이상적 주택지라고 하여서 너도 나도 하고 많이 나가 살게 되었는데 최근에 요리점이 생긴 이후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다고 마침내 정회에서 궐기하였다. 성북정에 음벽정이 생긴 이후 도로는 좁은데 자동차의 왕래가 심하여 통행상뿐만 아니라 학교, 유치원, 예배당, 야학 등이 있고 그 외에 1,500여 명의 학생이 머물고 있다. 선생, 연구가등 80여 명이 사는데 주야로 풍기상 자미롭지 못한 일이 많이 우려되며 위생상 견지에서도 영향이 적지 않아 은근히 불만이 많던 중 최근에 들리는 바에 의하면 또 요정이 설치된다는 풍설을 듣고 성북정 정회(町會)를 열고 다음과 같은 대표를 선정하여 지난 6일 동대문서에 진정을 하는 동시에 음벽정 측에도 다음과 같은 요구를 5일에 제출하였다 한다. — 『동아일보』 1936. 8. 9.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5쪽
  • 폐병원의 설치반대 성북정민 재진정, 동서의 태도 주목 성북정 상류지대에다 의사 정홍섭씨가 페병요양원을 경영하려는 데 대하여 성북정 주민 일동은 주민보건상 중대 문제라고 하여 그간 수차 주민대회를 열고 반대운동을 하는 관계로 당국과 정씨에게 중지를 권고하였으나 수 일전부터 정씨는 예정지에다 경성보건의원(京城保健醫院)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영업을 개시하였다 한다. 간판은 보건의원이나 내용은 전염병을 치료하는 병원에 다름이 없음으로 이에 분개한 주민들은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우선 19일 주민 630명의 연명날인의 진정서를 가지고 대표 성북정총대 이신구(李信龜), 부총대 김창학(金昌學), 윤병철(尹炳哲) 외 8씨가 소관 동대문서로 찾아가 강경히 반대를 진정한 바 있었는데 경찰의 처지가 매우 주목된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38. 4. 20.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15쪽
  • ○ 성북정회 - 1936년 4월 성북동이 경성부에 편입되어 성북정이 되면서 성북동의 마을운영 조직이 성북정회로 됨 - 1936년 6월부터 8월 사이 구장인 이신구 등이 주민진정운동 전개 - 신규 요정의 허가 취소 요구, 요정 출입의 차량통제 요구, 음벽정 외의 요정 신설 불허하겠다는 답변을 얻음 - 수도부설 촉진 진정운동(이신구, 김창학, 윤병철 등) - 버스 운행시간 연장 요구 - 전염병원 설치 반대 운동 - 1936년 10월 성북정 184번지 오경환(吳慶煥, 29)은 일본대학 중의 학생인데 부친 오한근(吳漢根)의 뜻을 받들어 성북정회에 200원을 기부 - 1938년 경 10여년간 성북동과 성북정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정회 사무를 맡아온 현 총대 이신구(李信龜)로 그는 오산과 협성실업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아왔고 정회사무소를 차려놓고 성북정의 발전을 위하여 힘써서 전기도 들어왔고, 버스도 통하였고, 1937년에는 수도마저 들어오는 등 성북정민이 호화로운 문화적 혜택을 누리게 함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9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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