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태
1900.12.28 - ?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교육가
인물 개인 학자
사학자, 민속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3일 밤 안암동·안감천(성북천)의 만세시위에 참여할 당시 안암리 11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1932년 송석하·정인섭과 함께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하고 193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하였다. 1934년 안암동으로 이전한 보성전문학교의 사서로 고용되고, 이후 보성전문학교의 문명사 교수와 도서관 관장직을 맡았다. 1949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문리대학장에 재직 중 6.25 전쟁으로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조선신가유편』 『조선민담집』 『조선민족설화의 연구』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조선민족사개론』, 『국사대요』 등이 있다.
안암동

기본정보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900.12.28 - ?
  • 비고: 6.25전쟁시 납북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 비고: 서울 안암정 11번지

근거자료 원문

  • ○ 오직 나라를 위해 맞섰던 성북인들 - 안암동 출신의 피한봉과 안암동에 거주하던 손진태는 안암천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48쪽
  • ○ 우리역사를 바로 세운 손진태 - 진단학회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안암동에 거주했던 손진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신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해 연구한 인물로 평가받는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32년 조선민족학회를 창립해 1933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 《조선민족》을 창간했습니다. 역사와 민속, 그야말로 우리의 것을 연구하고 이것을 학문으로 정립시키는데 최선을 다한 학자였고 동시에 독립운동가였지요. 안타깝게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으로 재직 중 6·25 전쟁통에 납북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90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34년-손진태 《진단학보》 창간 1950년-조헌영,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손진태 등 주요인사 대거 납북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13쪽
  • ○ 성북구의 월·납북 인사 - 손진태(孫晉泰, 1900~?, 안암동 거주) ㆍ1934년 보성전문학교 강사, 1945년 서울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 ㆍ1949년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문리과대학장에 재직 ㆍ한국전쟁시 납북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48쪽
  • 안암동 출신인 손진태와 피한봉은 1919년 3월 23일 밤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동 안암천 부근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 경남 동래 출신으로 안암동 11번지에 거주하였다. 성북구에 거주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하여 징역 2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석방되기까지 약 5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 본적: 서울 안암정 11번지 주소: 서울 안암정 11번지 계열과 단체: 3ㆍ1운동 <활동 내용> 경남 동래군(현재의 부산광역시)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의 사학자, 민속학자로 호는 南滄이다. 한국의 역사를 신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연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호는 태어난 마을 이름에서 딴 것이다. 서울 안암정 115번지에 거주하던 1919년 당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동년 8월 28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2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1927년 일본 早稻田大學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32년 宋錫夏·鄭寅燮과 함께 朝鮮民俗學會를 창설하고 193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 『朝鮮民俗』을 창간하고, 제2호(1934)와 제3호(1940)를 발간하였다. 1933년 延禧專門學校 강사, 1934년 普成專門學校 강사, 1945년 서울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49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문리과대학장에 재직중 6·25전쟁으로 납북되었다. 손진태는 원래 역사 연구에 뜻을 두었으나 일제강점기 역사학을 자유롭게 연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속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민속학 저술로 『朝鮮神歌遺篇』(1930), 『朝鮮民譚集』(1930),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 『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 등이 있다. 손진태는 민속학을 독자적인 과학으로 인식하고 이를 학문으로 정립시켰다. 崔南善과 李能和는 민속학을 역사연구의 보조수단으로 여겼고 문헌에만 의존하였던 반면 손진태는 현지에 나가서 일차 자료들을 수집하여 역사학은 물론 인류학·고고학·사회학 등 인접과학을 폭넓게 원용하여 민속학 연구방법의 차원을 한층 높였다. 일찍이 震檀學會의 주요 회원이기도 하였던 그는 신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해서 『朝鮮民族史槪論』과 『國史大要』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 손진태는 1900년 12월 28일 경남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에서 출생했다. 손진태는 어린 시절 마을 어른들로부터 민간에 전해지는 민담 · 설화 듣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이 훗날 손진태를 역사학자로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손진태의 집안은 상당히 가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손진태가 다섯 살이던 때 그의 집안은 가난에 쫓겨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고, 손진태의 학자금을 벌기위해 평양에서 잡화상을 하기도 했다. 힘든 가정형편에도 소학교를 마친 손진태는 다른 이의 도움으로 경성 중동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1921년 졸업했다. 당시 중동학교에서 같이 졸업했던 사람들 중에는 이훈구, 정인섭, 양주동 등이 있었다. 중동학교를 졸업한 후 손진태는 주변의 도움으로 동경 와세다 고등학원 제1부 예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는 1924년 3월 와세다 고등학원 졸업과 함께 4월에 곧바로 와세대대학 사학과에 입학했다. 와세다대학 사학과에서 손진태는 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를 만난다. 그는 니시무라 신지를 통해 인류학적 연구방법론과 민속학을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민담과 민속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손진태에게 인류학과 민속학은 상당히 흥미로웠을 것이다. 또한 손진태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에게서 실중주의 역사학을 배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27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손진태는 이전부터 자주 드나들던 동양문고의 직원으로 취업했다. 1930년 동양문고의 직원으로 근무하며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등의 도움을 받아 조선 토속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고 서양서적들도 다수 접하게 된다. 또한 이때 시라토리 등과 접촉하며 만선사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동양문고에 근무하던 손진태는 1934년 조선으로 완전히 귀국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손진태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출강하며 동양사를 강의했다. 그러던 중 1934년 9월 안암동으로 이전한 보성전문학교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1934년 안암동 이전 후 도서관을 새롭게 만들고자 했던 보성전문학교는 손진태를 새로운 도서관 사서로 고용했고 또한 문명사 강의를 맡겼다. 1937년 새로운 도서관 건물이 완공되자 보성전문학교는 손진태를 문명사 담당 전임강사직과 도서관 관장직을 맡겼다. 1939년에는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장직을 유지하며 문명사강의를 하는 교수로 승진했다. 이후 해방 때까지 손진태는 보성전문학교에서 문명사를 강의하는 교수 겸 도서관장으로 지냈다. 보성전문학교와 인연을 맺은 손진태는 주변 학자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는 1934년 진단학회가 창립할 때 참여했으며 이병도 · 김상기 · 이상백 등 와세대 출신 동문 국사학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보성전문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던 이인영, 조윤제 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문적 교류에 힘썼다. 한편 1940년대 초 무렵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손진태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이것으로 인해 용산경찰서에 소환됐지만 손진태는 굴복하지 않았고 용산경찰서 형사를 설득해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손진태가 얼마나 강하게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손진태는 보성전문학교를 떠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가 됐고 보성전문학교 시절 가까웠던 안호상이 대한민국의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자 그의 부탁에 따라 문교부 차관 및 편수국장에 취임했다. 한편 손진태는 1948년 『조선민족사개론』과 1949년 『국사대요』를 편찬하며 민족을 중심에 둔 자신의 역사관을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편수국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정기’를 흐릴 수 있다는 이유로 최남선의 책을 교과서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손진태가 민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1949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장이 되었으나 학도호국대 설치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공격을 받아 1949년 9월 사범대학장을 그만두었다. 다시 1950년 5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장을 맡았으나 그해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쳐 남으로 피난가지 못하고 삼각산에 숨어 지내게 되었다. 북한군을 피해 손진태는 상당기간 숨어 지냈으나 1950년 9월 28일 결국 북한군에 발각되어 납북됐다. 납북된 이후 손진태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북한에서 연금된 생활을 하면서도 북한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는 이후 어떤 학문적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손진태는 매우 답답하게 생각했으며, 급기야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발족날 술을 마시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고 한다. 결국 1958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손진태는 사상교육을 받고 국영농장으로 보내져 육체노동을 하다가 지병으로 1960년대 무렵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323-326쪽
  • 손진태의 학문 활동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1920·1930년대 진행했던 민속학연구이다. 손진태의 민속학에 관한 연구는 1926년을 그 시작으로 본다. 「토속여행답사기」와 「장승조사기」를 썼으며 본격적인 민속학 논문인 「조선상고문화의 연구」라는 논문을 게재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27년 와세대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더욱 왕성하게 민속학 논문을 생산했다. 지도교수였던 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에 영향 속에 온돌, 민간설화, 중국 민족의 원시신앙에 대한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1930년 손진태는 동양문고에 근무하면서 많은 자료를 섭렵하여 다양한 주제의 논문을 생산했다. 또한 1932년에는 정인섭 · 송석하 등과 함께 조선민속학회를 결성하며 민속학 연구에 매진했다. 손진태의 학문적 변화는 1934년 국내로 돌아오면서 변화한다. 1934년 귀국 이후 손진태의 학문적 관심은 민속학에서 점차 한국사 연구로 바뀌기 시작했다. 1940년대 무렵부터는 거의 한국사에 대한 연구만 진행했다. 특히 이때부터 손진태는 본인 사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민족주의사학’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해방 이후 쓴 『조선민족사개론』 서문에서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함께 새로운 입장에서 한국사를 쓰려고 계획했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귀국 이후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관장으로 재직하며 한국사에 대한 다양한 사료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성전문학교에서 주로 한 강의도 문명사였기 때문에 이전보다 민속학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도 한 가지 원인일 것이다. 해방이후 손진태는 본격적으로 신민족주의 사학을 체계화 시켜나간다. 그 대표적인 저작이 1948년 쓴 『조선민족사개론』이다. 손진태는 이 책에서 한민족의 형성과정과 민족시조 단군에 대해서 다루고 이후 각 시대별로 정치사, 대외관계, 사회 문화 등의 순으로 정리했다. 이 책을 통해 손진태는 국내외적으로 평화가 지속될 때는 민족이 발전했지만 계급알력과 지도층의 권력쟁탈이 일어나면 민족의 문화가 파괴된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민족이 발전하고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계급 알력과 권력투쟁을 제거하고 민족의 자주독립과 친선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계급갈등을 지양하고 민족 통합을 강조한 손진태의 ‘신민족주의 사학’의 내용을 잘 보여준다. 손진태가 민족 통합을 강조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한 것은 당시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전통적으로 역사를 해석했던 왕조사관의 경우 왕실중심, 지배층 중심적인 역사해석이 되기 쉽다는 약점이 있었다. 이런 왕조사관의 부당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돌파한 것이 백남운을 위시한 ‘사회경제 사학’이었다. ‘사회경제사학’은 유물사관에 기반을 두고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기존에 왕실중심. 지배층 중심의 역사해석을 깨뜨렸다. 손진태는 이런 ‘사회경제 사학’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지나치게 경제적인 부분에만 집중한 나머지 ‘우리 자신’ 즉 민족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손진태는 왕조 사관과 ‘사회경제 사학’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민족으로서 민중을 역사발전의 중심에 둔 ‘신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손진태가 ‘신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한 것은 1945년 이후 국내의 정치적 상황과 관계가 깊었다. 1945년 해방이후 한국은 좌익세력과 우익세력 간의 격렬한 대립이 이어졌다. 혼란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손진태는 평화와 화합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을 중심으로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여기에는 손진태와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안재홍과 같은 중도적 세력의 영향이 미치기도 했다. 따라서 손진태의 ‘신민족주의 사학’은 학문적으로도 중요할 뿐 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손진태의 ‘신민족주의 사학’은 이후로 변화한다. 본래 ‘신민족주의 사학’은 해방공간에서 분열된 민족을 사상적으로 통합하고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민족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48년 5·10 선거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결정되면서 손진태의 사관도 변화한다. 1948년 이후 쓴 저서들을 보면 이전까지 강조되던 대외 항쟁이나 대외관계사가 줄어들고 민족의 통합을 강조하며 권력투쟁에 대한 비판적인 언 급도 줄어들었다. 이제 각 시대 문화의 특색 등이 강조되기 시작했으며, 민족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만큼 정치적 성격이 강한 ‘신민족주의 사학’을 지양하고 민족을 긍정하고 문화사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처럼 손진태의 삶과 학문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한다. 손진태는 비록 일본 유학을 통해 학문을 배웠으나 국내로 돌아온 후에는 오히려 민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하고 혼란한 상황을 겪으면서 손진태는 민족의 화합과 통합을 위해 ‘신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했다. 비록 손진태와 그의 ‘신민족주의 사학’은 본래 목표했던 뜻을 다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손진태는 혼란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들고자 했다. 그것만으로도 손진태의 삶과 그의 학문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그의 책과 주장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은 아니다. 손진태 역시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손진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지식인’의 길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다시 손진태를 돌아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326-329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3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