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1936.04.06
인물 개인 문인
시인이다. 1956년 잡지 『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0여 년간 농촌과 장터를 떠돌며 경험한 것을 시에 담았다. 첫 시집 『농무』(1973)는 1960-70년대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삶을 그린 것이며, 『가난한 사랑노래』(1988)에는 시대의 탄압에 맞서 적극적으로 현실에 대항하며 만난 민중과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1978년 처음 집을 마련하고 길음동에 살다가 4년 뒤, 정릉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후 40년 가까이 정릉동에 살면서 『달넘세』(1985), 『가난한 사랑 노래』(1988), 『길』(1990),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 『뿔』(2002), 『낙타』(2008), 『사진관집 이층』(2014) 등 시집들을 펴냈다.
길음동 정릉동
  • [동네산책 29] 정릉에서 서른 해를, 시인 신경림
  • 신경림 시인
  • [동네산책 29] 정릉에서 서른 해를, 시인 신경림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申庚林
  • 이명칭: 신응식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문인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동방주택
  • 비고: 1978년 길음동 거주1982년 정릉동 동방주택 거주

근거자료 원문

  • 신경림은 충북 노은면, 장터 윗동네라는 뜻의 상입장上立場마을에서 태어났다. 논밭 몇 두락 건너에 동네 장터가 있었고, 시오리길 밖에는 남한강에서 가장 큰 목계나루 장이 열렸다. 어린 시절부터 신경림은 유난히 장터를 좋아했다. 할머니와 삼촌이 운영하던 국수집, 같은 반 동무들의 집에서 하는 잡화점·주막집·기름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장을 누볐다. 장날이면 장꾼들의 노래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온갖 핑계를 대고 장터로 향했다. 친구네 주막은 장꾼들로 가득 찼고, 그들에게 전해 듣는 세상이야기와 구성진 노랫가락을 듣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농한기가 되면 마을을 찾아오던 방물장수를 집으로 데리고 가 어머니를 보채어 하룻밤 묶게 했다. 그날은 동네 할머니와 아주머니들 틈에서 밤을 새며 방물장수 아낙들의 노래와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동무와 더불어 장꾼들 틈에 섞여 놀림감이 되고는 했지만, 그것이 조금도 싫지 않았던 것은, 마당에 내걸린 가마솥에서 끊는 돼지고기 국물을 한 사발씩 떠서 소금을 쳐 훌훌 마시며 그들이 들려주는 바깥세상의 얘기가 여간 재미 있는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늘 몇 사람은 뒤로 빠져 장짐을 베개 삼아 비스듬히 누워서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실상 나는 얘기보다도 그 구성진 노래들이 더 좋았다. … 농사철이 지나면 체와 빗 따위를 이고 지고 죽령과 새재를 넘어오는 아낙네들은 으레 우리 동네로 들어와 잠자리를 구했다. … 아낙네들도 콩으로 밥을 얻어먹고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동네 사람이 방 안 가득 모이면 노래 품으로라도 밥값을 하겠다면서 시집살이 노래를 몇 곡씩 내리 불렀다. - 신경림, 「 강따라 노래 찾아」- 장터를 활개 치던 개구쟁이였지만 공부도 잘하고 책 욕심도 많았다. 3학년 때 목계장터로 소풍가며 본 풍경에 감동을 받아 처음 시를 써 보았다. 이 시가 선생의 눈에 띄어 ‘꼬마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글을 제법 읽을 수 있게 된 무렵부터 용돈이 생기면 떠돌이 책장수에게 동화책과 만화책을 사다 보았고, 현덕의 동화집 『포도와 구슬』과 『집을 나간 소년』을 읽으면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오십 리 밖에 있던 읍내까지 책을 사러 가기도 하고, 읽을거리가 없을 때에는 이광수의 『흙』이나 이태준의 『사상의 월야』 같이 삼촌들이 읽다 둔 책을 꺼내 읽었다. 1948년 중학생이 된 신경림은 헌책방에서 백석의 시집 『사슴』을 보게 되었다. 공부도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하루 종일 백석의 시만 중얼중얼 읽어 댔다. 그때부터 우울하거나 답답한 마음이 들때면 시를 소리 내어 읽는 버릇이 생겼다. 문학책을 읽으면서 글로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져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로는 수업보다 문학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습작을 하며 학교 문예지에 발표한 산문 「들에서」가 현상 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글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고 문학가의 꿈을 이룬 것 같아 학교 공부에서 점점 멀어졌다. 입시 참고서 대신 열 권짜리 『도스토예프스키전집』을 읽느라 시험도 뒷전이었다. 백지를 낸 국어시험지를 본 국어 선생님 유촌은 꾸중 대신 시를 써오게 했다. 이때부터 신경림의 글을 눈여겨 본 유촌은 문학에 관심이 있던 아들 유종호에게 신경림의 시를 소개하였다. 후에 유종호는 평론가가 되고, 두 사람은 서울에서 만나 함께 지내며 문단 생활의 든든한 동료가 된다.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고 서울에 올라온 이듬해인 1956년, 시인 이한직의 추천으로《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문단에 진출한다. 이 무렵부터 본명 응식應植대신 필명 경림庚林을 사용한다. ‘應植’은 획이 촘촘해 맵시가 덜해 그와 비슷한 글자 가운데‘庚林’을 필명으로 삼은 것이다. 당시 현실은 문단 초년생이 쓴 순수 서정시의 세계와 달리 전쟁으로 인한 죽음, 가난뿐이었다. 총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물과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문학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와 민중의 삶을 고민하며 동대문과 청계천 일대의 고서점에서 이용악의 「낡은 집」, 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가난이야기」등을 찾아 읽었다. 고서점에서 만난 친구들과 만든 독서모임 ‘수요회’를 통해 정치, 사회 분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접하게 되면서 시와 점차 멀어지고, 문학에 대한 관심도 옅어졌다. 정치적 사상이 다른 지식인들을 구속하는 정부와 시대가 싫었고, 서울 생활을 버텨낼 힘도 없었다. 서울을 떠나 찾아간 곳은 사람냄새 나는 시골 장터였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시작해 공사장, 광산에서 막일을 하기도 하고, 장돌뱅이 친구를 따라 다니기도 한다. 십여 년에 걸친 떠돌이 생활과 가난의 경험, 설움이 가슴에 쌓였다. 1965년 충주 읍내에서 시인 김관식을 우연히 만나 그간 겪은 이야기를 풀어 놓으며 소외된 민중의 삶과 생각, 슬픔을 시에 담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자는 김관식에게 이끌려 정착한 홍은동 산1번지는 시골을 떠돌며 만났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시인 박봉우, 천상병, 백시걸들이 자주 찾아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을 얘기했다. 서울 올라와 처음 쓴 시 「겨울밤」(1965)은 장날을 앞두고 방앗간 뒷방에서 묵내기 화투로 회포를 푸는 장꾼들 이야기였다. ‘10년 동안에 만나고 어울려 산 사람들이 하고 싶은 노래, 하고 싶은 얘기를 대신 해준다는 생각’으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罷場」, 「 눈길」, 「 벽지」, 「산일번지」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1971년에는《창작과 비평》에 「폐광」과 「농무」를 발표한다.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 후 돌아온 고향의 광산에서 숨어 지내며 겪은 사건은「폐광」으로, 장터에서 만난 농민의 삶은「농무」에 담겼다. 1973년「농무」는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고 같은 제목의 시집이 발간된다. ‘민중시의 개막을 열었다’라는 찬사를 받은 「농무」는 ‘시가 인간의 삶을 근간으로 삼는 다는 것, 시인은 역사의 현장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민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러나 궁핍한 생활은 끝나지 않았고, 함께 가난을 견딘 아내가 세상을 떠난다. 신경림은 다시 장돌뱅이처럼 길을 떠난다. ‘삶의 뒤안길’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와 노래 속에서 우리 시대를 읽어내고 싶었다. 정처없이 떠돌았던 이십 대 때와 달리 민중들의 삶이 스며있는 민요를 찾아 남한강 일대와 충청도, 경상도 곳곳을 다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마을마다 다른 풍습을 마주하며 더 넓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웠다. 직접 발굴한 민요가락과 이야기를 쓴 「새재」, 「목계장터」, 「어허달구」 등을 모아 시집 『새재』를 펴내고, 1985년에는 민요시집 『달넘세』와 『민요기행』을 발간한다. 전국을 다니며 발굴한 민요는 지역과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된 민속으로 자료적 가치도 인정받았다. 민요를 찾아다니며 민족 문화와‘민중’에 눈 뜬 신경림은‘민요연구회’를 만들어 외래 문화를 우상처럼 쫓던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리고, 민중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앞장섰다. 군사 정권과 광주민주항쟁을 겪으며 언론을 탄압하고 국가보안법을 들어 문학인을 구속하는 부당한 처사에 소신을 굽히지 않고 맞서 싸웠고, 농민들의 터전을 앗아가는 개발 정책을 향한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경림은 잡지《교육평론》의 편집부원을 그만두며 받은 퇴직금으로 1978년 길음동에 작은 집을 마련 한다. 홍은동에서 안양으로, 안양에서 다시 서울로 이사를 다닐 때였다. 친척이 중개해 주어 허름하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마련한 것이다. 4년 뒤인 1982년, 길음동에서 정릉동의 동방주택으로 이사하였다. 2001년까지 30년 가까이 산 이 집은 조그마한 마당이 있는 단층 양옥이었다. 언덕에 있던 집이라 큰 눈이 내리면 며칠씩 집 밖으로 나가기 어렵고, 유일한 교통수단은 합승택시뿐이었다. 폭우로 불어난 물이 지하로 새어 들어가 시골에서 어렵게 녹음해 온 민요자료, 책들을 버리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정릉 집은 자신의 나이만큼 훌쩍 늙어버린 어머니와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들을 품어 주는 보금자리였다. 5월이면 담장을 휘감은 넝쿨장미가 빨간 꽃을 피웠고, 감나무, 대추나무, 어머니가 손수 키운 20~30개의 화분이 생기를 더했다. 정릉에 있는 동안 『달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목계장터』 등의 시집을 발표 한다. 한동안 민요 속에 살았던 신경림은 점점 자신의 시가 민요 형식과 가락에 매이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였고, ‘민요에서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배울 것이 없으면 배우지 말자는 생각’으로 1990년 시집 『길』을 발표하였다. 민요기행 중에 만난 수많은 마을과 사람들이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생생한 이야기 70편이 한데 묶인 시집이었다. 한편 해외여행이 자유화가 되며 1990년대에는 문학 관련 단체에서 해외 탐방 기회를 마련하였고, 우리 동포들의 삶과 노랫가락을 찾는 발걸음을 해외로 넓혔다. 국내답사와 함께 중국 길림성, 요녕성, 브라질, 남미 등지를 다녔고,『 강 따라 아리랑 따라』,『 사람 사는 이야기』같은 문학 기행집을 엮어냈다. 이밖에 작고 시인의 고향을 답사하며 시인들과 관련된 일화를 쓴 산문집 『시인을 찾아서』등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기록해 작품을 발표하였다. 시로써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로 방황도 하였지만, 민중과 민족을 대변하며 그들이 겪은 고뇌와 애환을 시에 담는 시인이 된 신경림. ‘남들이 가지지 못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내 시의 길’이라 말하는 그는 지금도 정릉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에 담고 있다. 나는 요즈음 시도 한 그루 나무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끝내 모르고 지나간다. 그래도 시는 그 자리에 나무처럼 그냥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한때는 고통스럽던 시 쓰는 일이 이제는 즐거워졌다. - 신경림, 「시인의 말」-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108-114쪽
  • 신경림 1935년 충청북도 충주 출생, 본명 신응식 1955년 동국대학교 영문과 입학 1956년《문학예술》에 시「낮달」,「 갈대」,「 석상」이 추천되어 등단 1957년 낙향하여 시골과 장터를 떠돎 1965년 한국일보에 발표한「겨울밤」으로 활동재개 1973년 시집『농무』발간 1984년 민요연구회 창설, 국내를 답사하며 민요수집 1991년 한국 민족예술인 총연합회 공동의장 199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1993년 출국금지 해제 이후 중국, 동남아, 남미 등 탐방하며 민요수집 1997년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역임 대표작품 『농무』, 『새재』, 『달넘세』, 『민요기행1,2』, 『남한강』, 『가난한 사랑노래』, 『길』, 『강따라 아리랑 찾아』, 『뿔』,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등 상훈 만해문학상(1974), 이산문학상(1990), 공초문학상(1998)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115쪽
  • 시인, 평론가이다.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가 이한직의 추천으로 실리며 문단에 나왔다. 10여 년간 농촌과 장터를 떠돌며 경험한 것을 시에 담았다. 첫 시집 『농무』는 1960-70년대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삶을 그린 시집이었다. 1970년대부터 전국의 민요를 수집하며 만난 다양한 삶의 모습을 『새재』, 『민요기행』으로 엮었다. 시대의 탄압에 맞서 적극적으로 현실에 대항하며 만난 민중과 노동자의 이야기는 『가난한 사랑노래』에 담겼다. 1978년 처음 집을 마련하고 길음동에 살다가 4년 뒤, 정릉동 동방주택으로 이사하였다. 30년 가까이 산 단층 양옥에서 『달넘세』, 『목계장터』, 『길』 등 시집을 발표하고, 기행집 『강 따라 아리랑 따라』, 『사람 사는 이야기』를 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44쪽
  • 신경림 1936~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장터를 좋아하고, 장터를 찾은 장꾼이 전해 주는 세상이야기와 구성진 노랫가락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3학년 때 처음 쓴 시가 선생의 눈에 들어 ‘꼬마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덕의 동화집 『포도와 구슬』, 『집을 나간 소년』을 읽으면서 소설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용돈이 생기면 떠돌이 책장수에게 동화책과 만화책을 사다 보았고 오십 리 밖 읍내까지 책을 사러 가기도 하였다. 책 욕심 많고 공부도 잘 하던 신경림은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로 수업보다 문학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교 공부에서 점점 멀어지기도 하였다. 신경림(본명 신응식)은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여 서울에 올라온 이듬해인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를 발표하며 문단에 진출하는데 이즈음부터 필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시는 전후 상처를 간직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정치적 사상이 다른 지식인들을 구속하는 정부와 시대가 싫었다. 시와 멀어지고 문학에 대한 관심이 옅어졌으며 서울 생활이 힘들었다. 서울을 떠난 신경림이 찾은 곳은 시골장터였다. 그렇게 시작된 십여 년의 떠돌이 생활은 1965년 충주 읍내에서 만난 시인 김관식을 우연히 만나면서 끝났다. 소외된 민중의 삶과 생각, 슬픔을 시에 담겠다는 마음이 생겼고 김관식에게 이끌려 홍은동 산1번지에 정착했다. 1971년 중학교 시절 한국전쟁 피난 후 돌아온 고향의 광산에서 숨어 지내며 겪은 사건을 담은 「폐광」, 장터에서 만난 농민의 삶을 담은 「농무」를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다. 「농무」는 1973년 만해문학상을 수상하고 같은 제목의 시집을 발간했지만, 여전히 형편은 어려웠고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다시 길을 떠난 신경림은 정처 없이 떠돌던 지난 시간과는 달리 민중들의 삶이 스며있는 민요를 찾아 전국을 다녔고 직접 발굴한 민요는 자료적 가치도 인정받는다. 민요를 찾아다니면 민족문화와 ‘민중’에 눈 뜬 그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앞장서며 군사정권과 광주민주항쟁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 싸웠다. 길음동에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마련한 4년 뒤 1982년 신경림은 정릉동의 동방주택으로 이사한다. 유일한 교통수단은 합승택시뿐이고 큰 눈이 내리면 며칠씩 집 밖으로 나가기 어려운 언덕에 있는 집, 폭우가 내려 지하로 물이 새 어렵게 녹음한 민요자료와 책들을 버리기도 한 집, 하지만 5월이면 꽃을 피우고 생기가 도는 집, 훌쩍 늙어버린 어머니와 어른으로 커가는 아이들을 품어주는 집이었다. 정릉에서 『달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목계장터』 등의 시집과 1990년에는 민요기행 중 만난 많은 마을과 사람들의 살아있는 듯한 이야기 70편이 묶인 시집 『길』을 발표하였다. 여전히 정릉주민으로 살아가는 신경림을 골목에서 불쑥 만나기도 한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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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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