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적: 경기 광천 초월 신대 41
주소: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동 262
계열과 단체: 시국담
<활동 내용>
경기도 광주군 곤지공립보통학교 4년을 졸업하고, 광주군 공립보통학교에서 5학년, 6학년을 수학하였다. 경성공립농업학교에서 1년을 수학하고, 배재중학교에 입학하여 1942년 3월 졸업하였다. 1942년 4월 경성전기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배재중학교에 재학중이던 1941년부터 金永憲과 함께 자유주의사상과 독립사상을 가졌다. 김영헌이 李光洙·李基永·宋影 등의 지도를 받아 아동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사상을 고취하겠다고 하자, 신낙현은 정치를 통하여 민중을 지도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말하였다. 1944년 6월 중순 충남 서천군 문산면 문정리 김영헌의 집에서 김영헌, 平原 등과 조선독립사상을 버리지 말고 용왕매진하자고 다짐하였다. 1944년 8월 함평여관에서 김영헌과 농촌정신대를 조직하지만 시기가 도래하면 이를 역이용하자고 협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東條수상이 일본군이 사이판도에서 전멸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고 전시상황을 알리고 일본의 패망시의 결정적 기회가 오기를 준비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45년 4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구류 29일, 2년 집행유예의 처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특이사항>
창씨명은 平川洛鉉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2, 1118쪽
<독립운동사자료집> 12권 1118쪽에는 주거지가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정 69번지의 27호"로 기록되어 있고,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주소지가 "서울 돈암 69"로 표기되어 있다. (수정일 2020.6.3)
본적지 "경기 광천"은 "경기도 광주군"의 오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