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1930.08.18 - 1969.04.07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교육가
시인이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이라는 필명으로 쓴 장시(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등단하였다. 대학 졸업 후 돈암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헌책방을 차려 생계를 꾸린다. 인병선과 결혼 후 건강악화를 이유로 낙향했다가 1960년 서울로 올라와 다시 돈암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2년 후 동선동 5가 45번지에 작은 한옥으로 이사하였다. 4.19혁명의 정신을 되새긴 「껍데기는 가라」(1967)와 동학농민운동을 주제로 한 장편 서사시 「금강」(1967) 등을 통해 한민족 고유의 역사인식과 민족애,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로 읊었다.
돈암동
  • 집 앞 코스모스 앞에 선 신동엽
  • 마루에서 기타를 치는 신동엽
  • 신동엽 단국대학교 졸업사진(1)
  • 신동엽_계룡산 여행에서
  • 신동엽_부소산에서 백마강을 배경으로
  • 신동엽_제주도 한라산 등반(1)
  • 신동엽_제주도 한라산 등반(2)
  • 신동엽
  • 신동엽_집 앞에서 노제를 지내는 모습 (1)
  • 신동엽_전주사범학교 친구들과 함께
  •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초고 노트
  • 신동엽의 문학적 체취가 담긴 노트와 메모(1)
  • 신동엽의 문학적 체취가 담긴 노트와 메모(2)
  • 신동엽의 문학적 체취가 담긴 노트와 메모(3)
  • 신동엽의 문학적 체취가 담긴 노트와 메모(4)
  • 신동엽과 어머니, 누나 신동희
  • 신동엽 어린시절
  • 신동엽 단국대학교 졸업사진(2)
  • 금강가에 선 신동엽과 인병선
  • 군복무 시절 신동엽
  • 신동엽과 인병선의 결혼식(1)
  • 신동엽과 인병선의 결혼식(2)
  • 신동엽_글벗들과 함께
  • 명성여고 문예반 학생들과 신동엽
  • 신동엽의 첫시집 『아사녀』 출판 기념회
  • 등산을 즐긴 신동엽
  • 신동엽_집 앞에서 노제를 지내는 모습 (2)
  • 신동엽_집 앞에서 노제를 지내는 모습 (3)
  • 성북구 동선동 집 앞에서_신동엽의 자녀들
  • 1959년 신동엽이 인병선에게 보낸 엽서(1)
  • 1959년 신동엽이 인병선에게 보낸 엽서(2)
  • 신동엽 시집 『아사녀』 표지
  • 신동엽 시집 『아사녀』 출판 기념회 초대장
  •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 초고
  •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 초고 일부(1)
  •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 초고 일부(2)
  •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 초고 일부(3)
  • 오페라타 <석가탑> 악보
  • 오페라타 <석가탑> 팜플렛 표지
  • 오페라타 <석가탑> 초고(1)
  • 오페라타 <석가탑> 초고(2)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29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 5가 45번지 (아리랑로4가길 13)

근거자료 원문

  • ○ 성북인의 목소리 일곱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7년 1월 『52인 시집』에 수록된 신동엽의 작품입니다. 신동엽은 한국전쟁 이후 돈암동에 거주했던 성북구의 대표적인 시인이지요. 「껍데기는 가라」는 반제국주의와 분단 극복의 단호한 의지가 응집된 시로 발표 당시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참여시의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 이육사의 「절정」에 닿아 있는 기념비적 저항시로 평가받고 있지요. 중립의 초례청에서 아사달과 아사녀가 혼례식을 치르는 것은 분단 극복, 곧 통일이라는 시인의 간절한 소망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 작품에서 시인은 동학농민운동과 4·19혁명이 지닌 반봉건 내지 반제국주의를 분단 극복의 역사적 과제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34-135쪽
  • 시인이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쓴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문단에 진출한다. 대학 졸업 후 돈암동에서 자취를 하면서 헌책방을 차려 생계를 꾸린다. 이때 만난 아내 인병선과 1957년 혼인하지만, 건강 악화로 낙향하였다. 1960년 서울로 올라와 다시 돈암동에 집을 마련한다. 2년 후 동선동 5가 45번지에 작은 한옥으로 이사한다.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와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한다. 4ㆍ19를 경험한 이후 사회 참여의식과 민중의식을 강한 어조로 작품에 담고 동학과 3ㆍ1운동의 정신을 작품에 담았다. 그러나 작품 활동을 한 지 십 년도 되지 않아 동선동 집에서 마흔 살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뜬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41쪽
  • 신동엽(申東曄) 1930-1969 시인. 충남 부여 출생. 1959년 장시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에 입선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1년부터 명성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1963년에는 첫 시집 『아사녀阿斯女』를 발표했다. 작품으로 「껍데기는 가라」(1967), 『금강』(1967),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79) 등이 있다.
  • ‘민족시인’으로 불리는 신동엽은 1930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우등상을 타고,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머리가 좋았다. 1948년 전주 사범학교를 나온 뒤 상경하여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학창시절 금강을 바라보며 시를 생각한 소년은 20여 년 뒤 역사와 민족의식을 작품에 담아낸 시인이 되었다. 언젠가 부우연 호밀이 팰 무렵 나는 사범학교 교복 교모로 금강 줄기 거슬러 올라가는 조그만 발동선 갑판 위에 있은 적이 있었다. 그때 배 옆을 지나가는 넓은 벌판과 먼 산들을 바라보며 '시'와 '사랑'과 '혁명'을 생각했다. 신동엽,<서둘고 싶지않다> 동아일보, 1962.06.05 1953년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향 선배를 도와 돈암동에 머물며 서점 일을 하였다. 돈암동 네거리에 있던 서점에서 허름한 군복 잠바를 걸치고 일하던 청년은 변변한 직장도 돈도 없었지만 눈빛만은 밝게 빛났다. 돈암동에 살며 서점을 오갔던 이화여고 3학년생 인병선은 그 눈빛이 좋아 신동엽과 교제를 시작했고, 두 사람은 1957년 혼인을 하게 된다. 서로‘석림’, ‘추경’으로 불렀는데, ‘경’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시는 모두 아내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결혼 후 고향 부여로 내려간 이듬해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가 된다. 부여 읍내에 이화양장점을 열고 생계를 책임지던 부인의 짐을 덜 수 있어 반가운 일이었지만, 건강 악화로 곧 그만두게 된다. 아픈 몸으로 다시 부여로 돌아가 갓 태어난 아기와 아내를 돈암동 처가로 올려 보내고, 요양을 하며 독서와 글쓰기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1959년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쓴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신춘문예 입선작으로 뽑힌다. 아픈 남편과 떨어져 걱정과 그리움 속에 살던 아내는 작품이 나온 신문을 들고 돈암동 집 뒷산에 올라 한참을 울었다. 시가 발표된 후 1960년에 돈암동 고지대의 작은 단칸방을 얻어 그리워하던 가족과 함께 살림을 꾸린다. 돈암동 시절 시인 안도섭과 대하소설 「휴전선」으로 유명했던 박봉우 시인도 근처에 살았는데, 그들과 함께 어울려 다닐 때가 많았다. 이후식구들 사이에서 ‘동원네 집’으로 통하던 작은 집과 개천가에 있던 집 등 서너 군데 셋방을 전전하였다. 사범학교를 졸업했던 신동엽은 자신의 작품을 들고 명성여고 교장을 찾아갔다. ‘내 작품을 읽고 국어교사로 쓸 만하면 써 보시오’라며 작가로서 자신감을 내 비쳤고 1961년부터 명성여고에서 국어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 1962년에는 돈암동(현재 동선동 5가 45번지)에 25평짜리 자그마한 한옥을 마련하였고 생활도 점차 안정되어 갔다. 이 집에서 장편서사시 「금강」과 「껍데기는 가라」등 대표작을 집필하였다. 우리 식구가 문간방 아닌 안채를 차지하고 살 게 된 건, 즉 집을 마련한 것은 내가 대여섯 살 되던 무렵이었다. 역시 돈암동에 자리한 25평짜리 자그만 한옥이었는데, 7년 후 아버지는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아무렇든지 이 집에서 우리의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갔고, 막내 동생 우섭이 태어났으며, 난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손수 뜨개질과 바느질로 우리의 옷을 지어 입히시고, 마당에 화초를 가꾸는 등 집안 구석구석에 알뜰한, 더없이 가정적인 분이었다. 아버지는 낮 동안 안방에서 글을 쓰시고 오후엔 명성여고에 국어 선생님으로 나가셨다. 신정섭(신동엽의 딸),「대지를 아프게 한 못 하나 아버지 얼굴가에 그려넣고」 ‘우리의 검은 땅을, 그리고 그 평야에서 ‘인간정신’을 찾으려고 노력하라’던 신동엽은 한민족 고유의 역사인식과 민족애,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민중의 저항의식을 시로 읊었다. 1960년 4.19혁명을 겪은 뒤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시를 쓰기로 마음 먹는다. 함성과 열기로 가득한 거리를 배회하며 4.19혁명을 온몸으로 느낀 생생한 경험이 장편서사시 「금강」의 시작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쓴 최초의 작품인 「금강」은 ‘우리 민족사에서 순간이나마 가장 환한 섬광이 반짝인 것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었다’고 말한 작가의 신념이 담긴 작품이었다. 단 석 줄의 시도 읽지 않는 민중에게 어떻게 그 길고 긴 시를 읽히느냐, 하는 것이 고민이다. 그래서 나는 시중 생활어를 쓰고 스토리도 교향시극처럼 엮기로 했다. 완성을 하기까지 6년 동안 명성여고에 나가는 것 외에 돈암동 집에서 온전히 글을 쓰는 데 몰두했다. 역사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그곳에 서린 아픔과 아름다움을 노트에 기록하고 26장 7천 행에 달하는 시로 담아냈다. 같은 해 발표된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에서도 동학농민운동과 4.19혁명의 역사인식과 참여정신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나도 내 인생만은 조용히 다스려 보고 싶다. … 그날이 와서 이 옷을 벗을 때까지 산과 들을 바람결처럼 흘러가는 것이다”라던 신동엽은 건강악화로 1969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돈암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난다. 신동엽은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으로 시대를 함께 겪었고, 신경림과 조태일 등 민족문학을 전개하는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십 년 동안 「금강」, 「껍데기는 가라」, 「아사녀」등 70여 편의 시와 시론詩論을 남긴 신동엽은 우리 민족의 정신과 삶을 담은 울림으로 아직까지 우리 곁에 남아있다.
  • 신동엽申東曄은 1930년 8월 18일에 출생하여 1969년 4월 7일에 작고한, 한국의 현대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충청남도 부여 출생으로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여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당선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329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67년-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발표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3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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