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1891.12.30 - 1965.03.01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학자
인물 개인 정치인
인물 개인 언론인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사학자, 언론인이다. 그는 191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11년 9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고, 10월 조선인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였다. 1914년 여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임시정부의 연통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귀국 후 『시대일보』 와 『조선일보』에서 약 10년 동안 언론인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돈암동 산 11-152번지에서 거주하였다. 미군정기에 민정장관을 역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65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돈암동
  • 안재홍 사진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안재홍(1)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안재홍(2)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안재홍(3)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안재홍(4)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안재홍(5)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안재홍(6)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안재홍
  • 안재홍 집터

기본정보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891.12.30 - 1965.03.01
  • 비고: 6.25전쟁 당시 납북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산 11-152

근거자료 원문

  • 되새겨진 民族(민족)의悲劇(비극) 6.25때 괴뢰에 피랍되었던 민세 안재홍(75)씨가 이북땅에서 서거했다는 소식에 접한 서울 돈암동의 유족들은 유해없는 빈소 앞에서 새삼 민족의 비극을 되새기며 오열속에 밤을 새웠다. 2일 비보를 들은 납북인사 고권삼(전 동국대학교수)씨 부인등 4명의 피납인사 가족들도 안씨집에 들러 미망인 김부례(57) 여사를 붙들고 우리도 꼭 같은 꼴이 될 것 이라면서 통곡했다. 민세의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부례 여사가 남편이 물려준 집 돈암동 산 11의 152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고 외아들 안정용(51무) 씨가 영찬(27. 대학생)군 등 8남매를 데리고 동교동 5의 82호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으며 딸 서용(41)여사는 원효로에서 지내고 있다. 아버지는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임이 분명했다고 말하는 아들 안씨는 술도 담배도 모르는 그 분은 항상 생활이 근엄했고 틈만있으면 역사책을 읽고 사색하는 우국지사였다고 아버지의 모습을 그렸다. 판문점에서 남북이 만난다는데 그 자리를 통해 그분의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다면 미망인 김여사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길건너 탑골승방에서 당신의 건강과 남북통일을 빌기를 10년. 그의 몸부림은 애처롭기만 했다. 김 여사에 의하면 사변이 나던 해 6월 27일 성북서를 통해 피난가라는 통보를 받고 민세는 친지를 찾아다니며 피난을 권유하다가 자신은 도강의 기회를 놓치고 회현동 등 친지집을 전전하다가 돈암동 성북서 옆의 사촌동생 안재학씨 집에 숨어있었다 한다. 수복을 이틀 앞 둔 9월 26일 사돈 뻘 되는 권 모의 배신으로 괴뢰 정치 보위부원들에게 붙잡혀 정치보위부본부로 사용되던 돈암동 집에 끌려왔을때는 군정때 법무부장 김용무씨와 조소앙 씨등 7명의 인사가 이미 안씨집에 끌려와 감시를 받으며 방에 앉아있었다고. 이들은 시내 여러 곳을 끌려다닌 끝에 함께 검은 휘장을 두른 괴뢰 정치 보위부 소속 검은차에 실려 미아리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압송됐다. 이때 끌려가면서 안씨는 뒤쪽 창문을 통해 부인을 내다보며 손짓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미망인 김여사는 그 순간을 되씹으며 눈물지었다. 아들 안정용씨는 일전에 중공 땅에서 부모를 데려다 모신 차장관이 한없이 부러웠다면서 하루 속히 이런 비극이 다시 없기를 기원했다 경향신문 1965. 3. 3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088
  • ­ 이때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주요 단원이 민세 안재홍입니다. 언론인으로도 긴 시간 일했던 그는 독립 활동으로 7차례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돈암동에 거주했으며 납북된 이후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기억해야 할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53쪽
  • ○ 6˙25전쟁의 발발과 납북된 독립운동가들 -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조헌영 등 독립운동가로, 건국 요인으로 활동했던 성북인들 또한 전쟁 중 납북을 당합니다. 이로 인해 납북 후 그들의 삶은 물론 지난 일제강점기 당시의 업적들까지도 자세하게 알 수 없게 됩니다. 기록의 단절은 곧 후세의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공백이 되는 것과도 같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30쪽
  • ○ 건국을 준비한 좌우합작 단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국내에서도 나름대로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동맹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지요. 조선건국동맹이 사회주의 계열이었던 것과 달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좌우합작 단체로 좌파는 여운형, 우파는 안재홍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다음 단계의 정부수립을 기하는 준비기관’을 표방하고 충칭의 임시정부가 환국하여 정부로 행세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습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국의 간섭에 앞서 하루라도 빨리 건국을 선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고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합니다. 한편 안재홍은 민족주의 세력의 주도권을 확보해 건국을 주도하려고 하지만 의도와 달리 공산주의 세력이 독주하며 건국을 선포하자 충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건국정부 수립방안을 제시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탈퇴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4쪽
  • ○ 국외가 아닌 국내에, 임시가 아닌 정식의 정부가 수립되다 - 5·10총선 때 참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 세력은 2년 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대거 참여합니다. 그 결과 임시정부에서 일본과 맞섰던 조소앙, 장건상, 안재홍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됩니다. 조소앙은 성북구에서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로, 장건상은 부산에서 출마해 조소앙에 이어 전국 2위의 득표를 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9쪽
  • ○ 민족유일당 신간회와 성북인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청년외교단으로 활동했던 안재홍 역시 신간회의 총무간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직을 겸하면서 조선민중대회를 열고 일본의 민족 차별적 처우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67쪽
  • ○ 우리말을 연구한 조선어학회 - 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조직인 청년외교단과 신간회 활동을 했던 언론인 안재홍은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돼 옥고를 치른 바 있습니다. 1942년 수감된 그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콘크리트 감방에서 100여 일 동안을 서서 지내는 고문 등으로 고된 감옥살이를 하다 감옥 안에서 조국의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91-92쪽
  • ○ 해방 이후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안재홍 - 식민사관에 저항한 주체적 사학자 - 1891~1965 / 대통령장 / 돈암동 산 11-152 거주 - 시대일보 이사와 조선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임시정부의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으로 활동했으며 신간회 총무간사로도 활약했습니다. 역사저술을 통해 민족정신을 알리고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건국에 앞장섰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20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2년-안재홍 도쿄에서 조선유학생 학우회 조직 1919년-안재홍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활동 중 체포 1927년-안재홍을 중심으로 한용운, 최익환, 조헌영 등 신간회 활동 참여 1929년-안재홍 신간회 광주학생사건 진상보고 민중대회 사건으로 투옥 1942년-안재홍 조선어학회의 조선어편찬사업에 연루 수감 1946년-안재홍 비상국민회의와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활약 1950년-조소앙, 장건상, 안재홍, 조헌영 등 국회의원 당선. 조헌영,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손진태 등 주요인사 대거 납북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13쪽
  • ○ 성북구의 월·납북 인사 - 안재홍(安在鴻, 1891~1965, 돈암동 거주) ㆍ1950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ㆍ1950년 9월 21일 납북 ㆍ1965년 3월 1일 평양에서 사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48쪽
  • 본적: 경기도 평택 주소: 돈암동(납북) 계열과 단체: 청년외교단 <활동 내용> 1912년 일본 동경(東京)에 거주하던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朝鮮留學生)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3년 1월 일본 조도전(早稻田) 대학에 재학중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지령에 따라 서울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고 총무를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월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주필로 재직하고 있을 때 신간회(新幹會)의 총무간사에 피임되어 강령을 작성하고 발표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연 등을 실시하면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8년 12월 전남 광주(光州)에서 학생운동이 봉기되자 당시의 정치단체인 신간회와 협동하여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있으면서 조선민중대회(朝鮮民衆大會)를 열고 일제의 민족차별적인 처우를 규탄하다가 체포되어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되었다. 1937년 5월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 학생모집 운동으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고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3월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착수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되어 함경남도 홍원(洪原) 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민의원 의원 등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다가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마지막에서 두번째 문장의 '군정장관'은 '민정장관'의 오기이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9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