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1897.08.30 - 1963.03.14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언론인
소설가이다. 1921년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문학으로 평가받는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개벽』 에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삼대』, 『만세전』 등 식민지 현실과 반일감정을 작품 속에 그려냈고, 해방 후에는 좌·우익에 치우치지 않고 사실주의 문학을 선보였다.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10여 년 동안 만주와 신경에서 생활하였다. 1946년 귀국한 후 경향신문 창간 편집국장을 지냈다. 돈암동 295-3번지에 살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서울로 올라와 상도동, 삼양동 등 몇 차례 이사를 한 끝에 1962년 자리 잡은 성북동 145-52번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돈암동 성북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45-52

근거자료 원문

  • 1925년 프로문학이 처음으로 기치를 들고 나설 때에 橫步(횡보)는「계급문학을 논하여 소위 신경향파에 여함」이라는 논문을 십여회에 걸쳐서 조선일보 학예면에 실어 프로문학을 조롱하였고 여기에 대해서 회월이 「신흥문학의 이론적 근거를 논하여 廉想涉(염상섭)군의 무지를 박함」이라는 답변을 써서, 좌우익의 논쟁이 이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두 파 외에 노풍, 무애 같은 절충주의를 제창하는 사람도 있어서 세력은 미약했지만 이 절충파를 합해서 문단은 3파로 갈려 있는 느낌이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68
  • 作家廉尙燮(작가염상섭)씨永眠(영면) 14일 자택에서 직장암(直腸癌)으로 우리나라 문단의 원로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 필명(筆名)=상섭(想涉)·서울 성북동 145의52)씨가 14일 상오9시 서울시내 성북동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65세. 그는 지난 11일 「메디컬 센터」에 입원했다가 이날 아침 8시 30분 자택으로 퇴원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둔 염씨는 일본 경응(慶應)대학 문과를 다녔다. 문단활동을 통해 염씨는 “해바라기”, “만세전(萬歲前)”, “사랑과 죄”, “모란꽃 필 무렵”, “일심(一心)”, “삼대(三代)”, “미망인(未亡人)”, “취우”, “부부(夫婦)” “짖지 않는 개”등 장편 18편과 수많은 단편을 남겼다. 또 횡보(橫步)는 경향신문초대편집국장을 비롯하여 조선일보주필겸 편집국장 서라벌예술대학학장 등을 역임했고 서울시 문화상과 자유문학상도 받았었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여 자기의 옆걸음질을 따서 「횡보(橫步)」란 호를 지었던 그는 말년에 예술원회원으로 적빈생활을 했었다. 『경향신문』 1963. 3. 14.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83
  • 우리 문학유산을 찾아 (16) 횡보 염상섭 말년 보낸 성북동 자택 작고 3년 뒤 개축…자취 찾을 길 없어 문학사 중요한 위치 불구 기념비조차 안세워 올 탄생 100년 …생애·작품세계 재조명 시급 올해는 우리문단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쓴 橫步(횡보) 廉想涉(염상섭)(1897-1963·본명 尙燮(상섭))이 태어난지 꼭 100년 되는 해. 횡보는 채만식과 더불어 리얼리즘 문학의 양대 봉우리로 평가받고 있다. 1921년 「개벽」에 「표본실…」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그는 「만세전」 「삼대」 「이심」 등의 소설을 통해 일제 식민지하의 우리나라 상황을 가장 날카롭게 포착했다. 횡보는 민족의 수난을 정신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선택했으며 삶의 핵심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리얼리즘에 착안함으로써 한국소설의 한 장을 개척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삶은 술과 글만을 벗하고 살았던 쓸쓸한 것이었다. 횡보가 우리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그 흔한 기념비나 동상 하나 세워지지 않은 것도 안타까운 감을 더해준다. 횡보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그가 태어난 곳은 구한말 「띳굴」이라 불렸던 서울의 중심지역. 「띳굴」의 현재 지명을 두고 연구서마다 필운동이니 수송동이니 해석이 달랐으나 서울시청에 확인한 결과 종로구 적선동인 것으로 드러났다. 생가의 정확한 주소는 유족조차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횡보의 생애를 연구한 서울대 金允植(김윤식)교수는 족보까지 뒤져봤으나 주소가 지재돼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방에 비해 모습이 급격하게 변한 서울에서 100년 전의 자취를 찾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함께 횡보가 유난히 거주지를 자주 옮겼던 것도 유품이나 유물이 전무한 이유 중 하나다. 젊은 시절 일본을 자주 오가며 외국문물을 익힌 횡보는 마흔살 되던 해 가독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10년간 타지생활을 했다. 해방을 맞아 38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온 그에게는 말 그대로 딸린 입과 부엌살림도구밖에 없었다. 둘째딸 喜英(희영)씨(58)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횡보가 귀국 후 곧바로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내던 시절의 이야기다. 창산선물이었는지 연말이라 그랬는지 하여간 신문사에서 고구마 한 궤짝을 보내왔습니다. 고구마를 아껴 먹고 난 뒤 궤짝을 밥상으로, 책상으로 요긴하게 썼습니다.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선집 출판을 위해 애쓰기는 커녕 원고조차 정리해두지 않았을 만큼 세상일에 초연했던 횡보. 서울로 돌아온 뒤 틈틈이 쓴 글조차 6.25전쟁통에 상당부분 유실됐고 상도동에서 삼양동으로, 삼양동에서 성북동으로 이어졌던 이삿짐 행렬 속에서 나머지 원고마저 사라졌다. 그가 말년을 보낸 곳은 성북구 성북동 145-52. 직장암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2년 여간 살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은 3통 3반이라는 꼬리표만 붙어있을 뿐 옛날 주소 그대로 쓰이고 있다. 스카이웨이를 뒤로한 성북동 골짜기의 고불고불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홍익대부속중 정문에서 5분 거리에 횡보가 임종한 집이 나타난다. 84평 대지에 조경이 잘 된 2층 양옥집. 현재 이집에 살고 있는 具京會(구경회)씨(60)는 11년 전 이 집으로 이사왔다고 한다. 당시 전주인은 지은 지 20년 된 집이라 했다는 것. 그렇다면 횡보가 사망한 해로부터 3년 뒤 개축한 집이라는 얘기다. 몇 해 전 출판사인가 방송사에서 찾아와 이 집에 염상섭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뿐 이사올 때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이집 안주인의 말이다. 횡보는 150여 편의 소설과 100여 편의 평론, 수필 50여 편 등 500여 편의 글을 남겼다. 분실된 원고가 그토록 많다고 하니 질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나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문학세계를 짐작케 한다. 원고를 쓸 기력이 없었던 노년에도 횡보는 딸이나 아들에게 구술해 대필하도록 했을 정도다. 그는 다작을 하면서도 등장인물의 이름을 고르기 위해 이웃 동네의 문패를 일일이 살피며 항렬까지 신경쓸 만큼 세심한 작가였다. 金(김)교수는 풍부한 어휘와 꼼꼼한 기술, 객관적인 시각에 있어 그를 따를 만한 작가가 없다고 말한다. 특히 서울 토박이 언어로 30년대 중산층 생활을 그린 「삼대」는 어떤 역사서나 논문보다도 가치있는 기록이라는 설명이다. 「횡보」라는 호가 말해주듯 세상과 쉽사리 타협하지 않았던 문인, 임종직전 정종 세 숟가락을 마신 후에야 편안히 눈을 감았던 酒仙(주선),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촌지에 지나칠 정도로 결벽했던 신문기자. 30, 40년대 문학유산을 올바르게 정리하는 한편 그의 작품세계를 보다 많은 독자에게 알린다는 의미에서라도 문학상 제정이나 문학관 건립 등을 통한 염상섭 문학의 재조명이 시급한 실정이다. <박신연 기자> 『경향신문』 1996. 7. 28.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90
  • 1897-1963 서울 출생. 1921년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문학으로 평가받는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개벽》에 발표하며 등단한 소설가이다. 「만세전」과 「삼대」 등 식민지 현실과 반일감정을 작품 속에 그려냈고, 해방 후에는 좌·우익에 치우치지 않고 사실주의 문학을 선보였다. 변영로, 오상순 등과 《폐허》의 동인同人으로 신문예운동을 전개하였다. 술을 좋아해 술에 취해 옆으로 걷는다는 뜻의 ‘횡보橫步’라고 불렸다.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10여 년 동안 만주와 신경에서 생활하였다. 해방이 되어 1946년 귀국하였고, 정지용의 권유로 그가 주간이던 경향신문 창간 편집국장을 지냈다. 돈암동 295-3번지에 살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서울로 올라와 상도동, 삼양동 등 몇 차례 이사를 한 끝에 1962년 자리 잡은 성북동 145-52번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9쪽
  • 소설가. 서울 출생. 1920년 《폐허》의 동인으로 참여하며 문단활동을 하였다. 1921년 《개벽》지에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로 꼽히는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였고, 1946년에는 《경향신문》 창간과 함께 편집국장을 지냈다. 작품으로 『만세전』(1924) 『삼대』(1931) 등이 있다.
  • 1937년 만주 신경新京에서 발행 된 조선족 유일의 한글신문이었던 《만선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초빙되면서 10여 년 간을 만주와 신경에서 보낸 뒤, 1946년 6월 서울에 돌아와 돈암동 295-3호에 자리를 잡았다. 38선을 넘어 귀국할 때 살림살이를 다 정리한 채 피난민처럼 내려와 변변한 옷가지도 없이 빈 손이나 마찬가지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가구도없어 신문사에서 선물로 보내온 고구마 한 궤짝을 아껴먹고 난 뒤 그 궤짝을 밥상으로, 책상으로 쓸 정도였다. 그러나 서울에 돌아온 것을 세상에 알리기라도 하듯 전세집 문 밖에‘廉尙燮’이라는 문패를 걸어 두었다. 1946년, 경향신문 주간을 맡고 있던 시인 정지용은 돈암동 이웃에 살고 있던 소설가 김동리를 찾았다. 신문사 편집국장 경력이 있는 염상섭이 귀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염상섭과 교류가 있던 김동리에게 부탁을 하러 간 것이다. 김동리와 정지용의 주선으로 염상섭은 경향신문 초대편집국장이 되었고, 후에 정지용은 김동리에게 쇠고기 두 근으로 감사표시를 하였다. 돈암동에서 생활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9.28 서울 수복이 되자 해군에 입대하였고, 전쟁 중에도 집필을 계속하여 조선일보에 1952년 7월부터 1953년 2월까지「취우驟雨」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제대 후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라벌예술대학의 초대학장이 된다. 그러나 이름뿐인 학장이었고, 집필에 치중하였다. 병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제야除夜」, 「무화과無花果」, 「모란꽃 필 때」, 「미망인」등 장편 26편, 단·중편 150여 편, 문학평론 100여 편 등 470여 편의 글을 남겼다. (중략) 충정로, 돈암동, 상도동, 삼양동, 성북동 등지를 옮겨 다닌 그는 1963년 3월 2년 간 살던 성북동 145-52번지에서 직장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염상섭 주소: 성북동 145-52 분야: 문학(소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 ○ 일본 유학 중이던 염상섭의 ‘오사카 독립선언서’ 한편 3·1 독립선언서는 일본의 유학생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 횡보 염상섭이 있습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 『만세전』 등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사회상을 반영한 소설로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소설가이지요. 그는 해방 이후 성북구 돈암동과 성북동에 거주한 바 있습니다. 일본 장교로 복무한 형을 둔 그는 일찌감치 남부러울 것 없는 일본 유학 생활을 했으나 2·8 독립선언서, 3·1 독립선언서에 잇따른 영향을 받고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크게 고뇌합니다. 결국 1919년 3월 19일 거사를 치르기로 계획한 그는 오사카에서 단독으로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독립 시위를 도모합니다. 이로 인해 염상섭은 3개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가 적국 일본에서 홀로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은 3·1운동사와 그의 생애에 있어 나름의 큰 의미를 갖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45-46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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