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덕
1897.11.19 - 1986.10.20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안암동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897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 127번지(현 성북구 안암로9가길 57, 49, 59)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과 철원애국단에서 활동했으며 애국단 대표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1923년 이른바 '김시현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폭탄밀반입시도로 김시현이 경찰에 쫓기고 있을 때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같은 해 한성은행에서 근무하던 중 의열단원 구여순(具汝淳)의 한성은행 자금 탈취를 도와주려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안암동
  • 오세덕 집터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57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7-1~3 (안암로9가길 57, 49, 59)
  • 비고: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 127번지

근거자료 원문

  • ­ 대동단원들 중에는 주목해야 할 성북구의 독립운동가들이 꽤 많습니다. 의열단의 숨은 조력자로 알려진 오세덕, 임시정부의 요인이자 독립군양성에 헌신했던 김의한, 김의한의 아내이자 역시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여성 계몽운동에 힘썼던 정정화 등 모두 독립운동에 있어 큰 활약을 했던 성북인들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52쪽
  • ○ 성북구 출신 독립운동가 오세덕 - 의열단의 숨은 조력자 - 1897~1986 / 애국장 / 안암동 127번지 출생 - 1919년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과 철원애국단에서 활동했으며 애국단 대표로 상하이로 파견됐습니다.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해 철원군 연통제 조사원으로 임명됐으며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는데 협조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이른바 ‘김시현 사건’, ‘구여순 사건’ 등 의열단의 활동을 지원하며 옥고를 치렀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5쪽
  • ○ 의열단의 숨은 조력자 오세덕과 저항의 은신처 성북구 - 오세덕은 같은 의열단원인 구여순의 한성은행 습격계획을 도와주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릅니다. 그는 또한 의열단원 김시현의 은신처로 자신의 집을 내어주기도 합니다. 김시현은 의열투쟁을 위해 중국으로부터 폭탄과 권총 등을 반입해 오는데 일본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오세덕의 집에 숨어 지내게 되지요. 오세덕은 의열단의 ‘숨은 조력자’였던 셈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61쪽
  • ○ 임시정부를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 - 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세력이 갈려 큰 논쟁이 붙습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고 주장하고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문제들을 점진적으로 고쳐나가자고 주장합니다. 이때 오세덕과 장건상은 신채호가 대표적인 인물로 있던 창조파로 활동합니다. 앞서 소개한 의열단의 숨은 조력자 오세덕은 우리나라로 돌아가 의열단을 본격적으로 돕기 앞서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바 있었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81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23년-오세덕 상하이에서 귀국 후 의열단 지원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1쪽
  • ㆍ1897년 안암동 127번지 출생(거주) ㆍ1922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주비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독립운동 선상에 불화가 일어나자, 오세덕은 노령(露領)으로 가서 문창범·오창환과 같이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하는 데 협조 ㆍ1923년 한성은행에서 근무하던 중 의열단(義烈團)에서 파견된 구여순(具汝淳)의 방문을 받고 군자금 모집에 협조할 것을 약속, 오세덕은 한성은행 각 지점에서 본점으로 연말 송금이 있음을 알고 이를 습격하여 탈취할 계획을 세웠으나, 구여순이 사전에 체포되어 이러한 사실이 탄로됨으로써 그도 일본 경찰에게 체포 ㆍ1923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ㆍ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01쪽
  • 안암동 출신인 오세덕은 1923년 서울의 한성은행에서 근무하던 중 의열단원 구여순(具汝淳)의 한성은행 습격계획을 도와주려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본적이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 127번지이다.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철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8월 강대여 신원균 박건병 등과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였고 1919년 10월 “대한민국 정부 성립 축하회 선언서” 배포하여 제2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박건병과 함께 애국단 대표로 상해로 파견되어 동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강원도 철원군 조사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그는 김가진이 단장으로 활동한 대동단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변혁을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그는 창조파로 활동하였다. 1923년 奉天에서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된 그는 한성은행에서 근무하던 중 의열단원 구여순(具汝淳)의 한성은행 자금 탈취를 도와주려다가 체포되어 징역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80년 건국포장으로 훈격이 상향되었다. 1990년 훈장체계 변경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조정되었다.
  • 본적: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 127번지 주소: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 127번지 계열과 단체: 철원애국단, 의열단 <활동 내용> 1919년 8월 강원도 鐵原郡 철원읍내에서 김상덕 등과 협의하여 鐵原愛國團(일명 “大韓獨立愛國團”)을 조직하고 同團의 대표로 朴健秉과 협의한 후 철원군 읍내 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상해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위하여 박용만의 조카 朴健秉과 함께 상해로 갔다. 1919년 11월 義親王을 비롯한 33인의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이후 鐵血團을 조직하고 상해임시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北京에서 朴容萬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러시아로 가서 고려공산당대회에 참석하였다. 1922년 러시아로 가서 무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제21시베리아보병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중국 奉天에서 서울로 돌아와 다시 해외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의열단 활동을 위하여 동경에 유학하려 하였으나, 부친의 만류로 중단하였다. 1923년 12월 義烈團員 具汝淳이 상해에서 국내로 들어왔을 때 同人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독립자금 모집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 계획으로 보천교의 자금과 한성은행 각 지점에서 본점으로 송금되는 자금을 탈취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여순이 사전에 체포되어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오세덕도 체포되었다.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大正8年制令第7號違反으로 懲役 1年을 받았다. <특이사항>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참고문헌>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24. 1. 25, 1924. 2. 28 檢察行政事務에 關한 記錄 1의 의열단원 검거의 건 속보:1923. 12. 26 매일신보:1920. 11. 20·21, 1924. 2. 5·15·16·24·29, 6. 3 독립유공자 공훈록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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