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창
1864.07.15 - 1953.04.16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서예가
독립운동가, 서예가, 언론인이다.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하며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활약하였다. 전각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1918년에는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의 사적과 평전을 수록한 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을 편찬하였다. 성북동 128번지는 그가 서화류를 보관하기 위한 가옥인데, 이곳에서 골동품의 수집·감정이 이루어졌고, 간송미술관과 최순우 옛집을 오가는 사람들의 접대 혹은 객사의 공간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북동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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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세창 집터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80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28-12 (성북로 75-1)

근거자료 원문

  • 2. 간송미술관 - 위창과 간송,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지난 2014년 4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에서는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간송문화澗松文化-문화로 나라를 지키다’로 명명된 이 전시는 그동안 성북동에 위치한 간송미술관에서 봄 · 가을에 한해서만 열리다가 처음으로 외부로 나들이를 한 것이었다. 이 전시의 제목인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즉 ‘문화보국文化保國’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오세창의 글씨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은 독립운동가, 언론가, 서예가, 수집가, 감식가, 편찬자 등 많은 분야에 걸쳐 다양하게 활동하였는데, 흔히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서 독립선언에 참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하여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였던 오세창은 이후 주로 일선에서의 독립운동보다 서화, 골동품 수집 등 예술 활동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오세창은 문화를 지키는 일이 곧 민족정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문화보국'의 글자에서 그것이 잘 드러나며, 이 정신은 전형필에게 이어진다. 오세창의 집안은 그를 포함한 8대가 역관을 지낸 중인 집안으로 한어역관漢語譯官의 경우 중국과의 사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세창의 집안 역시 7대 동안 역관을 역임하였던 선대와 부친의 북경행을 통해 전해오는 서적 · 서화작품 등이 방대하였다. 또한 오세창이 8세가 되던 1871년(고종 8), 오경석은 가숙家塾을 설치하여 한의학자이자 서예가인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이러한 집안 배경은 오세창의 사상 · 예술세계를 형성하여 이후 한국회화사와 서예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엮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이라는 방대한 자료편찬 뿐만 아니라 뛰어난 감식안으로 고미술품 감정 · 수집과 문화예술계 인사들과의 교우활동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한편,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은 25세가 되던 해, 종로 일대에서 상권을 쥐고 수만 석 지주로 군림하던 부친 전영기와 양부養父인 숙부 전명기의 재산까지 상속하여 조선 제일의 갑부인 십만석꾼이 되었다. 젊은 나이에 어마어마한 재산을 갖게 된 전형필은 본격적인 고 미술품 수집에 나서게 된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시 미술교사였던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의 소개로 오세창을 만나 우리 문화유산의 수집 · 보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전형필은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을 통해 고미술 수집에 큰 도움을 받은 한편, 화가 · 서예가 · 고미술수집가 · 미술 사학자 등 여러 분야의 인물들과 교류하며 그의 예술감각과 감식안을 키워나갔다. 전형필이 보화각을 설립했을 무렵 성북동은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으로써 기능하고 있었다. (중략) 전형필이 스승 고희동의 소개로 오세창을 만날 무렵,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의 편찬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였던 전형필이 만난 오세창은 환갑이 넘은 나이임에도 열정적으로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오세창은 전형필의 고미술 수집 · 감정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전형필이 문화재를 소장하고 연구할 시설을 갖추기 위해 1934년 프랑스 출신 석유상이었던 쁠레장의 별장을 사들였을 때 선잠단先蠶壇의 부근이라는 뜻으로 북단장北壇莊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중략) 간송미술관에는 한 장의 사진이 남아있다. 1938년 보화각의 상량식을 마친 후 찍은 사진으로, 보화각의 주춧돌에는 오세창의 글이 남아 있다. 무인년(1938) 윤 7월 5일에 전군(전형필)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을 굽어본다. 만품萬品이 뒤섞이어,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옛 골동품古董은 자랑할 만하다. 이곳에 모인 것들,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검토 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위창 오세창. 이들은 화가, 소설가, 서예가, 고미술품 수장가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인물들로 오세창을 중심으로 보화각에 자주 모여 전형필의 수집품을 감식하고 감상하였다.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과 심산心汕 노수현(1899-1978)은 1917년 스승 안중식安中植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기거하며 계속 화업을 쌓았던 인물이다. 안중식과 오세창은 오랜 세월 교류하며 경묵당을 중심으로 어울렸는데, 안중식의 제자 이상범과 노수현, 고희동 역시 오세창, 전형필과 어울리며 인연을 맺었던 듯하다. 특히 춘곡 고희동은 오세창과 39세, 자신이 19세일 때 처음 만난 것으로 회고하였다. 이도영까지 세 사람은 가을이 되면 도봉산으로 가서 시와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거나 술을 마시는 등 교우관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고희동의 〈아회도雅會圖〉에서는 오세창, 최남선 등의 인물과 일기회一器會[음식 혹은 안주 한 접시씩을 각자 들고 오는 모임] 장면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세창, 고희동, 이도영, 안종원, 최남선 등이 함께 시를 쓴 〈한동아집漢衕雅集 시축詩軸〉을 비롯하여 안종원, 고희동, 이도영, 오세창, 민형식, 윤희구 등의 서화합벽도권인 〈방린소회권芳隣小會卷〉 등 여러 예술인들이 모여 쓴 시나 그림이 많아 남아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어울리며 시나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의 활동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세창과의 인연을 이어가던 고희동은 전형필을 소개하여 전형필의 고미술품 소장에 오세창이 큰 역할을 하도록 한다. (중략) 이순황은 오세창의 소개로 전형필의 한남서림을 운영하였는데, 경성 미술구락부의 조선인 주주로 참여하고 있어 경매 참가에 도움을 주었다. (중략) 최순우 옛집 맞은편(성북동 128번지)에는 오세창이 서화류를 보관하기 위해 가지고 있었던 가옥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 골동품의 수집 · 감정이 이루어졌고, 간송미술관과 최순우 옛집을 오가는 사람들의 접대 혹은 객사의 공간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략) 1930년대 보화각이 지어질 무렵 성북동에는 서예가, 화가, 소설가, 고미술품 수장가 및 감정가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교류하고 있었다. 이 한장의 사진으로 보화각에 모여 고미술품을 수집·감정·소장하던 성북동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 구심점에는 오세창과 전형필이 있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37-244쪽
  • 오세창의 집안은 그를 포함한 8대가 역관을 지낸 중인 집안으로 한어역관漢語譯官의 경우 중국과의 사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세창의 집안 역시 7 대 동안 역관을 역임하였던 선대와 부친의 북경행을 통해 전해오는 서적 · 서화작품 등이 방대하였다. 또한 오세창이 8세가 되던 1871년(고종 8), 오경석은 가숙家塾을 설치하여 한의학자이자 서예가인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이러한 집안 배경은 오세창의 사상 · 예술세계를 형성하여 이후 한국회화사와 서예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엮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이라는 방대한 자료편찬 뿐만 아니라 뛰어난 감식안으로 고미술품 감정 · 수집과 문화예술계 인사들과의 교우활동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37-238쪽
  • 전 성북구청 사회과장 오일용 씨(오세창의 3남) 정년퇴직 (상략) 오씨는 33인중의 한 분인 위창 오세창 선생의 3남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성북동 집 안방에는 위창의 휘호 10여 점이 걸려있다. 오씨가 37년여 동안 근무하고 받은 퇴직금은 1천2백만 원. 앞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이 조금은 걱정되지만『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것이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1979. 7. 4.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03쪽
  • 吳世昌(오세창)선생 부인 朴明華(박명화)여사 別世(별세) 3·1운동 민족대표인 고 吳世昌(오세창)선생의 부인 朴明華(박명화)여사가 17일 상오 1시 서울 성북구 성북동 128의 11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발인은 19일 상오 11시 자택서(연락처 921607). 『경향신문』 1976. 1. 19.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85
  •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 서울 출생. 《만세보》, 《대한민보》사장을 역임하며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활약하였다. 전각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1918년에는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오세창 주소(현재): 성북동 128-12 분야: 서예, 미술사, 수장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 본적: 서울 주소(사망지): 성북동 128 계열과 단체: 3·1운동 <활동 내용>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23세의 약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박문국 주사(博文局主事)가 되었고, 우리 나라 최초의 언론기관인 한성순보(漢城旬報)의 기자가 되어 문필로써 명성을 떨쳤다. 1894년(고종 31)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낭청·총재비서관(郎廳·總裁秘書官)이 되었다가 농상공부 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정국 통신국장(郵政局通信局長)을 역임했다. 1902년(광무 6) 개화당(開化黨)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그 곳에서 손병희(孫秉熙)·양한묵(梁漢默) 등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17년 귀국하여 만세보(萬歲報)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를 창설하고, 그 사장으로 취임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최 린(崔麟)·권동진(權東鎭)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우선 동지를 포섭하기로 하였다. 이에 2월 10일경 최 린과 최남선(崔南善)이 협의하여,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였으므로 손병희·최 린·권동진 등과 이를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하였다. 2월 25일에는 손병희·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키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道師)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장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교도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만세 관한 계획을 알려 찬동을 얻었는데, 특히 그는 천도교 월보과장 이종일(李鍾一)을 동지로 끌어 들였다. 그는 2월 27일 그들과 함께 재동(齋洞) 김상규(金尙奎)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보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독립운동자들과 극비리에 연락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의원 의원(民主議院議員)을 겸하였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장(大韓獨立促成國民會長)과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全國愛國團體總聯合會) 회장을 맡아보며 독립국가 건설에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9년-오세창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 서명 1938년-오세창 성북동 보화각 상량식 참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12쪽
  • ○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오세창 민족대표 33인이자 3·1독립선언의 주도자 1864~1953 / 대통령장 / 성북동 128번지 거주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이자 추사 김정희의 학맥을 이어받은 서예가이며 한학에 있어 대학자로 통합니다.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앞장섰고 이는 곧 간송 전형필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작성과 인쇄, 배포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6쪽
  • ○ 오세창의 책임 아래 이루어진 인쇄와 배포 완성된 독립선언서의 인쇄의 총책임은 위창 오세창이 맡았습니다. 그 역시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간송 전형필의 스승이나 다름없던 인물로 성북구와 연이 깊지요. 오세창은 천도교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과 함께 독립선언서 2만 1,000장을 인쇄합니다. 그들은 일본군의 감시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서울과 평양, 선천, 원산, 개성, 서흥, 수원, 사리원, 해주, 대구, 마산 등 전국 각지로 배포합니다. 독립선언서는 그 자체로 독립만세운동을 독려하는 의미를 가졌고 이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일어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43-45쪽
  • ○ 에피소드 셋-성북구의 위대한 ‘멘토와 멘티’, 오세창과 전형필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데 일생을, 전 재산을 바친 간송 전형필.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이던 시절 5,000원으로 그림 한 장을 사고 2만 원으로 도자기 하나를 산 ‘이상한 남자’의 머릿속에는 오직 “조선의 것을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그가 지켜낸 문화재는 훈민정음,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조선백자, 신윤복의 <미인도> 등 국보 12점, 보물 10점에 이릅니다. 전형필이 문화재를 수집하는 감식안을 기르게 해 준 스승이 바로 위창 오세창입니다. 23살의 풋풋한 젊은이였던 전형필은 은사인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의 소개로 65세의 대학자이자 서예가였던 오세창을 만납니다. 당시 오세창은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한학의 일인자였으며 또한 추사 김정희의 직계 제자인 역매 오경석의 아들로 청년 전형필로서는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지요. 오세창이 전형필에게 왜 문화재 수집을 하게 됐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으로, 민족지도자로 광복을 열망했던 오세창이 그런 청년의 스승이 되어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간송(澗松)이라는 전형필의 호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葆華閣)이라는 이름도 모두 오세창이 선사한 것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44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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