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석
1899.05.07 - 1968.05.28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정릉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유관순의 오빠, 조화벽의 남편이다. 3.1운동 때 공주의 영명학교에 재학중이었는데 1919년 4월 1일 공주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다른 학생대표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장터에 나가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그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에 체포되어 같은 해 8월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혐의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7년에는 원산청년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년형을 구형받았다. 성북구 정릉동에 거주하였고, 1968년 5월 28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유우석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정릉동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유우석
  • 유우석 선생이 살던 정릉 주소지의 집
  • 유우석·조화벽 집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柳愚錫
  • 이명칭: 류준석(柳俊錫), 류관옥(柳寬玉), 백노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26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604-16 (아리랑로5길 128)

근거자료 원문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아리랑로5길 128(옛주소는 정릉동 604-16번지), 지금 이 주소에 집에 가서 노크를 해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살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주변 많은 집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 이곳은 여전히 가난한 마을이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해방까지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엔 평생 가난한 삶을 살았던 백노白奴 유우석柳愚錫 선생이 만년을 보낸 곳이다(2013년 가을, 다시 방문하니 집은 헐리고 없었다). 백노 유우석.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동생 유관순은 누구나 기억한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에 참여한 그녀는, 4월 1일(음력 3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곧 체포된다. 그리고 고문 끝에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다. 그리고 그녀는 3.1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만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가족 대부분이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더러는 죽고, 더러는 고초를 겪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309-310쪽
  • 본적: 충남 청원 주소: 정릉동 계열과 단체: 3·1운동 <활동 내용> 1919년 4월 1일의 공주(公州)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아우내( 川)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유관순(柳寬順)의 오빠이며, 당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에 재학중이었다. 3월 12일과 15일에 걸쳐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데 자극받은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이규상(李圭商)·현언동(玄彦東)과 졸업생 김사현(金士賢)·재학생 오익표(吳翼杓)·안성호(安聖鎬) 및 목사 현석칠(玄錫七) 등이, 3월 24일 밤 9시경, 영명학교 사택에서 만나 4월 1일의 공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그도 학생대표로서 이 계획에 참여하여, 3월 30일 김관회로부터 학생동원과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부탁받은 영명학교 조수 김수철(金洙喆)의 집에서 노명우(盧明愚)·강 윤(姜沇)·윤봉균(尹鳳均)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대하여 논의한 뒤, 이튿날 오후 3시경 이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천여매를 등사하고 대형 태극기 4개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후 2시, 그는 다른 학생대표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장터에 나아가, 여기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그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일제의 강력하고 신속한 저지로 좌절되어, 비교적 소규모로 전개된 채 끝나고, 그는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한편 같은 날 아우내 장터의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그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가 현장에서 순국하고 동생인 유관순도 체포되어 그의 가정은 파멸된 지경이었다. 공주검사국(檢事局)으로 송치된 그는 여기서 여동생 유관순을 잠시 만나기도 하였으나, 결국 이해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7년에는 원산청년회(元山靑年會)를 조직,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함흥(咸興)지방법원에서 4년형을 구형받는 등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그의 부인은 강원도 양양군(襄陽郡)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화벽(趙和璧)으로서 모두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힘쓴 애국가족이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9년-유우석, 조화벽 등 전국 각지에서 3·1운동 참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쪽
  • ○ 국외가 아닌 국내에, 임시가 아닌 정식의 정부가 수립되다 한편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많은 인물들이 정부수립과 함께 요직을 맡게 됩니다. 3·1운동 때부터 줄곧 항일운동을 해왔던 유우석은 국민의회 산업분과위원장으로 선출되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8-129쪽
    여기서 말하는 '국민의회'는 정부수립 이전인 1947년 2월 임시의정원의 법통과 직능을 계승하여 만들어진 기구를 말한다. 해방 후 임시정부는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과도적 의회(국회)'가 필요했는데, 그 결과물이 대한민국 국민의회였다.
  • ○ 해방 이후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유우석 동생의 역사에 가려진 독립운동가 1899-1968 / 애국장 / 정릉동 604-16 거주 1919년 공주 장날을 이용해 독립운동만세를 주도했습니다. 같은날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부모님과 동생 유관순 열사를 모두 잃는 비극을 겪었으나 독립운동가로서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강릉, 양양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7회나 구금, 석방을 되풀이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조화벽이 그의 아내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20쪽
  • ○ 오직 나라를 위해 맞섰던 성북인들 해방 이후 정릉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 유우석 역시 잊지 말아야 할 성북구의 애국지사 중 한사람입니다. 그는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학생대표로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했으며 이후에도 강릉과 양양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해 7회나 구금과 석방을 되풀이하며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유우석의 가족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아내 조화벽은 정릉에서 여생을 보낸 독립운동가입니다. 3·1운동 당시 개성 호수돈 여학교에서 ‘호수돈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유우석의 부모와 여동생 또한 그가 공주에서 만세운동을 했던 날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부모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여동생은 체포되어 옥사합니다. 그 여동생이 바로 유관순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48-49쪽
  • 유우석 1899~1968 서울특별시 성북구 아리랑로5길 128(정릉동 604-16번지)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 있었다.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힘쓰고 해방 후에는 평생 가난한 삶을 살았던 백노(白奴) 유우석(柳遇錫) 선생이 만년을 보낸 곳이다. 유우석은 학생대표로서 독립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다른 학생 대표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장터에 나아가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우석은 유관순의 오빠로 그의 가족 대부분은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유관순은 총검에 찔린 채 일경에게 끌려갔고, 그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는 끌려가는 딸을 따라가다 총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삼촌 유중무도 같은 날, 치안을 방해하고 헌병을 폭행하였으며 시위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총검에 찔려 빈사 상태에 빠진 형 유중권을 살리기 위해 업고 주재소 등을 뛰어 돌아다녔지만 결국 형은 사망하고 그도 체포되었다. 유우석은 동생 유관순을 5월 법정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눈물을 흘렸다.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 받아 8월 29일에 출옥, 유우석은 서울로 갔다. 1922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지만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중 일본 당국에 의해 포착‧체포되어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동지들을 밝히라는 협박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은 그는 이 사건으로 퇴학당하게 된다. 1923년 조화벽과 결혼한 유우석은 그녀의 고향인 안양으로 갔다. 그는 항일운동을 계속 이어갔고 1929년, 1932년, 1934년, 1936년 구속되었다. 1936년을 전후로는 무려 7번 구금당하였다. 해방 이후 통일운동과 신탁통치반대 운동에 참여하며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의회 산업분과 위원장에 뽑히기도 했다. 그는 이기붕 체제로 개편되는 이승만 정권에 남지 않았다. 자유당에서 탈당한 유우석은 농민과 노동자, 소시민층을 기반으로 노농당(勞農黨)을 창당하여 활동하다가 5‧16 군사정부에 의해 1961년 노농당이 해산되자 독립운동 유가족 구호에 힘썼다.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604의 16호에서 1968년 5월 28일 숙환으로 별세한 유우석의 장례식은 6월 5일 예총회관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는 해방된 나라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무단히 애썼다. 하지만 그는 가난했다. 너무 가난해서 매년 3월 1일 돌아가신 부모님과 유관순을 기리는데 초 한 자루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국가는 그가 사망하고 22년이 지난 1990년에 이르러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지금 유우석이 살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돈암코오롱 하늘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130-131쪽
    유우석이 자유당에 입당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근거자료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 확인하지 못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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