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당시 데모대의 시위 장소
오후 6시 40분 경 소방차와 트럭등에 분승한 데모대원들이 종로3가를 지나 동대문경찰서 앞을 통과할 무렵 경찰은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이때 동대문 경찰서에는 장갑차 2대와 경비경찰관 2백 35명이 배치되어있었다. 한 때 이곳에서 쌍방간 최초의 사격전이 벌어졌으나 데모대는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채 곧 동대문쪽으로 쫓겨갔다. 이 총격전으로 종로4가일대는 수라장이 되고 길가 복덕방 임원협 노인(65)이 총에 맞아 숨지는 가 하면 시골서 올라온 오빠와 보도위를 걸어가던 김진자(16. 한성여고1)는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했다.
한편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서 경찰의 추격으로 후퇴한 또 한 갈래의 데모대는 탈취한 무기들을 들고 트럭등에 분승, 종로와 안국동, 원남동을 거쳐 돈암동 쪽으로 넘어가 극렬한 시위를 벌였다. 밤 9시경 이들 기동 데모대 등 트럭 2대에 분승한 30여 명이 구호를 외치며 성북경찰서 앞을 통과할 때였다. 어두컴컴한 경찰서 건물 안으로부터 느닷없이 빗발치듯 총탄이 날아왔다.
급정거한 트럭에서 황급히 뛰어내린 데모대는 골목과 민가로 뿔뿔이 흩어졌으나 순식간에 5, 6명이 어둠 깔린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날 아침 어머니로부터 타낸 2백환으로 태극기를 사서 머리에 동여매고 데모트럭을 탔던 최기두(19. 덕수고 중퇴)도 이곳에서 회생됐다.
이날 밤 12시경 취재차 이곳에 들른 외신기자들은 바로 경찰서 정문앞에 그때까지 방치된 채 버려져있는 트럭 두 대를 목격할 수 있었다. 한 트럭의 운전대에는 핸들을 쥔 채 숨진 젊은이가 기대있었고 그 옆 조수석에는 제복을 입은 고등학생 차림의 시체가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외신기자들이 시체의 명찰과 단추를 조사하자 경찰서 담안에 집결해있던 경찰관들은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서울 동북방의 돈암동과 미아리 일대를 제압한 기동 데모대는 쉴사이 없이 트럭, 버스등을 타고 미아리고개를 오르내리며 기세를 올렸다. 밤 8시 경 미아리로 갔다가 다시 돈암동으로 넘어오는 데모버스에 탔던 진영숙(14. 한성여중2년)은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구호를 외쳐대다가 북선파출소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진영숙은 4.19희생자 가운데 유일하게 유서를 남긴 학생이다.
동아일보 1975.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