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구
1853 - 1939
인물 개인 서예가
인물 개인 화가
조선시대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덕온공주와 윤의선 사이에 후사가 없어 양자로 들어왔다. 고종 8년(1871) 직장(直長)으로서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법부·탁지부·내부 등의 대신으로 10여 회 임명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장위산 밑에 은거하며 ‘장위산인(獐位山人)’이라 자호하였다. 일제가 남작 작위를 수여했으나 거절하고,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글씨는 해서·행서를 많이 썼으며 그림은 난과 대를 잘 그렸다. 성북구 장위동의 농토는 대부분이 윤씨 일가의 소유였는데 1960년경부터 윤씨 일가에서 매도하고 또 개척되어 현재는 주택가로 밀집되었다. 그가 살았던 ‘장위동 김진흥 가옥’은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5호에 지정되었다.
장위동
  • 윤용구 서예 대련 1
  • 윤용구 서예 대련 2
  • 윤용구가 딸 윤백영에게 한글로 써준 중국의 여성들의 행적
  • 윤용구가 한글로 쓴 중국 여성의 전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尹用求
  • 이명칭: 장위산인(獐位山人), 석촌(石村), 해관(海觀)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서예가
  •   인물 개인 화가

시기

주소

  • 주소: 02766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76-59 (돌곶이로34길 4-11)
  • 비고: 장위동 김진흥 가옥

근거자료 원문

  • 이 저택은 윤용구가 관직을 내놓고 은거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윤용구는 ‘장위산인’이라고도 불렸는데,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은거했다는 뜻이다. 구한말 병과에 급제한 윤용구는 예조, 병조판서를 거쳐 을미개혁 이후 주요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장위산 밑에 은거했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난 예술가이기도 했다. 특히 금석문을 많이 썼고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렸다고 한다. 한일합방 후에 일제가 남작을 수여했으나 이를 거절할 정도로 선비 정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대나무처럼 올곧았던 윤용구가 나라를 강탈한 일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윤용구는 이곳에서 말년까지 나라 잃은 설움을 삭였다고 한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32-33쪽
  • ◎ 尹用求 1853(철종 4)∼1939 문신이며 서화가이다. 본관은 海平. 자를 周賓, 호를 石村·海觀·睡幹·獐位山人이라 했으며, 府使 會善의 아들로 태어나 南寧尉 宜善에게 입양되었다. 1871(고종 8) 直長으로 展試文科에 困科로 급제한 다음 檢閱을 지내고, 禮曹·吏曹判書에 이른 다음, 1895년 을미사변 이후로 法部·度支部·內部등의 大臣으로 10여회 拜命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獐位山밑에 은거하며 ‘장위산인’이라 자호하였다. 韓日合邦 후에 日帝가 男爵을 수여했으나 거절하였다. 서화와 거문고, 바둑으로 自誤하며 두문불출, 세사를 멀리하였다. 글씨는 해서·행서를 많이 썼으며 그림은 난과 대를 잘 그렸다. 금석문으로 과천의 〈文簡公韓章錫神道碑〉와 廣州의 〈宣城君茂生李公神道碑〉가 있으며 전라남도 선암사 입구의 降仙樓현판 등을 남겼고, 한편 그림으로는 〈竹圖〉(개인소장)와 〈墨竹〉(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城北區 長位洞의 농토는 대부분 尹判書(石村 尹容永)와 그 친척들의 소유였는데1960년경부터 尹氏家에서 매도하고 또 개척되어 현재는 주택가로 밀집되었다. 장위동 주민들은 石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즉 尹判書가 南寧齋에 은거해 있을 때 현 장위동 91번지에 동구다리가, 현 76번지에는 징검다리가, 또 南寧齋문밖에는 큰 섬돌이 하나 있었는데 이 다리는 당시 官職의 高下에 따라 下馬하는 곳이었으며, 또 죄인이 장위동에 잠입했을 경우나 장위동 사람을 잡으러 왔을 경우 尹判書의 허락없이는 체포할 수 없었다 한다. 南寧齋는 장위동 76번지 59호에 있는 건평 107평, 대지 759평의 韓屋이다. 이 한옥은 조선시대 말 純宗의 부마가 거처하기 위해 지은 집이라고 전하며 사랑채중앙에 南寧齊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집은 현재 金鎭興家로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民俗資料 제25호에 지정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42-743쪽
    본문의 '사랑채중앙에 南寧齊라는 현판이 걸려있다.'에서 '南寧齊'는 오기로 '南寧齋'가 맞는 표기이다.
  • 대감 윤용구大監 尹用求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은 ‘부마 한옥’ 보다 ‘윤용구尹用求 대감’집으로 더 널리 알려져 왔다. 윤용구는 바로 순조의 부마인 남녕위 윤의선의 아들이다. 윤용구는 1853년 계축년癸丑年(철종 4년)에 출생하였고, 1939년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자는 주빈周賓이며, 호는 석촌石村·해관海觀·수간睡幹·장위산인獐位山人 등 여러 개를 사용하였다. 덕온공주와 윤의선 사이에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였는데 바로 윤용구이다. 생부는 윤회선尹會善인데, 그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가족 상황을 보면 조부는 윤치승尹致承, 증조부는 윤명열尹明烈, 외조부는 인릉仁陵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런 정황이 반영된 것이다. 아버지인 윤의선의 장인이 순조이므로 인릉은 윤용구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윤용구는 1867년(고종 4년) 15세 나이로 돈녕부직장敦寧府直長에 임명되었다. 돈녕부는 왕실의 친척을 대상으로 한 관청이다. 그 중 직장 벼슬은 종7품이다. 그런데 대군의 사위나 공주의 아들은 첫 벼슬로 종7품에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로 보았을 때 윤용구는 1867년 윤의선의 양자가 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당시 윤용구의 나이가 15세였다. 이후 윤용구는 19세이던 1871년(고종 8년)에 별시別試 병과丙科 16위로 문과에 등제하였다. 문과 급제 이후에 한림翰林, 대교待敎, 직각直閣, 옥당玉堂, 사인舍人, 부제학副提學, 직제학直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성大司成,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였으며, 1890년(고종 27년) 38세에 정경正卿으로 승진하여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 그러나 1895년(고종33년) 을미사변 이후로는 법부대신法部大臣,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내부대신內部大臣,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에 임명되었음에도 항상 고사固辭하며 출임出任하지 않았고 두문불출하며 서울 근교의 장위산에 은거하면서 ‘장위산인獐位山人’이라 자호하였다고 하는데, 일본정부에서 주는 남작 작위를 거부한 채 세상사를 멀리하였다는 점 때문에 현시대에 그에 대한 평가가 비교적 좋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주위 사람들이 윤용구를 항상 좋게 평가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분분紛紛한 진세塵世의 영욕榮辱을 잊고 은둔한 은사隱士의 의지가 있음. 경절慶節과 명일名日을 당하여 대궐大闕에 이르러 승후承侯할 때는 종사宗社가 장차 망하려는 것과 백성이 어육魚肉됨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간쟁했으므로 당시 소인배들의 극심한 미움을 받았음” 이라는 기록이 있다. 일제의 기록임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소인배들이 누구였는지 짐작하기 쉽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1909년 ㅂ월 27일자 지사에는 「권고귀족勸告貴族」이라는 제목의 계몽성 가사가 실렸다. 당시 가사에 등장한 인물들은 윤용구를 포함하여 이윤용, 민영휘, 김윤식, 이도제, 이용원, 이종건, 윤웅렬 등 8명으로 당시의 대표적인 친일관료들이라 할 수 있는데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진력하기 보다는 개인의 안락과 출세와 가문을 더 중히 여겼던 사람들이다. 윤용구는 네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데, 관련 내용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尹用求氏 드르시오 陰陽曆이 俱新ᄒᆞ니 天地 萬物ᆡᄉᆡ로워ㅅ네 興亡不計 獨保性을 鴆毒ᄀᆞᆺ치排斥ᄒᆞ고 匡濟思想 奮發ᄒᆞ야 사ᄅᆞᆷ노릇ᄒᆞ여 보소’ 물론 이 기사는 1909녕에 쓴 것이기 때문에 윤용구가 1910년 일제의 작위를 반려한 6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당시에는 윤용구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윤용구에게 내려진 직책이 상당히 많고 다양하며 변동이 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이유 중에는 혼란스러운 시대적 특징도 작용한 듯하다. 1896년을 예를 들면 당시에는 탁지부 담장자를 거친 자가 윤용구를 모항하여 모두 8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각각의 평균 임기를 계산하면 석달 반도 채 안된다는 사실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 장위산인 윤용구 장위동 남녕위재사는 ‘윤용구 대감집’으로도 널리 알려져 왔다. 윤용구는 1853년(철종4)에 출생하였고, 1939년에 사망하였다. 본관은 해평이고, 자는 주빈周賓이며, 호는 석촌石村, 해관海觀, 수간睡幹, 장위산인藏位山人 등 여러 개를 사용했다. 윤용구는 덕온공주가 세상을 떠나고 10여 년이 지난 후에 윤의선의 양자가 되었다. 윤용구는 두 번 결혼을 했는데, 첫째 부인은 광산 김씨였으나 광산 김씨와 사별하고는 연안 김씨를 맞아들였다. 광산 김씨가 남긴 자식은 없고, 연안 김씨 사이에서 첫째 윤백영 여사가 태어났으며 2남을 더 출산하였다. 윤용구는 1867년(고종 4) 15세 나이로 종7품 돈녕부직장에 임명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돈녕부는 왕실의 친척을 대상으로 한 관청이다. 이러한 관직을 맡은 것으로 보아 이 당시 윤용구는 윤의선의 양자가 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윤용구는 19세이던 1871년(고종 8)에 별시 병과 16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종은 덕온공주의 아들과 덕온공주의 언니인 명온공주의 손자가 같은 날 과거에 합격하자 크게 기뻐하여 경축하였다고 실록에 전한다. 덕온공주와 윤의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윤용구는 왕실과의 두터운 교분을 쌓았으며, 홍문관 교리를 시작으로 이조판서, 궁내부대신, 장례원경 등 고종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윤용구의 부인들 또한 왕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속적인 교류를 해올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은 윤용구의 관직생활의 분기점이었다. 갑오개혁을 일본에 의해 왕권과 국가의 자주권이 침해 받은 일로 여긴 그는 갑오개혁 이후 여러 차례 고위 관직에 임명되었음에도 이를 사양하고 장위동 남녕위재사에 머무르며 국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앉았다. 다만 고종이 정치적으로나 신변상 위험에 처했을 때 보필하고자 임시직을 맡아 처리했을 따름이었다. 1895년 4월 윤용구는 중추원 의관직을 사직하였는데 몇 개월 뒤인 8월 20일 일본공사 및 낭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다음 해인 1896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 직후 탁지부대신에 임명하자 몇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해 4월부터 출사했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어하던 1897년 2월 다시 사직하였는데, 대한제국 선포를 앞둔 몇 개월은 국사에 헌신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0월 12일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자 스스로의 임무를 마쳤다고 여긴 윤용구는 사직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다음 해에도 고종은 윤용구를 불렀고 윤용구는 1899년 3월 다시 사직상소를 올렸다. 지루한 임명과 사직을 반복하였지만 또 다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당하자 출사하여 황제를 성심껏 보필하였다. 그러나 1907년 7월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 당하고 순종황제가 즉위하자 잔무를 처리한 다음, 사직하고는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윤용구는 고종의 명에 응하여 끊임없이 사직상소를 올리고 때로는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기도 했지만 1907년 황제가 강제퇴위를 당할 때까지 집요한 부름에 응하면서도 적절한 수준에서 진퇴를 거듭했다. 그러니까 윤용구의 완전한 은거는 고종황제의 퇴위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1908년 6월 경릉 표석의 서사관으로 차출되어 소임을 다한 윤용구는 더 이상 이와 같은 임무를 맡지 않았다. 그러나 1909년 윤용구는 고종의 명으로 『정사기람正史紀覽』을 궁중 여성이 읽을 수 있는 한글로 번역하여 『뎡ᄉᆞ긔람』을 바쳤고 고종은 1910년 8월 4일 팔괘장을 하사하였는데 윤용구로서는 이것이 국가로부터 받은 마지막 훈장이었다. 그리고 1910년 경술 국치일을 당한 이후 일본 왕이 그 해 10월 7일 윤용구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하자 “완민頑民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작위를 거절하였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00-102쪽
  • 갑오개혁 이후 남녕위재사가 있는 장위동에 나아가 머물며 은일지사隱逸之士의 길을 걸으면서도 윤용구는 왕실의 종척으로 왕실의 크고 작은 일에 집사로 나섰고 또 음악과 미술 분야에 전념하였다. 음악 분야에서는 1912년 5월 조선정악전습소 휘금 교수로 잠시 나갔고 미술 분야에서는 1915년 동양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다. 그러나 그 후 어떤 단체나 기관 주최의 행사에도 불참함으로써 공식 활동을 중단하였다. 다만 남아 있는 여러 「합작도合作圖」에 보이는 바처럼 당대 미술계의 중심 안중식, 민족운동의 핵심 인물이자 서화가 오세창 등 예인들과 교유하고 또 전국 각지의 뜻 있는 이들이 청해 오는 서화 주문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장위동을 근거지로 한 은일지사로서의 삶은 1939년 그가 별세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주민들 사이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남녕재 문 밖에 큰 섬돌이 하나 있었는데 이 곳은 당시 관직의 고하에 따라 하마下馬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또 장위동 사람을 잡으러 왔을 경우나 죄인이 장위동으로 잠입했을 경우 전 판서 윤용구 대감의 허락 없이는 체포할 수 없었다 한다. 또 장위동에 대해서도 윤용구는 동명을 반드시 ‘장위藏位’라고 썼다 한다. 이것도 윤용구가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은거했다는 뜻으로서 상통하는 점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도 윤용구의 아호가 ‘장위藏位’인 데서 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다음에 인용한 신문기사들은 장위동에 은거할 당시 윤용구의 충절, 예술, 학문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세간에 전하는 이야기들을 몇 가지 전하고 있어 참고할 만하다. 윤용구(尹用求) 씨와 문장(文章) 해관(海觀) 윤용구 씨는 홍진고해(紅塵苦海)를 탈각(脫却)하여 노송고삼(老松古杉)이 울울창창 (鬱鬱蒼蒼)한 동소문 외 월곡리 남녕위궁(南寧尉宮) 묘소 일우(一隅)에 별업(別業)을 치(置)하고 수년 이래 풍월을 반(伴)하여 유유자적하니 실로 신선도(神仙圖) 중의 일인(一人)이로다. 씨는 조선 현대의 서가(書家) 중 굴지의 인(人)일뿐더러 산수(山水)를 능화(能畫)하여 일가를 성립한 인(人)이며 또한 씨는 왕년에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언역(諺譯)하되(『뎡ᄉᆞ긔람』을 가리킨다.) 삼사차 개삭(改刪)하여 완성 후 이왕(李王) 전하(순종황제를 가리킨다.)께 헌상하여 이 진적(珍籍)은 이왕가(李王家)의 일보물(一寶物)로 비장(祕藏)하셨다는 설(說)을 들었으니 씨의 경학(經學)과 문장(文章)은 이로써 알 수 있다. 씨에 관하여 일진담(一珍談)이 있으니 씨는 서화(書畫)의 소청(所請)이 있으면 비록 천백장(千百張)이라도 사절(謝絶)치 아니하되 문장(文章)은 단불착필(斷不着筆)하는 일이라 그동안 씨에게 비문(碑文)과 명문(銘文)을 청한 자도 있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으므로 무료히 귀거(歸去)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내사(內査)한 즉 구한국시대(舊韓國時代)에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에 임명된 일이 있었는데 홍문관은 궁중도서(宮中圖書)를 관장하는 곳이요, 예부터 유명한 석학을 임명하는 전례라 이에 씨의 자격이 적당하다고 하여 임명하였는데 씨는 불감당이라 겸손하고 물러나 사직소를 올려 관직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므로 서화는 농(弄)하여도 문장은 일생부작(一生不作)이라 결심한 것이 분명하였다 하며 씨는 현대 조선인(朝鮮人) 중 희유(稀有)의 장서가(藏書家)라 그 고서진적(古書珍籍)이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 하니 현금(現今) 조선의 고서진적이 그 그림자도 남지 않게 된 것은 차제에 씨와 같은 장서가가 상존(尙 存)함은 오인(吾人)의 찬하(攢賀)를 불금(不禁)하는 일이로다. ― 『매일신보』 1915. 1. 20. 윤용구(尹用求) 씨(氏) 장서(長逝) 그 탁월한 문한과 명필로 일세를 울리든 해관(海觀) 윤용구(尹用求) 씨는 28일 오후 9시 반 고양군 숭인면 장위리 자택에서 숙환으로 장서(長逝)하였는데 향년 86세의 고령이고 장의는 7일장으로 2월 3일이고 장지는 자택 부근의 선영이라고 한다. 씨는 명문의 소생으로 순조대왕(純祖大王)의 부마인 남녕위(南寧尉)의 장자 즉 고종(高宗)의 내종사촌이오 왕대비(王大妃) 전하의 삼종조가 되고 일찍이 이조(吏曹)판서, 궁내(宮內)대신, 법부(法部)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만년에는 장위리 선영 아래 노년을 문장과 서화로써 스사로 즐기다가 장서하였다. 슬하에는 유자형제가 있다. 이로써 구 한국 시대의 판서(判書)도 씨로써 마지막이라 한다. ― 『매일신보』 1939. 1. 31.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02-106쪽
  • 덕온공주와 장위동에 대하여 김성일(지음건축도시연구소 연구원, 이하 김): 작년에 장위동을 조사하다 보니 지역에서 윤용구라는 인물이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계시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장위동 일대가 삼성 쪽(동방생명보험회사)으로 넘어가면서 70년대 비교적 고급스러운 주택들이 들어섰고. 그래서 오늘날 장위동이 되었고요. 그런데 윤용구 선생에 대해서도 제가 조사를 해보니까 이 분이 초야에 묻혀 계셔서 그렇지 사실은 굉장한 당대의 인물이었고 글이면 글, 그림이면 그림, 음악이면 음악 다 일가를 이루셨던 분인데 시대를 워낙 잘못 만나셔서 그런 거를 전혀 펼치실 기회가 없었어요. 더군다나 이분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작위를 거부함으로써 일제에 영합하지 않은 대표적인 지조 있는 선비의 모습을 보이신 분이거든요. 당시 일제의 위세가 굉장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면적으로 거부한다는 거는 자기 신변의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건데 그걸 하셨다는 건 굉장히, 이분이 비록 초야에 묻히셨지만 그러한 기백은 분명히 있으셨던 선비의 모습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07쪽
  • 석촌 윤용구 대감의 글씨에 대하여 유: 제가 65년도에 미국에 간다고 하니까 할머니께서 그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인생에 팔자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너라도 들어가서 생명을 유지해라. 망한 국가가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고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8.15 이후에 밤낮 이렇게 폭동이 일어나고 사람을 살해를 하고 누가 남겠느냐 말이야. 전쟁도 험악하게 끝났고. 네가 미국 들어가서 너라도 살아남아서 공부를 열심히 해라. 이러고 글을 하나 써주셨어요. 주자왈 10계명을 써주셨다고. 하루에 10번씩 아니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읽으라 말이야. 그러시면서 제가 비행기 타는 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예전에 우리 선친〔증조부 윤용구〕께서 아마 지금 생각에 1910년 아니면 1920년 사이였어요. 그때 선친께서 동양 서도전에 나가셨다가 일등을 하셨다는 거예요. 석촌 대감께서. 그러는데 영국 공사가 오셔서 친히 부탁을 하시더래요. 서도 하나 좀 글을 써주십사 하고. 그러니까 저희 증조부께서 궁금하셨겠죠. 왜 이런 나의 글씨가 필요하냐. 그랬더니 그분 말씀이 내가 옥스퍼드 대학교에 증정하고 싶다고 학생들을 한번 보여주고 싶다고 그러시더래요. 그래서 가져가시고 그 다음번에 며칠 후에 또 미국 공사가 찾아왔더래요. 대감님 나한테도 한 장 써주십사 하고. 그래서 당신 뭐를 하려고 이걸 쓰느냐 그랬더니 내가 콜롬비아 대학에 증정을 하고 싶습니다. 거기 박물관에 보내고 싶다고 그러시더래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받아가지고 갔는데 그거를 정말 보관을 해서 박물관에 보냈는지 그거를 버렸는지 한번 찾아봐달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당시에는 미국만 가면 뭐든 쉬울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하. 그때나 알아본다는 것이 언어도 그렇고 모든 게 복잡했기 때문에요. 그러는데 몇 년 전에 저희 손녀딸 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그랜마grandma 당신이 밤낮 얘기하던 증조부 글씨가 우리 하버드 대학 박물관에 있다 말이야. 꼭 그분 같으니까 사진을 찍어서 보낼 테니 한번 봐라 말이지. 보니까 저희 증조부 글씨예요. 다음번에 그러면 네가 그걸 찾았으면은 한번 옥스퍼드대학에 있는지 봐라 그랬더니 옥스퍼드 대학에서 브리티쉬 뮤지엄British Museum으로 보냈대요. 그래서 거기서 가지고 계시더라고요. 백: 실제 그 글씨를 확인하셨어요? 유: 네. 제가 확인을 했어요. 거기에 스토리도 써 있고. 뭐라고 써 있느냐 하면은 제일 먼저 윤용구 대감이 국가가 쓰러지면서 장위산으로 들어가셔서 석촌에서 아, 제일 먼저 일본… 조선총독으로부터 작위를 보냈는데 선물하고 돈하고. 그랬는데 이분이 딱 네자로 쓰셔서요.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고 네 자를 쓰셔서 그 모든 거를 즉시 다음날로 돌려보내셨답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12-114쪽
  • 윤용구 대감이 남녕궁(현 진흥선원)으로 가게 된 사연에 대하여 유: 그러는데 그다음부터 문제가 있으셨어요. 조선 말기였기 때문이에요. 그때 혁명이 많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대원군파. 그 다음번에 명성황후 쪽. 백: 임오군란도 있었고. 유: 네. 사실상 일본이 들어와서도 물러났지만 그 전에요. 갑신정변 때 개경 저 재동 쪽에요. 그때는 재동 쪽에서 계셨답니다. 그 당시에 그 궁이 그쪽에 있었는데.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적에 윤용구 대감도 그때 대궐에서 일을 하셨지만 선친도 그때 윤의선 고조께서도 거기서 일을 하시니까. 지금 현대 자리에 또 궁이 있었습니다. 두 분께 그리로 빨리 들어오시라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들어가는데 벌써 길에 그냥 피가 낭자하더래요. 그 두 분이 들어가시는데 그때는 가마 같은 걸 타고 가시지 않습니까. 들어가는데 이 사람이 그냥 무서워서 문 근처에 오더니 뭐 벌벌벌 떨고 들어가질 못하시더래요. 윤의선 대감께서 호령을 치면서, 왜 못 들어가느냐. 지금 저 안에서 사람 죽는 소리가 나고 피가 낭자하고 그래서 대감님 너무 죄송하지만 위험해서 못 들어가겠습니다. 그랬더니, 그게 무슨 말이냐. 죽여도 우리 부자를 죽이지 너를 죽이겠느냐. 고종께서 부르시고 명성황후께서 부르셨는데 어떻게 내가 안 가느냐. 그래서 들어가시는데 팔은 팔, 다리는 다리, 머리는 머리 어떻게 사람을 처참하게 살인을 했는지 거의 쓸 만한 사람은 거의 다잡아다가 처참하게, 그때 살인 장면은 말할 수도 없더래요. 윤의선 대감께서 보시면서 “아들아, 이제 이 나라는 망했다. 저렇게 쓸 만한 사람이 다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니 누군들 살아나겠느냐.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장래는 없다, 이 나라는.” 그러시면서 “너는 지금서부터 조정에서 나올 준비를 해라.” 그러셨대요. 그래서 그때서부턴 이분은 글을 쓰시겠다고 물러날 준비를 하셨대요. 그러시고 난 뒤에 아마 석촌 윤 대감께서 고종 황제께 항상 “저는 글을 좋아하니 글을 쓸 기회를 주십시오. 물러나겠습니다.” 석촌 대감께서 명성황후하고 굉장히 친하셨어요. 누이동생처럼 굉장히 가까우셨대요. 좋은 책이 있으면 보여드리고. 그러고난 뒤에 하도 물러나시겠다고 그러니까 고종 황제하고 명성황후께서 청탁을 하더래요. 그러면 이 나라가 너무 정세가 이러니까, 더더군다나 그때 명성황후하고 대원군 싸움 아닙니까. 주고받고 주고받고.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황후 어른 분한테도 교육을 시키자 말이야.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 너무 한자가 힘들고 너무 어렵고 특수한 사람만 교육을 받을 수 있으니까 우리가 언문으로 교육을 시키자 말이지. 그래서 오천년 역사를 언문으로 좀 써주십사 해서 『정사기람』을 쓰게 되었어요. 조선, 이 나라를 이완용 씨가 전부 넘겨주고 있었잖습니까. 이완용 씨가 이쁜 눈으로 봤겠어요? 이 분이 맨 첫 번에 받아서 그분만 받으시면 나라가 그냥 쉽게 넘어갈 텐데 이분이 싫다고 거절을 하시니까. 어떻게 그 이완용 대감이 그때 순종 황제가 생존해 계실 땐데 어떻게 구했는지 남녕궁南寧宮(윤의선 부마 가옥)을 재동에 있던 거를 이완용 씨가 뺏었어요. 누가 귀띔을 드리더래요. 윤용구 대감께서 여기 계속해서 계시면은 생명을 보존을 못 하시고 모든 걸 다 잃으시니까.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14-116쪽
  • 바로 그 직전에 3 · 1운동이 일어났답니다. 3 · 1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거기 계셨었대요. 왜 탑골공원 멀지 않잖습니까. 3 · 1운동이 일어나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젊은 사람들이 다 그리로 쏟아져 들어오더래요. 그 집 대궐로. 백: 윤용구 대감 댁으로. 유: 네. 대감댁으로요. 그래서 다 잘 보호를 하시는데 아마 젊은 사람을 내놓으라고 그랬겠죠. 조선 총독에서 특히 와서 부탁을 하시더래요. 이 사람들이 위험하니까 대감 신변이 위험하시니까 우리한테 내놓아달라. 보나마나 그분이 그렇게 내놓으시겠어요? 그 이후에 조심조심해서 장위동 석촌으로 다 이사를 가신 거예요. 거기는 옛날에 선산이었기 때문에 산소를 가시기 위해서 가지고 계셨던 곳이라고요. 장위동 남녕궁 앞에 큰 연못이 있었어요. 지금 그 자리에 있었어요. 저희가 겨울에 스케이팅을 타러 갔어요. 백: 겨울방학에 그렇게 타고 그러셨나 봐요. 유: 겨울방학에, 네. 백: 아까 성 안에 궁이 재동에 있었다고… 유: 네. 재동에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석촌 대감께서 장위동으로 이사를 하시면서 이사 후에 이완용 씨가 들어왔어요. 박정숙(경기대학교 서예과 교수, 『조선의 한글편지』 저자, 이하 박): 재동은 저동 궁 아닌가요? 유: 아니에요. 그것도 뺏었지만 이것도 뺏었다고요. 그런데 3 · 1운동 날 당시에 재동궁에 계셨었다고요. 석촌 대감의 정경부인 되시는 분이, 저희 증조모님입니다, 그분이 오래 사셨어요. 그래서 그분 말씀이 석촌 대감께서 3 · 1운동에 도망 왔던 사람을 한 명도 안 내치고, 이완용 씨가 화가 날대로 화가 났었다 말이야. 그래서 그분이 뺏고 난 뒤에 국민이 너무 화가 나서 그 집에 불을 질렀다고 그러시더라고요. 백: 그러면 그때는 장위동과 이렇게 재동궁을 이렇게 오가시면서 지내시던 때였나요? 유: 아마 그 당시에는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너희 위험하다고 아무래도 대감께서 몸을 움직이시라고. 근데 그분께서 장위동으로 가실 적에 3 · 1운동 하던 학생들을 다 먼저 보내고 다 몸을 다 보호해주고 남녕궁으로 들어가시고요. 그러는데 그 당시에는 장위동에 계실 적에 남녕궁 근처에는 순사가 그 근처에 와도 대감 댁에는 못 들어왔대요. 수색을 못 했대요. 백: 그럼 많은 청년들이나 그런 사람들이 좀… 유: 많았대요. 독립자금 이런 거 하시는 분을 많이 뒤에서 도우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저희 정경부인께서는, 어렸을 때 “증조할머니, 어째 은비녀 하나 없습니까?” 제가 나이가 어렸으니까 다른 사람 보면 은비녀도 끼고 금비녀도 끼시는데 그랬더니 그런 중요한 폐물은 대감께서 다 해가지고 독립자금 하는데 감춰뒀다가 많이 뒤로 보내셨다고 그러더라고요. 백: 그러면 석촌 대감께서 남녕궁에 사실 때 대감께서는 주로 사랑채에 계시고 그리고 정경부인께서는 안채에 계시고… 유: 네. 제가 태어났을 적에는 석촌 대감께서 벌써 운명을 하셨을 때에요. 주로 이 얘기는 정경부인께서 말씀해주시고 저희 할머니께서 말씀을 해주시고 저희 선친께서 이야기 해주시고 저희 큰오라버니님〔유형〕이 생존하셨으면 더 잘 알죠. 2016년도에 돌아가셨어요. 오빠는 밤낮 거기서 자라다시피 했으니까. 저보다 열 살이 위니까.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16-118쪽
  • 유: 그 시대 저희 할머니가 태어나시던 시절에, 그러니까 1888년에 태어나셨는데 그 시대는 여자가 글을 배우면 누구도 안 데려가요, 며느리로. 근데 이 분이 3살서부터 아버지〔윤용구〕 아침 인사를 들어가면요, 상궁하고 같이 그 궁에서 들어가시면 저희 할머니께서 점심이 지나도 안 들어오시더래요. 정경부인〔연안김씨〕, 증조할머니 말씀이. 그래서 처음에는 걱정이 돼서 죽겠더래요. 근데 그때만 해도 정경부인이 그렇게 사랑을 맘대로 남편 방이라고 쑥쑥 못 들어가던 시절이었대요. 상궁하고 들어갔는데 아가씨가 안 가겠다고 떼를 쓰기 때문에 상궁이 어쩔 수 없이 한쪽에서 지키고 서 있는데 저희 증조부께서 글을 쓰면 어깨너머로 다 배우고 외우신 거예요. 3살서부터. 그러니까 저희 증조부께서 신기했겠죠. 쓰시고 나서 본인도 쓰고 싶다 그러면 붓을 주면 쓰니까 저희 증조부께서는 너무 너무 기특해서. 그 다음번에 5살이 됐을 적에 정경부인께서 왕후께 답장을 보내시려면요, 저희 할머니가 대필을 하셨대요. 워낙 글을 좋아하셨어요. 백: 그러면은 석촌 대감께서는 이렇게 선생님 역할을 이렇게 하신 거네요? 유: 그렇죠. 하도 배우고 싶어하니까 사서를 다 가르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22-123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0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