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선
1823 - 1887
인물 개인 기타
성북구 장위동에 있는 김진흥 가옥에 거주했던 인물이다. 김진흥 가옥이라는 명칭은 현재 소유주에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원래는 순조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1822-1844]의 남편 남녕위 윤의선이 1865년(고종 2)에 지은 재사(齋舍)였다. 윤의선은 1823년(순조 23) 태어나 1837년(헌종 3) 덕온공주와 혼인하여 남녕위(南寧尉)로 봉해졌다. 덕온공주와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 윤회선(尹會善)의 둘째아들 윤용구(尹用求)를 양자로 삼았다. 1864년(고종 1) 국장도감 하현궁명정서사관과 이듬해 영건도감제조와 대왕대비전 사서관이 되어 일을 했으며,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또한, 1875년(고종 12)에는 왕세자책례도감 서사관, 상호도감익종대왕추상존호 서사관, 빈전향관 등 왕실과 관련된 일을 보기도 하였다.
장위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尹宜善
  • 이명칭: 남녕위(南寧尉), 경교(景敎), 석남(石南)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기타

시기

주소

  • 주소: 02766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76-59 (돌곶이로34길 4-11)
  • 비고: 장위동 김진흥 가옥

근거자료 원문

  • 건평 107평, 대지 759평의 이 집(장위동 김진흥 가옥)은 조선 말 순조의 셋째 부마 윤의선과 덕온공주가 살던 곳이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32쪽
  • 부마도위駙馬都尉 윤의선 장위동 ‘남녕위재사南寧尉齋舍’한옥은 사람들에게 ‘부마 한옥’으로 알려져 왓었다. 부마는 바로 순조純祖(1790~1834)의 3녀 ‘덕온공주德溫公主’의 남편을 말하는데,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이다. 남녕위 윤의선은 1823년 출생하였고, 1887년(고종 24년)에 사망하였다. 음판관蔭判官 윤치승尹致承(1789~1841)의 아들로서 본관은 해평海平, 字는 경교景敎, 호는 석남石南이다.
  • 덕온 공주(德溫公主)가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순종 대왕(純宗大王)의 제3녀이다.
  • 윤의선(尹宜善) 1823년(순조 23)∼1887년(고종 24).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교(景敎). 증조부는 윤면동(尹冕東)이고, 조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윤명렬(尹命烈)이며, 부는 생원(生員) 윤치승(尹致承)이다. 외조부는 안동김씨(安東金氏[新]) 진사(進士) 김이위(金履褘)이다. 순조(純祖)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3녀이자 막내딸 덕온공주(德溫公主)와 1837년(헌종 3)에 혼인하여 남녕위(南寧尉)에 봉해졌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윤회선(尹會善)의 둘째아들 윤용구(尹用求)를 양자로 삼았다. 1864년(고종 1) 국장도감(國葬都監) 하현궁명정서사관(下玄宮銘旌書寫官)과 이듬해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와 대왕대비전 서사관(書寫官)이 되어 일을 했으며,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이후에 상호도감(上號都監) 옥보전문서사관(玉寶篆文書寫官)을 거쳐 1866년(고종 3) 가례도감당상(嘉禮都監堂上)으로서 일했다. 판의금부사, 1872년(고종 9)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1874년(고종 11)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1875년(고종 12) 주로 왕실관련 일인 왕세자책례도감 서사관(王世子冊禮都監書寫官), 상호도감익종대왕추상존호 서사관(上號都監翼宗大王追上尊號書寫官), 빈전향관(殯殿享官), 추상가상존호도감 서사관(追上加上尊號都監書寫官), 추상존호금보전문서사관(追上尊號金寶篆文書寫官)으로서 일을 보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항목명: 윤의선(尹宜善)
  • 부마도위 윤의선과 덕온공주 부마가옥의 ‘부마’는 부마도위 윤의선을 가리킨다. 윤의선은 음판관 윤치승尹致承(1789~1841)의 아들로서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교景敎, 호는 석남石南이다. 남녕위는 윤의선이 부마가 되면서 받은 칭호이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94쪽
  • 남녕위 윤의선에 대한 기록은 1837년 덕온공주와 결혼한 이후로 20여 년간 나타나지 않다가 1857년(철종 9), 윤의선이 35세이던 해에 입직入直을 명령 받는 기사에서부터 발견되기 시작한다. 특히 1863년(고종 즉위년) 이후부터는 기록이 많은데 대부분 관직을 제수 받는 내용이다. 기사 중에는 1871년(고종 8)에 덕온공주의 아들인 윤용구가 과거에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볼 때 윤의선은 당시 윤용구를 입양한 상태임을 알 수 있고, 과거에 합격할 당시 윤의선의 나이는 49세, 윤용구의 나이는 18세였다. 한편 윤의선은 63세가 되던 해 경우궁景祐宮을 인왕동으로 이전하는 공사의 감독을 맡는다.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인 수빈綏嬪 박씨朴氏의 사당이다. 순조의 부마인 윤의선이 경우궁 이전 공사의 임무를 맡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96-97쪽
  • 윤의선과 덕온공주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한 행장을 찾을 수 없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관찬 사료는 덕온공주의 결혼과 죽음, 윤의선이 역임한 관직 정도만을 알려줄 뿐이다. 그런데 최근 윤의선이 쓴 글씨와 덕온공주가 쓴 한글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들 부부의 학식과 예술적 기량, 생활의 구체적 단편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윤의선이 거쳐간 관직들을 보면 유독 서사관이란 직책이 많다. 그는 1864년(고종 1) 국장도감國葬都監 하현궁명정서사관下玄宮銘旌書寫官과 이듬해 대왕대비전 서사관書寫官이 되어 일을 했다. 1875년(고종 12)에는 왕실 관련 일인 왕세자책례도감서사관王世子冊禮都監書寫官, 상호도감익종대왕추상존호서사관上號都監翼宗大王追上尊號書寫官, 추상가상존호도감서사관追上加上尊號都監書寫官, 추상존호금보전문서사관追上尊號金寶篆文書寫官으로서 일을 했다. 서사관이란 국가나 왕실의 공식문서를 직접 글씨를 써서 작성하는 일을 맡아보는 벼슬을 말한다. 윤의선은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지만 서예 솜씨가 당대 일류급이었기에 서사관이란 직책을 왕실의 주요 행사마다 맡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현재 윤의선의 글씨로 알려진 것은 『문조익종황제추상존호옥책문』 에 실린 전각 글씨이다. 고종대에 효명세자를 문조익종황제로 추존하면서 제작한 금인장에 새긴 전서체 글씨를 그가 썼는데, 이는 서예 솜씨뿐 아니라 한자에 관한 대한 깊은 지식이 있는 사람만이 손댈 수 있는 당대 최고의 예술작품이다. 윤의선의 학식과 예술적 기량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97-98쪽
  • 윤용구 대감이 남녕궁(현 진흥선원)으로 가게 된 사연에 대하여 유: 그러는데 그다음부터 문제가 있으셨어요. 조선 말기였기 때문이에요. 그때 혁명이 많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대원군파. 그 다음번에 명성황후 쪽. 백: 임오군란도 있었고. 유: 네. 사실상 일본이 들어와서도 물러났지만 그 전에요. 갑신정변 때 개경 저 재동 쪽에요. 그때는 재동 쪽에서 계셨답니다. 그 당시에 그 궁이 그쪽에 있었는데.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적에 윤용구 대감도 그때 대궐에서 일을 하셨지만 선친도 그때 윤의선 고조께서도 거기서 일을 하시니까. 지금 현대 자리에 또 궁이 있었습니다. 두 분께 그리로 빨리 들어오시라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들어가는데 벌써 길에 그냥 피가 낭자하더래요. 그 두 분이 들어가시는데 그때는 가마 같은 걸 타고 가시지 않습니까. 들어가는데 이 사람이 그냥 무서워서 문 근처에 오더니 뭐 벌벌벌 떨고 들어가질 못하시더래요. 윤의선 대감께서 호령을 치면서, 왜 못 들어가느냐. 지금 저 안에서 사람 죽는 소리가 나고 피가 낭자하고 그래서 대감님 너무 죄송하지만 위험해서 못 들어가겠습니다. 그랬더니, 그게 무슨 말이냐. 죽여도 우리 부자를 죽이지 너를 죽이겠느냐. 고종께서 부르시고 명성황후께서 부르셨는데 어떻게 내가 안 가느냐. 그래서 들어가시는데 팔은 팔, 다리는 다리, 머리는 머리 어떻게 사람을 처참하게 살인을 했는지 거의 쓸 만한 사람은 거의 다잡아다가 처참하게, 그때 살인 장면은 말할 수도 없더래요. 윤의선 대감께서 보시면서 “아들아, 이제 이 나라는 망했다. 저렇게 쓸 만한 사람이 다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니 누군들 살아나겠느냐.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장래는 없다, 이 나라는.” 그러시면서 “너는 지금서부터 조정에서 나올 준비를 해라.” 그러셨대요. 그래서 그때서부턴 이분은 글을 쓰시겠다고 물러날 준비를 하셨대요. 그러시고 난 뒤에 아마 석촌 윤 대감께서 고종 황제께 항상 “저는 글을 좋아하니 글을 쓸 기회를 주십시오. 물러나겠습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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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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