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1917.09.17 - 1995.11.04
인물 개인 음악가
음악가이다. 14살 때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고, 1935년 일본 오사카음악대학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다. 해방 후 1952년까지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하다 서울로 올라 와 성북동128-13에 거주하였다. 이때 길 건너편에 살던 조지훈이 작사를 하고 윤이상이 곡을 붙여 노래를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나온 곡 중 하나가 바로 현 고려대학교 교가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71년 독일로 귀화하고 이듬해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 『심청』을 공연하였다. 그의 작품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색채의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북동
  • 윤이상 집터 표지석
  • 윤이상 집터
  • 윤이상 탄생100주년 기념 음악회 "성북동은 1955년의 윤이상을 기억한다"(1)
  • 윤이상 탄생100주년 기념 음악회 "성북동은 1955년의 윤이상을 기억한다"(2)
  • 윤이상 탄생100주년 기념 음악회 "성북동은 1955년의 윤이상을 기억한다"(3)
  • 윤이상 탄생100주년 기념 음악회 "성북동은 1955년의 윤이상을 기억한다"(4)
  • 윤이상 탄생100주년 기념 음악회 "성북동은 1955년의 윤이상을 기억한다"(5)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尹伊桑
  • 이명칭: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음악가

시기

주소

  • 주소: 136-824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28-13

근거자료 원문

  • 개울을 사이에 두고 후일 유럽을 뒤흔들 작곡가 윤이상이 길 건너 조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50쪽
  • 경남 산청 출생.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곡가이다. 14살 때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고, 1935년 일본 오사카음악대학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다. 해방 후 1952년까지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하다 이듬해 서울로 올라 와 피아노를 팔아 성북동에 한옥 한 채를 마련한다. 이때 길 건너편에 살던 조지훈이 작사를 하고 윤이상이 곡을 붙여 노래를 짓기도 하였다. 기악곡이 드물던 당시 피아노3중주곡과 현악4중주곡을 만들어 작곡집을 출판하였다. 프랑스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한 이후 1959년 독일에서 열린 음악제에서 쇤베르크가 정립한 12음계에 한국 정악의 색채를 담아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윤이상은 가야금의 현을 뜯는 기법을 바이올린에 도입하고, 대금의 떨림을 플루트에 재현한다. 1971년 독일에 귀화하고 이듬해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 《심청》을 공연하였다. 교향곡부터 오페라까지 1백 50여곡을 남겼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78쪽
  •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에 윤이상, 이인범, 전봉초, 이봉수 등이 참여한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82쪽
  • ‘동베를린 사건’과 작곡가 윤이상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의 대남 공작단 사건」을 수사해 온 서울지검 공안부 이종원 부장검사는 29일 상오 제3차 수사결과로 음악가 윤이상(50·서울 성북구 성북동 128의13) 씨 등 18명을 구속기소, 전국외기노조 오산지부 상무 어원(51) 씨 등 4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모두 22명 을 기소하고 서독 「쾰른」대학 대학원 학생 배준상(32) 씨 등 5명을 불기소 처분했다. 이로써 검찰은 이 사건에 관련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송치된 66명의 관련자 가운데서 31명을 구속하고 5명은 불구속기소, 6명에 대해서 불기소처분하고 오는 8월 2일 제4차 수사결과를 다시 발표하기로 했다. 이날 기소된 관련자들은 모두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이 적용되었는데 모두 자격정지까지 병과되었다. 불기소 처분된 5명의 관련자 가운데 배씨는 북괴를 찬양한 혐의가 없다는 것이 밝혀져 무혐의 불기소되었으며 「캘리포니아」 대학강사 하태길(31), 「노트르담」 대학 화학과연구원 강성종(31)씨 등은 26세부터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우리나라의 동량이 될 인재들이기 때문에 정상을 참작하기로 했으며 강빈구 씨의 처 강·하이드론 게란드(31·서강대학 강사)씨는 정을 모르고 부부의 정에 끌렸다는 이유로 서독에 귀국시키기로 했으며 임석진 씨의 여동생 임애자(29)씨도 오빠에게 추종했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키로 했다. 『중앙일보』 1967. 7. 29.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3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윤이상 주소(현재): 성북동 128-13 분야: 음악(작곡)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 1953년 휴전 후 서울로 이주한 윤이상은 성북동에 집을 구해 이 지역의 문화예술인들과 돈독히 지내며 선배작곡가각 유언한 한국교향악운동과 더불어 예술과 예술인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는 운동을 이어가는데 매진하였다. 윤이상의 부인도 "유럽에서의 40년 고적한 삶을 생각하면 남편에게는 그때가 가장 인간미가 풍부하고 삶을 즐기며 산 한때"라고 회상하였다. 특히 그가 성북동에서 늘 어울렸던 사람은 시인 조지훈(1920~1968)인데 우리민족 전통유산의 뿌리와 줄기를 회복하자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든든한 동지였다. 윤이상은 이미 1948년 조지훈의 시 <고풍의상>에 곡을 붙인 바 있는데 외형상 피아노 반주가 붙은 서구의 예술가곡 풍이기는 해도 당시의 여느 가곡과 다르게 한국의 고전적인 멋을 노래한 시에 부합하는 섬세한 운율을 구현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세기 동유럽의 민족 음악가들을 봐도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분야는 역시 민족의 언어가 개입한 경우이기에 그가 만일 고국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은 예술가곡의 중흥기를 만나지 않았을까 아까운 마음이 드는 지점이다. 더불어 비전을 더욱 뚜렷이 세우고 그 꿈을 향해 내달은 청장년 윤이상을 느낄 수 있는 성북동이기에 그의 가장 찬란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받아주신 현재 주민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성북문화원, 2017, 성북문화 제5호, 48쪽
    홍은미(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윤이상과 성북동' 강의를 마치고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0

관련 마을아카이브

  • 이야깃거리
    동백림 사건
    분류: 사건
    시기: 현대
  • 박태원
    이야깃거리
    박태원
    분류: 인물
    시기: 조선시대
  • 조지훈
    이야깃거리
    조지훈
    분류: 인물
    시기: 일제강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