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식
1913.03.27 - 2012.07.03
인물 개인 화가
서양화가이다. 1931년 숭실중학교 재학 당시 제2회 녹향회(綠鄕會) 공모전과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진출하였다. 일본 도쿄제국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1941년에 귀국하여 평북 선천 보성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이래 서양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아갔고 1970년부터 1977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국전쟁으로 고향과 가족을 잃은 뒤 평생 고향을 상징하는 소재인 저녁노을, 비둘기, 돛단배, 시골풍경을 작품에 담았다. 1963년 성북동으로 이사하여 마을 풍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화실에서 〈교회와 비둘기〉, 〈귀로〉, 〈성북동 풍경〉 등의 작품을 창작했다. 성북구립미술관에서 100세 기념전을 연 뒤 같은 해 성북동 집에서 타계하였다.
성북동
  • 윤중식 가옥(2)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尹仲植
  • 이명칭: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화가

시기

주소

  • 주소: 02835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45-23 (성북로14가길 13-14)
  • 비고: 윤중식 가옥

근거자료 원문

  • 서양화가 윤중식은 191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에는 연국배우, 연출가, 지휘자를 꿈꿨을 정도로 예술적 재능이 풍부하였다. 아코디언을 능숙하게 연주하고, 수영대회에서 입상을 할 정도로 수영실력도 뛰어났다. 그렇지만 자신의 감성과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는 매개는 그림이었다.
  • 1931년 숭실중학교 재학 당시 제2회 녹향회(綠鄕會) 공모전과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진출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출품한 작품 <농촌풍경>은 '광선을 재미있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고, 11회, 12회에 연이어 입선을 하면서 유화실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평양에는 김관호 선생의 영향으로 어느 지역보다도 서양화가 지망생이 많았다. 김관호는 고희동과 함께 한국 서양화 개척의 선구 역할을 하였는데, 평양에서 삭성회(朔星會) 회화연구소를 중심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종종 부친을 만나러 집에 온 김관호 선생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윤중식을 눈여겨 보곤 했다. 대동강변에 나가면 선배화가들이 이젤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그 모습을 해가 지는 줄도 모르게 지켜보곤 하였다 1935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개척해 나가며, 화가로서 역량을 키웠다.
  • 다재다능했던 윤중식은 한때 연출가의 꿈을 꾸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연극과 영화사업을 하던 동경 동보영화촬영소 미술부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다. 1941년에 귀국을 하여 평북 선천 보성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사 생활 중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여 이듬해에는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석영(石映)>으로 입선하였고, 1943년에는 평양에서 6인전을 개최하였다.
  • 1953년에는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가을풍경>으로 특선을 수상하고, 1954년 6월에는 윤중식 첫 개인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한국의 서양회화 도입 시기에 선구적인 역할과 개성적인 조형세계를 이룩한 화가로 평가받았다.
  • 전쟁으로 고향과 가족을 잃은 윤중식에게 한국전쟁은 크나큰 아픔이었다. 1·4후퇴 때 1남 2녀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에 피난인파에 섞여 아내, 딸과 해주 근처에서 헤어졌다. 고생 끝에 두 아이와 한 달 만에 서울에 도착했으나 둘째 딸마저 부산에서 병으로 잃었다. 1959년에 재혼을 한 후 두 딸을 낳으며 서울에서 생활의 안정을 찾는다.
  • 저녁노을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고 애착을 가지는 소재이다. 대동강변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며 가슴 속에 새겨두었던 저녁노을이다.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 비둘기 또한 그가 추억하는 고향의 한 단편이다. 어렸을 때 비둘기를 관찰하고 저마다의 성격을 구분하길 좋아했다. 생김새도, 몸짓도 어느 하나 똑같지 않은 그림 속 비둘기들은 제각각의 다른 의미를 지닌다. 때로는 평화를, 때로는 고향집과 가족을 상징하는 비둘기는 윤중식의 이야기를 전하는 매개체이자, 그 자신이기도 하다.
  • 클래식 음악이 항상 흐르는 화실은 성북동 풍경이 훤히 내려 보이는 언덕에 있다. 윤중식에게 성북동은 제2의 고향이다. 1963년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우거진 숲이 아름다운 성북동으로 이사하여 작품 활동을 하는 것도 어느덧 50년이 다되었다.
  • 2010년 7월 28일, 성북구립미술관 개관 기념전에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산증인인 원로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98세, 최고령 작가로서 출품한 작품은 그 세월만큼이나 묵직한 존재감을 보였다. 그림 속에 삶과 추억을 담는 윤중식은 '그리고 또 그리는' 작업 속에서 행복함을 느낀다.
  • 연보 1913년 평안남도 평양시 출생 동경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 국전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수상 서울문화상, 은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미술부문) 개인전 화신백화점 화랑(1954), 동화백화점 화랑(1956),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1958), 반도화랑(1962), 신문회관화랑(1968), 현대화랑(1971, 75, 76, 78, 82), 조선호텔 화랑(1973), 갤러리 현대 30주년 기념전(2000) 등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한민국예술원 미술관
  • 1913~2012 평남 평양 출생. 자연 풍경을 유화로 담은 화가이다.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1931년 제2회 녹향회綠鄕會 공모전과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진출하였다. 일본 동경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1941년에 귀국하여 평북 선천 보성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43년 평양 체신회관에서 이중섭, 황염수 등과 6인 전을 개최하였다. 한국전쟁으로 고향과 가족을 잃은 뒤 평생 고향을 상징하는 소재인 저녁노을, 비둘기, 돛단배, 시골풍경을 작품에 담았다. 1963년 성북동으로 이사하여 마을 풍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화실에서 <교회와 비둘기>, <귀로> 등의 작품을 창작한다. 성북구립미술관에서 100세 기념전을 연 뒤 같은 해 성북동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55쪽
  • 평양이 고향인 ‘석양의 화가’ 윤중식은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생을 하러 자주 평양 근교 감흥리 옥수수밭에 나가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따라 짙게 깔리는 노을의 아름다움에 감격해 한참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습관이 어린시절 생긴 것이다. 옥수수 밭에 누워 따스한 햇볕을 쬐다가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감으면 바람소리, 이름 모를 곤충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옥수수밭을 작가는 참으로 사랑했던 것 같다. 1931년 숭실중학교 재학 당시 2회 녹향회 공무전과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진출했다. 선전 서양화부 출품작 <농촌풍경>은 광선을 재미있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아마도 그가 평양 근교의 옥수수 밭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들이 그 답이 될 것이다. 11, 12회 연이어 입선하면서 유화실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평양에는 김관호 선생의 영향으로 어느 지역보다 서양화가 지망생이 많았다. 김관호 선생은 고희동과 함께 한국 서양화를 개척한 천재적 화가로서, 평양에서 ‘삭성 회화연구소’를 세우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종종 부친을 만나러 집에 오곤 했던 김관호 선생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윤중식을 눈여겨 보았다. 학창시절 연극배우, 연출가, 지휘자를 꿈꿨을 정도로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작가는 그림으로 진로를 정하고 1935년 일본 도쿄제국미술학교(현재 무사시노미술대학)로 유학을 떠난다. 1941년 귀국 이후 평북 선천 보성여고 미술교사로 일하면서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서 이듬해 21회 선전에서 <석영(石映)>으로 입선했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대구와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도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전쟁직후 1953년 열린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가을풍경>으로 선을 수상하고 1954년 6월 첫 개인전을 열었다. 특히 전쟁으로 고향과 가족을 잃은 작가에게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평생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작가는 1.4후퇴 때 부인과 1남2녀를 데리고 피난하던 중 딸 하나를 데리고 오던 아내와 해주 근처에서 헤어졌고, 고생 끝에 두 아이와 한달만에 서울에 도착했지만 둘째 딸마저 부산에서 병으로 잃었다. 1959년 재혼 이후 두 딸을 낳고 나서야 서울에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고향과 가족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은 그의 작품에 흐르는 심상이다. 고향을 상징하는 소재이 저녁노을, 비둘기, 돛단배, 시골풍경은 따뜻하고 포근한 어린 시절 고향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다. 특히 저녁노을은 작가가 변치 않고 애착을 가진 소재다. 대동강변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며 가슴 속에 새겨두었던 노을은 그의 화폭에 다양하게 변주되어 흐른다. 비둘기 또한 그가 추억하는 고향의 또 하나의 단편이다. 어렸을 때 비둘기를 관찰하고 각각의 성격을 구분하길 좋아했다고 한다. 생김새, 몸짓, 어느 하나 똑같지 않은 그림 속 비둘기들은 제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다. 때로는 평화를, 때로는 고향집과 가족을 상징하는 비둘기는 윤중식의 이야기를 전하는 매개체이자, 그 자신이기도 하다. “평양에서 미곡상과 정미소를 하던 우리 집에는 비둘기가 1백여마리 살았다. 그놈들은 철저하게 1부1처제를 지키면서 인간세계처럼 부부간의 애정이 말도 못할 정도였다. 나는 비둘기 집을 여러 개 만들어 처마 밑에 달아주곤 했다. 나는 내 맘속에 살아 있는 그때의 비둘기들을 그리는 셈이다. 즐겨 그리는 저녁놀 역시 중학교 때 사생하러 들에 다갔다가 그 뒤로 계속 그리게 된 것이다” (작가의 말) 1963년 작가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우거진 숲이 아름다운 성북동으로 이사했다. 그의 집 화실에는 항상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성북동 풍경이 훤히 발아래 펼쳐진다. 홍익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길러내고,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작가는 100세가 되던 2012년 제2의 고향으로 여긴 성북동의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상수(上壽·100세)전을 열고 몇 달 후 세상을 등졌다. 미술평론가 오광수 씨는 "윤중식 화백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표현적인 묘사가 강하고 재야보다는 국전을 중심으로 한 정통파로 분류된다"고 평했다. 특히 풍경화는 빛의 묘사가 절묘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03-204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 윤중식 주소(현재) : 성북동 145-23 분야 : 미술(서양화) 비고 : 윤중식 가옥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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