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옥
1918 - 1976.06.27
인물 개인 음악가
우리나라 1세대 성악가이다. 일본 무사시노 음악대학 본과 성악부 수석 졸업하였다. 귀국 후 연 독창회로 주목받았으며, 1950년 현제명이 제작한 우리나라 첫 창작 오페라 「춘향전」에서 이인범과 함께 주인공으로 호흡을 맞췄다. 남편 테너 한규동과 함께 한양도성 근처 삼선동에 살았는데, 첼리스트 전봉초와 소설가 정한숙 가족과 아래 윗집에 살면서 세 가족이 서로 오가며 가족처럼 지냈다고 한다. 서구 클래식의 흐름을 주시하여 1961년 메노티(Gian Carlo Menotti)가 작곡한 오페라 「전화」 전곡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한국 가곡의 발전을 이끌고 클래식 음악의 수준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한 선구자로 인정받아 1975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삼선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李觀玉
  • 이명칭: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음악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근거자료 원문

  • 193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민간 음악전문교육기관인 경성음악전문학원이 생기며 이관옥이 교수로 참여하는 가운데 개교 3주년 기념음악회의 초청연주자였던 전봉초와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며 초대 음악교수로 함께 일하고, 삼선동 이웃으로 지낸다. 1950년 현제명이 제작한 우리나라 첫 창작 오페라 <춘향전>의 주인공은 이관옥과 이인범이 맡았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82쪽
  •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길을 개척한 성악가이다. 일본 무사시노 음악대학에 입학하여 두성발성법을 기본으로 한 벨칸토 창법을 배웠다. 귀국 후 연 독창회로 주목받으며 성악가로 인기를 얻는다. 1950년 현제명이 제작한 우리나라 첫 창작 오페라 <춘향전>에서 이인범과 함께 주인공으로 호흡을 맞췄다. 삼선동 집은 성곽이 바라보이는 양옥집이었다. 세 채가 모여 있는 집을 마련해 아랫집은 신혼살림을 차린 후배 음악가 전봉초 가족에게, 윗집은 소설가 정한숙 가족에게 내어주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후학을 키웠고, 성악가였던 남편 한규동과 함께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한국 성악을 알렸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80쪽
  • 우리나라 1세대 서양음악가로 성악의 길을 개척한 이관옥은 1918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희경은 일제의 지배를 반대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한국인 최초로 미국 하와이에 병원을 연 의사였다. 이관옥이 태어나기 1년 전, 고향에서 자식을 낳고, 3·1 독립운동에 참여하려는 생각으로 귀국을 한다. 독립운동가들을 돕던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 중국 상해로 떠났다. 혼자 아이를 키워야하는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힘든 내색 없이 딸이 바르게 클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했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감수성을 키우고, 어머니의 희생과 인내정신, 아버지의 강건함을 배우며 자랐다. 먼 또 먼-그 가마귀 날개 같은 깜안 하눌을 바라보며 한없는 고독에 울었나이다. 그 검운하눌에 외로이 빛나는 한개의 별. 그 별은 나의 마음이랍니다. - 이관옥의 글 - 이관옥은 평양 최초의 여성 사립 교육기관인 서문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학년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연주 솜씨도 훌륭했지만 그보다 돋보이는 고운 목소리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음악선생이 성악을 권유한다. 서문여고보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성악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무사시노 음악대학으로 유학한다. 당당하게 수석으로 입학하여 다테마츠 후사코[立松房子]에게 4년 동안 지도를 받고, 학교 창립 이래 한국인으로는 처음, 수석으로 졸업하는 쾌거를 이룬다. 한편 벨트라멜리 요시코에게 두성발성법을 기본으로 한 벨칸토 창법을 배웠다. 일본인이었던 벨트라멜리는 이탈리아 시인과 결혼한 뒤 13년 동안 성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탈리아 작품을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가르쳐 주었다. 졸업연주회에서 뛰어난 기량을 펼치며 동경악단의 촉망받는 성악가로 이름을 알린다. 1938년 귀국하여 조선호텔에서 선배 음악가들을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었다. 데뷔는 성공적이었고 ‘맑은 목소리와 발성으로 충실하게 곡을 해석하여 깨끗한 발음으로 구현해 내는 연주자’라는 찬사를 받는다. 같은 해 6월 14일에는 첫 독창회가 조선일보의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렸다. 부민관 무대에 서는 것은 전문 공연장도 없고,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던 당시로서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조선일보는 성악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대학과 전문학교 졸업생을 초대하여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제1회 신인음악회를 통해 가곡 <가곡파>의 작곡가 김동진, 바리톤 김형로 등이 데뷔한다. 같은 무대에 선 이관옥을 본 관객들은 ‘목소리만큼 얼굴도 예쁘다’며 관심을 가진다. 음악계에서도 젊고 실력 있는 성악가의 활동을 반겼고, 5개월만인 11월 4일 경기음악전문학교 주최로 다시 독창회를 열었다. 한편, 1939년부터 경성음악전문학원의 강사로 활동한다. 다른 학교에서도 성악 강사로 초빙했지만,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설립자 바이올리니스트 김재훈의 뜻에 공감해 생긴 지 1년이 된 교육기관에 출강하였다. 1942년까지 독창회를 열어 성악가로 경력을 쌓은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벨트라멜리 성악연구원에서 3년 동안 공부를 한다. 한층 더 성장하여 돌아온 이관옥은 1945년 현제명이 설립한 경성음악전문학교에 출강하고, 1946년 학교가 서울대학교에 편입되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다. 해방을 맞고, 좌우의 사상대립이 양극화 되던 때, 지식인들도 지향하는 정치이념에 따라 조직을 구성했다. 음악계도 마찬가지로 이념과 지향점에 따라 세력이 나뉘었다. 이관옥은 채동선, 이흥렬, 한규동, 이인범 등과 함께 민족적인 음악문화를 수립하는 목표를 세우고 ‘대한연주가협회’에서 활동한다. 정치와 사상에 휘둘리지 않고, 순수한 음악 자체를 연구하고 알리려는 모임이었다. 이 무렵 성악가 이인선을 통해 오페라가 소개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1948년 사재를 들여 ‘국제오페라사’를 창설하고, 한국 오페라의 첫 공연인 베르디의 <춘희>를 공연한다. 그 후 해마다 한두 편씩 오페라가 공연되었고, 1950년에는 현제명이 우리나라 첫 창작 오페라 <춘향전>을 무대에 올린다. 현제명이 지휘를, 유치진이 연출을 맡았고 성악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이관옥, 이상춘, 이인범 등이 출연한다. 곱고 아리따운 여인 춘향 역을 이관옥이 맡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춘향전>은 한국전쟁 중에도 대구와 부산에서 공연되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가 의술로 사람들을 도왔던 것처럼 노래로 전쟁의 아픔을 달래고 상처를 보듬었다. 독창회와 오페라에서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며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명성을 얻었다. 콜로라투라는 오페라 아리아에서 쓰이는 선율을 말하는데 빠른 박자, 화려한 기교가 요구되는 양식이다. 고난이도의 다채로운 창법을 선보이려면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뒤따라야 했다.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가곡을 가르치며 서양고전음악은 지루하고 어렵기만 하다는 인식을 바꾸려고 했다.
  •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삼선동 집은 한양도성이 바라보이는 양옥집이었다. 전원 생활을 좋아했던 남편 한규동은 성곽 아래에 있던 집 세 채를 샀다. 너른 마당에 그네를 설치하고 벚나무, 등나무 따위를 심어 운치를 더했다. 텃밭에 채소를 길러 수확해 맛보는 재미도 있었다. 부부는 서울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후배 음악가 전봉초에게 아랫집 한 채를 내어주었고, 윗집 한 채에는 소설가 정한숙 가족이 들어왔다. 세 가족은 서로 오가며 가족처럼 지냈다. 가장 맏언니인 이관옥이 어른 노릇을 하며 대소사를 챙겼고, 손님들을 맞았다. 비슷한 또래인 아이들은 성곽 아래 넓은 공터에서 저희끼리 어울려 놀았다. 공연, 연습, 제자 양성까지 외부 활동을 하면서 6남매를 키우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같은 길을 가는 남편 한규동이 있어 일과 가정 모두 이끌 수 있었다. 자녀들은 자연스레 부모의 길을 따라 음악을 전공하였다. 큰 딸은 작곡가, 둘째 딸과 막내아들은 성악가, 셋째 딸은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1974년에는 셋째 딸의 반주로 독창회를 열어 모녀 음악회로 주목을 받았다. 오페라와 서양가곡을 공연하면서도, 우리 가곡을 알리는 활동을 펼쳤다.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소록 소록 잠들라’는 노랫말의 <자장가>(김대현 작곡, 김영일 작사)는 이관옥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이며 친숙해진 가곡이다. 고운 목소리에 따뜻한 감성을 담아 불러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또, <고향>에 새롭게 가사를 붙여 발표하였다. 한국전쟁 후 월북한 작가의 작품이 금지되어 정지용의 시에 채동선이 곡을 붙인 원곡을 부를 수 없었다. 훌륭한 곡이 잊히지 않도록 박화목의 시 <망향>, 이은상의 시 <그리워>를 <고향> 곡에 붙여 불렀고, 이관옥도 노랫말을 써서 <고향 그리워>라는 제목을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 서구 클래식의 흐름을 주시하여 1961년 매노티Gian Carlo Menotti가 작곡한 오페라 <전화> 전곡을 번역하여 출간하고, 이듬해 서울대 음대 학생들과 함께 무대에 올린다. 교수로 학생들의 재능에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는 열정적인 스승이었다. 남편 한규동과 함께 미국, 캐나다 등지를 순회하며 한국 성악의 수준을 세계에 알리기도 하였다. 1976년 세상을 떠난 이관옥은 언제나 소녀 같은 마음과 맑은 목소리를 유지하며 마지막까지 노래와 함께 살다 간 성악가였다. 한국 가곡의 발전을 이끌고 클래식 음악의 수준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한 선구자로 인정받아 1975년 국민훈장을 받았다. 한 마리 카나리아와 같았던 고왔던 모습을 이제 볼 수 없지만 그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래가 앨범으로 담겨 전해지고 있다.
  • 1918 평안남도 순천 출생 1938 일본 무사시노 음악대학 졸업 1938 제1회 독창회 개최 1939 경성음악전문학원 강사 1942 벨트라멜리성악연구원 유학 1946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 교수 1950 오페라 <춘향전> 주연 1961 매노티 오페라 <전화> 전곡 번역 출간 1975 대한민국 국민훈장 수여 1976 별세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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