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창
1913.03.28 - 2005.08.02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정릉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과 이은숙 여사의 장남으로 1913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남화한인청년동맹, 흑색공포단 등에서 활약하였다. 1935년에는 정화암, 엄형순과 함께 친일파 이용로를 사살하고 도피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징역 1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8월 감옥에서의 옥중투쟁으로 다시 가형을 받았다가 해방으로 출옥하였다. 1955년에는 체신부에 들어가 공직활동을 했고, 1974년 정년퇴직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0~1993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으로 참여하여 독립운동사 기술에 도움을 주었다. 1961년 정릉에 정착하여 어머니 이은숙 여사를 모시고 살았다.
정릉동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1 : 아버지 독립운동가 이규창에 대해서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2 : 할머니 이은숙과 가족들에 대한 기억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3 : 해방 후 독립 운동가들과 이승만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4 : 1960-70년대 정릉동 풍경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5 : 아나키스트로서의 삶과 이상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6 : 평범과 비범 사이, 독립운동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 이규창 집터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1 : 아버지 독립운동가 이규창에 대해서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2 : 할머니 이은숙과 가족들에 대한 기억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3 : 해방 후 독립 운동가들과 이승만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4 : 1960-70년대 정릉동 풍경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5 : 아나키스트로서의 삶과 이상
  • 우당 이회영 손자 이종철 6 : 평범과 비범 사이, 독립운동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李圭昌
  • 이명칭: 이규호(李圭虎, 李圭鎬)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716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226-33 (보국문로8다길 58)

근거자료 원문

  • 이규창은 1913년 3월 28일 만주 통화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회영, 어머니는 이은숙이었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앞의 두 아들은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조선 최고의 명문가라해도 손색없는 가문 출신이어서 힘든 생활이 처음이었지만, 그에게 고된 삶이란 태어날 때부터 예정된 운명이었다. 해방직전까지 그의 생활은 굶지만 않으면 다행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도 그에게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본 것도 태어나고 5년이 지나서였다.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쫓아다닐 때에는 어머니와 함께하지 못했다. 그런 그였기에 아버지를 만나 가족이 모여 살던 서울에서의 기억은 비록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평온한 나날’이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297쪽
  • 그가 어머니 이은숙 여사를 모시고 정릉에 자리 잡은 것은 1961년경이었다. 그는 막내 매제의 도움으로 정릉에 터를 잡았다. 당시의 집은 ‘재건주택’으로 불리는 작은 마당이 있는 단층 주택이었다. 이규창 선생의 아들, 이종철씨에 따르면 아버지(이규창)가 공직에 있어 어렵게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랬듯, 이웃 누구도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존경 받을 만한 삶이었지만 국가도, 이웃도 그를 기억해 주지 않았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은 것이 건국 20년 만에 국가가 그에게 해 준 유일한 보답이었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307쪽
  • 이규창 선생(1913-2005)은 이회영 선생과 이은숙 여사의 장남으로 1913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남화한인청년동맹, 흑색공포단 등에서 활약하였다. 1935년 아버지 이회영의 이동로를 밀고한 사람가운데 한 명인 이용로를 엄순봉 열사와 함께 암살하였으며, 이때 체포되어 1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가운데 해방을 맞이하여 출소했다. 해방 후에는 주로 공직에서 활동하였으며, 은퇴 후에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으로 참여하여 독립운동사 기술에 도움을 주었다. 1961년 정릉에 정착하여 2005년 서거할 때까지 어머니 이은숙 여사를 모시고 살았다.
  • 본적: 서울 주소: 정릉동 계열과 단체: 주중일국공사주살 <활동 내용> 서울 사람으로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부친 이회영(李會榮), 숙부 이시영(李始榮) 등이 만주로 망명하게 됨에 따라, 통화현(通化縣)에서 출생하였다. 그후 가족을 따라 북경(北京)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929년에 부친 이회영(李會榮)을 따라 상해로 갔다. 그의 부친은 1932년 11월에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주만일군사령관 등을 암살할 목적으로 대련(大連)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상해에서 화랑청년단(花郞靑年團)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백정기(白貞基) 정화암(鄭華岩) 오면직(吳冕稙) 엄순봉(嚴舜奉)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등과 같이 활약하였다. 1933년 3월에는 남화한인연맹의 행동단체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상해의 6 3정에서 당시 주중공사 유길명(駐中公使 有吉明)을 폭살 하려던 계획에 관련되었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에도 앞장섰다. 1935년 3월에는 정화암(鄭華岩)과 협의하여 엄형순(嚴亨淳;舜奉)과 함께 상해 조선인거류민회(居留民會) 부회장과 고문을 역임한 바 있는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사살하는 데 성공하고 도피하다가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뒤 1936년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엄순봉은 사형언도를 받았으며, 그는 징역 1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8월, 그는 마포감옥에서의 옥중투쟁으로 다시 징역 10월 23일형을 가형 받아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고 1945년 8 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35년-이규창 친일파 이용로 암살로 엄형순과 함께 체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쪽
  • ○ 해방 이후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이규창 아버지에 이은 운명적 독립운동가의 길 1913-2005 / 독립장 / 정릉동 226-34 거주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는 데 큰 이바지를 한 이씨6형제 중에서도 큰 활약을 했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셋째아들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과 상하이 등으로 이주하며 독립운동을 했고 1935년 동료 엄형순과 함께 친일파 이용로를 암살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13년 형을 선고 받고 수감생활 중 옥중에서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21쪽
    거주지 방문 결과, 주소는 정릉동 226-33인 것을 확인하였다.
  • ○ ‘경학사’ 하면 김동삼, ‘이씨 6형제’ 하면 이규창 경학사가 세워지기까지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이시영, 이회영 등이 포함된 이씨 6형제였습니다. 가문도 좋고 재력도 엄청났던 이들은 오직 조국의 미래를 위해,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으기 위해 땅과 재산을 모두 팔아버립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독립운동사에 공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는 이씨 6형제. 그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이가 이회영입니다. 그리고 그의 셋째 아들 이규창이 성북구에 거주한 바 있는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가문 전체가 오로지 나라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쳤듯 운명적인 독립투사의 길을 걸어갑니다. 만주에서 태어난 그의 활약은 1930년대 이후 도드라집니다. 1933년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주중공사 유길명의 암살을 계획하고 1935년에는 친일파 이용로를 사살합니다. 이후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옥고를 치르다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 이후 정릉에 거주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72-74쪽
  • 이규창 1913~2005 아버지 이회영과 어머니 이은숙 사이에서 태어난 이규창에게 고된 삶이란 예정된 운명이었다. 해방 직전까지 굶지만 않으면 다행이었고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도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을 태어나고 5년이 지나서야 처음 볼 수 있었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따라 다닐 때는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학교를 갈 처지가 되지 못했다. 마침 상해에 있는 이을규(李乙圭) 선생으로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중국동지들이 노동대학을 설립하게 되었으니 입학시키라는 편지가 왔으나 중국으로 갈 차비조차 없었다. 몰래 배를 타고 상해로 갔지만 학교가 설립되지 않아 돌아와야 했다. 그의 나이 12살이었다. 오랜 타지 생활로 약해진 이회영을 옆에서 모시고 보살피는 것은 이규창이었다. 혹여나 아버지가 돌아가실까 염려하여 주인집에서 홑옷을 빌려 입고 부잣집에서 버리는 매탄을 주어 쓸 만한 것을 골라 아버지 방에 불을 때곤 하였다. 비참한 생활이 이어졌지만 독립운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버지 이회영과 동지들의 심부름을 계속하였고 의열단과 다물단 등 단체 사이의 연락을 맡기도 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1930년 상해로 갔지만 임시정부의 상황은 비참했고 이규창은 약방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생활비를 보태고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1932년 이회영은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고자 몸을 피해 대련으로 향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곧 순국하였다. 독립운동가 내부의 배신자들 때문이었고 독립운동 진영은 내부 변절자들 제거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이규창은 5월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다 서대문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미결수 생활을 하며 감옥의 생리, 수감자들의 특성 등 감옥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을 배웠고 통방(通房)하는 것도 조선인 간수 채영식에게 몰래 익혔다. 1936년 이규창은 13년형을 확정 받고 마포형무소로 이감되어 인쇄공장으로 사역을 나갔다. 그곳에서 1937년 9월 어느 날, 이규창은 공산주의자 박세영과 함께 독립을 염원하는 강령이 담긴 팜플렛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징역 10개월이 추가되었고 독방 생활도 1941년까지 만4년을 하게 되었다. 이규창은 의무과장 장재성에 의해 가장 편한 사역장 가운데 한 곳인 의무실 사역으로 뽑혔지만 정신적으로 힘든 일을 겪어야 했다. 의무실에 오는 죄수들은 대부분 고문을 받고 굶은 상태에서 왔기에 당시 중환자를 돌보고 시신을 처리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횟수로 10년 복역한 이규창은 광복 후에야 형무소를 나왔다. 1948년 이후 이규창은 공직에 머물렀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5년에는 체신부에 들어가 서대문, 광화문 철도 우체국장을 역임하고 1974년 정년퇴직하였다. 이규창의 활동은 퇴임 후에도 멈추지 않았고 1990~1993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으로 참여하여 독립운동사 기술에 도움을 주었다. 이규창은 1961년경 막내 매제의 도움으로 정릉의 작은 마당이 있는 단층주택에 터를 잡고 어머니 이은숙 여사를 모셨다. 이규창의 독립운동 사실을 이웃 누구도 알지 못했다. 국가도 이웃도 기억해주지 않았다. 건국 20년 만인 1968년 건국훈장국민장을 받은 것이 유일한 보답이자 전부였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127-129쪽
  • 서울 사람으로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부친 이회영(李會榮), 숙부 이시영(李始榮) 등이 만주로 망명하게 됨에 따라, 통화현(通化縣)에서 출생하였다. 그후 가족을 따라 북경(北京)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929년에 부친 이회영(李會榮)을 따라 상해로 갔다. 그의 부친은 1932년 11월에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주만일군사령관 등을 암살할 목적으로 대련(大連)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상해에서 화랑청년단(花郞靑年團)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백정기(白貞基) 정화암(鄭華岩) 오면직(吳冕稙) 엄순봉(嚴舜奉)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등과 같이 활약하였다. 1933년 3월에는 남화한인연맹의 행동단체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상해의 6 3정에서 당시 주중공사 유길명(駐中公使 有吉明)을 폭살 하려던 계획에 관련되었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에도 앞장섰다. 1935년 3월에는 정화암(鄭華岩)과 협의하여 엄형순(嚴亨淳;舜奉)과 함께 상해 조선인거류민회(居留民會) 부회장과 고문을 역임한 바 있는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사살하는 데 성공하고 도피하다가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뒤 1936년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엄순봉은 사형언도를 받았으며, 그는 징역 1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8월, 그는 마포감옥에서의 옥중투쟁으로 다시 징역 10월 23일형을 가형 받아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고 1945년 8 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33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50 55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8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123 128 825 833 837 838 839 840 841 842면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 이종철 씨는 이규창의 장남이다. 이규창은 이회영과 이은숙의 장남으로 1913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이종철 씨는 할머니 이은욱과 아버지 이규창을 돌아가실 때까지 정릉에서 모시고 살았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성북문화원, 2019,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이 나, 217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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