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희
1918.01.14 - 2012.08.02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보문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이경식, 이동하, 이병기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집안의 영향을 받아 당연히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자랐다고 한다. 경성여자상업학교(현 서울여상)에 다니다가 중퇴한 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33년에는 숭인면 신설리(현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 있었던 종연방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전면에서 이끌다가 체포되었다. 1940년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는 북경에서 이육사가 감옥에서 순국하자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품인 「광야」 「청포도」 등 시 작품을 정리하여 국내의 유족에게 전달하는 중책을 맡아 수행하였다.
보문동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이병희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병희(1)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병희(2)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병희(3)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병희(4)
  • 종연방직주식회사 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李丙禧
  • 이명칭: 李秉熙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59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7가 111 (서울 성북구 안암로 5 )
  • 비고: 종연방직주식회사

근거자료 원문

  • 이틀 간격을 두고 일어난 서울고무회사 공장과 종연방적 경성제사 공장 파업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당시 서울고무공장 파업은 허마리아를 중심으로 지순이, 맹계임 등이 주도했고,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은 이병희와 이효정, 이순금 등이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이병희와 이효정을 들 수 있다. 이병희와 이효정은 친인척 관계로 이병희가 이효정의 고모였으나 나이는 이병희가 이효정보다 다섯 살 어렸다. 각각 경북 봉화와 서울에서 태어난 이효정과 이병희는 이경식, 이동하, 이병기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집안의 영향을 받아 당연히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자랐다고 한다. 10대 후반과 중반 서울로 유학 온 이효정과, 고모 이병희는 각각 동덕여자보통학교와 서울여상에 재학했으나 학교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내 학교를 떠나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며 1933년 9월 종연방적 노동자들의 파업을 전면에서 이끌었다. 파업 이후 이효정은 국내에 남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종사했고, 이병희는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특히 이병희는 북경에서 사망한 이육사 시인의 시신과 유품을 수습해 온 장본인이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130-132쪽
  • 서울 사람이다. 1936년 서울 종연방적주식회사(鍾淵紡績株式會社)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고, 1938년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이육사(李陸史) 등 의열단원(義烈團員)의 연락활동을 지원하였다. 장진홍 의사의 대구 조선은행 폭탄투척의거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바 있는 부친 이경식(李京植)의 민족의식을 이어받은 그는 동덕여자보통학교(同德女子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33년 5월 경성 신설동(新設洞) 종연방적주식회사의 여공으로 근무하며 항일활동에 나섰다. 1936년 그는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김희성(金熙星)·박인선(朴仁善) 등과 여성동지들을 규합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2년 4월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9년 4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그는 1939년 4월 출옥하자, 1940년 북경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고, 동지 박시목(朴時穆)·박봉필(朴鳳弼) 등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그러던 1943년 그는 국내에서 북경으로 망명 온 이육사(李陸史)와 독립운동을 협의하던 중, 이해 9월 일경에 붙잡혀 북경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잠시 국내로 잠입하였던 이육사도 붙잡혀 북경감옥에 함께 구금되고 말았다. 그는 1944년 1월 11일 결혼을 조건으로 석방되었으나, 이육사는 같은 해 1월 16일 옥중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이육사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품을 정리하여 국내의 유족에게 전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判決文(1939. 4. 14. 京城覆審法院)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別集 第6輯 129面 除籍謄本(李陸史 屍身의 北京監獄에서 引受한 內容)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 (적색노조운동 참가자) 서울 출신으로, 1934년 권영태(權榮台) 그룹에 참가했다. 영등포 기린맥주공장의 노동자파업을 선동했다. 1936년 2월 김희성(金熙星)과 결혼하고 적색노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12월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39년 4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강만길, 성대경, 1996,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336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9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