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1910 - 1937.04.17
인물 개인 문인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본명은 김해경이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 『이상(異狀)한 가역반응』이라는 첫 시집을 발표하며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1934년에 ‘구인회’에 참가하여 성북동의 예술인들과 교류하였으며 박태원의 소설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1936년 흥천사에서 변동림(김향안)과 결혼 후 약 3개월간 동소문 밖 성북동에서 신혼생활을 하였으나,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1년 후인 1937년에 일본에서 사망했다. 부인 변동림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귀국하였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대표작 「오감도」(1934), 「날개」(1936) 외에도 2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성북동
  • 이상_정본 이상 문학 전집2 표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李箱
  • 이명칭: 김해경(金海卿, 본명)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문인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비고: 활동지, 미아리 공동묘지(묘지)

근거자료 원문

  •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 유쾌하오. 위의 내용은 이상이 쓴 소설 『날개』의 한 부분이다. 그가 말한 대로 그는 천재였다. 스스로 박재라고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훗날 그의 작품은 국문학을 전공하는 많은 사람에게 큰 숙제를 남겼다. 이상의 일생과 문학을 다루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이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만 하고 넘어 가고자 한다. 이상은 1910년 8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김해경金海卿이다. 부모는 모두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다. 1912년 그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부모는 가난했지만, 큰아버지는 유복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신명보통학교를 나와, 역시 경성에 있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진학한 학교는 경성공업고등학교였다. 1929년 이곳을 졸업하고 이상은 조선총독부 건축과의 기수로 취직한다. 이상李箱이란 이름은 본래 동생과 아내 변동림의 증언에 따라 조선총독부 건축과 재직 시절 한 인부가 그의 성을 이씨로 착각하여 긴상金さん이라고 불러야 할 것을 이상李さん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총독부에 재직하기 이전인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졸업 앨범에서 이상이라는 자필 서명이 발견되며, 그 이전부터 이상이란 필명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됐다. 현재로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 가운데 한명인 화가 구본웅에게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畵具箱子에서 연유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설이 갈리는데 화구 상자에서 상箱을 따왔고, 가장 흔한 성 가운데 아무거나 붙이기로 해서 이李를 사용하여 이상이 되었다는 설이 있고, 받은 상자가 오얏나무李 상자箱라서 이상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상이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1년 『이상異狀한 가역반응』 이라는 첫 시집을 내면서부터였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2,000여 편의 많은 작품을 남긴다. 그의 소설이나 수필과 달리, 시는 난해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연작시 「오감도」는 총 30회 연재로 계획되었지만, 독자들의 항의로 15편에서 그쳤다고 한다. 그는 1933년 건강이 악화되어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를 그만 둔다. 건강 악화의 원인은 폐병이었다. 이상의 폐병은 그가 죽는 날까지 그를 괴롭힌다. 그 역시 폐병이 많이 괴로웠는지 그 고통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아침 캄캄한공기를마시면폐에해롭다. 폐벽에끌음이앉는다. 밤새도록나는몸살을앓는다. 밤은참많기도하더라. 실어내가기도하고실어들여오기도하고하다가잊어버리고새벽이된다. 폐에도아침이켜진다. 밤사이에무엇이없어졌나살펴본다. 습관이도로와있다. 다만내치사한책이여러장찢겼다. 초췌한결론위에아침햇살이자세히적힌다. 영원히그코없는밤은오지않을듯이. 총독부 건축과 기수를 그만둔 이상은 먹고 살기 위해 종로 1가, 인사동 등에서 다방을 하지만 경영에는 소질이 없었는지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문학 활동은 계속 했다. 1934년에는 이태준, 정지용 등이 만든 구인회에 참가하여 문학 활동을 하며, 이때 소설가 김유정과 친해졌다. 그의 연인으로 알려진 사람은 그가 요양을 하러 온천에 내려갔을 때 만난 금홍, 1936년 6월 결혼한 변동림 둘이다. 금홍은 이상의 사업이 계속 실패하자 도망갔고, 변동림은 그의 최후를 지켜보고 그의 장례까지 치르게 된다. 그는 도쿄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1937년 새로운 세상을 찾아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기에 도쿄는 실망스러운 장소였다. 조선 땅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지만, 지병인 폐병이 악화됐다. 업친 데 겹친 격으로 일본 경찰에게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한 조선인)으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때 그의 건강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된다. 일본 경찰은 그가 더 이상 살지 못할 것 같아 보이자 그를 병보석으로 출감시킨다. 일본 경찰의 예측대로 그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937년 4월 7일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인 변동림과 몇몇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한다. 변동림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일본에서 화장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의 추도식은 그보다 며칠 앞서 명을 달리한 친구 김유정(3월 29일 사망)과 함께 5월 15일 개최되었고, 그의 시신은 추도식 후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이후 그의 묘지는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 희미해져갔다. 특히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 더욱 그랬다. 결국 그의 묘지는 미아리 공동묘지가 주택가로 개발되던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 언젠가 사라졌다. 천재 이상의 무덤은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 『종생기終生記』에 자신의 묘지명을 남겼다. 一世의 鬼才 李箱은 그 通生의 大作 『終生記』 一篇을 남기고 西曆 一千九百三十七年 丁丑三月三日 未時 여기 白日아래서 그 波瀾萬丈(?)의 生涯를 끝막고 문득 卒하다. 享年 滿二十五歲와 十一個月. 嗚呼라! 傷心커다. 虛脫이야 殘存하는 또하나의 李箱 九天을 우러러 號哭하고 이 寒山 一片石을 세우노라. 愛人貞姬는 그대의 歿後 數三人의 秘妾된바 있고 오히려 長壽하니 地下의 李箱아! 바라건데 暝目하라. 그리 칠칠치는 못하나마 이만큼 해 가지고 이꼴저꼴 구주레한 흠집을 살짝 韜晦하기로 하자. 고만 失手는 如上의 妙技로 兼사兼사 메꾸고 다시 나는 내 半生의 陣容 後日에 관해 차근차근 考慮하기로 한다. 以上. 일세의 귀재 이상은 그 평생의 대작 『종생기』 한 편을 남기고 1937년 3월 3일 미시(未時:13시~15시 여기 밝은 햇빛 아래서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끝내고 죽다. 향년 만25세 11개월. 오호라. 상심이 크다. 허탈이야 잔존하는 또 하나의 이상. 구천을 우러러 목 놓아 슬피 울고, 이 차가운 산에 한 조각의 돌을 세우노라. 애인 정희는 그대가 죽은 후 세 사람 정도의 비첩(秘妾: 숨겨놓은 첩)이 된 바 있고, 오히려 장수 하니 지하의 이상아 바라건 데 눈을 감아라. 그리 칠칠치는 못하나마 이만큼 하여 이런저런 못난 흠집을 살짝 감추기로 하자. 작은 실수는 위와 같은 묘기로 겸사겸사 메우고 다시 나는 내 반생의 진용을 후일에 차근차근 생각하기로 한다. 이상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35쪽
  • 구인회 회원들도 성북동을 찾았다. 수연산방을 나와 성북천을 건너 조금만 오르면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걸어서 5분도 되지 않을 거리이다. 이 별장에서 이태준은 구인회 회원인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단순히 그 한번뿐만 아니라 구인회 회원들은 자주 성북동을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수연산방은 일종의 별장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런 좋은 곳을 손님들이 가만히 두었을리 없다. 구인회는 이후 여러 번 회원들의 교체를 겪는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김상용, 이상, 김유정, 김환태 등 8명이다. 구인회는 1936년 동인지인 『시와 소설』의 발행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접는다. 구인회도 1936년 10월에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지용, 이상, 박태원 등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이상은 1937년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정지용, 박태원과는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함께 활동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32쪽
  • 지성의 관사를 잠시도 벗지 않고 쓰고 다니던 최재서도 이상의 화술에 단숨에 매료 되어 버렸다. 그가 이상을 처음 본 것은 [기상도] 출판기념회가 끝난 뒤에 가진 영보그릴의 맥주파티에서였다. 그곳에서도 이상은 구인회 모임에서와 똑같이 시니컬한 웃음을 웃으면서 기지발랄한 스피치를 종횡무진으로 구사하고 있었다. 그의 시나 소설보다 더욱 천재기가 번뜩이는 듯했다. 그때 그가 무슨 말을 어떤 식으로 했는지 최재서가 기록해 두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오감도]나 [날개]의 대화로 보아 그것이 상식과 비상식 사이를 출몰하는, 그래서 상식인으로서는 쉽사리 대응키 어려운 것이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게릴라 같은 것이었을 터이다. (중략) 그런 이상도 그의 생명이 2,3년 밖에 남지 않은 35, 36년 무렵에는 재담의 빛도 약해지고 울고 웃는 감정의 밑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혜화전문 시절의 徐廷注(서정주)가 咸亨洙(함형수) 李成範(이성범)과 함께 이상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그의 목숨의 끝을 보고 있는 듯한 창백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그들은 종로통의 술집을 거쳐 반도 호텔 뒤의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주모에게 약주를 청한 뒤 이상은 분위기를 잡을 겸 그의 장기인 창부타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세 사람도 따라서 불렀으나 이상의 노래 솜씨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만큼 이상의 음색이나 창법은 빼어난 데가 있었다. “대단한 노래다. 대단한 노래”라고 서정주가 내심으로 감탄하고 있을 무렵, 이상은 그의 화법이 그렇듯이 갑자기 주모의 젖가슴 위에 있는 단추를 누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장난기로 발아들이던 주모가 누르는 엄지손가락의 강도에 못이겨 “야야야” 소리지르기 시작했고, 그는 그의 생명의 구급용 벨을 누르듯 더욱 힘껏 놀러댔다. 그의 얼굴엔 정시하기 어려운 살기가 파랗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여 뒤 그는 동경에서 죽어 휜 유골로 돌아왔다. 몇 사람의 친우들이 유골과 얼굴 스케치를 놓고 장례를 치렀다. 『경향신문』 1983. 3. 5.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74
  • 시인소설가. 서울 출생.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1933년 다방‘제비’를 차리고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등과 교류하였다. ‘구인회’에 가입하고 박태원 소설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작품으로「오감도」(1934), 「날개」(1936) 등이 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2-16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