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강
1937.03.16
국가무형문화재
인물 개인 음악가
유물 무형문화재
성북구에 거주하는 국악인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이다. 대금산조의 명인 한주환을 사사했고, 대금, 태평소, 단소 등 부는 악기의 명인들에게 남도, 서도, 경기지역 음악을 모두 전수받았다. 재즈나 팝송 등 다른 장르와 서양악기와 협연하고, 앨범을 내는 한편 대금과 단소 교본 발간, 제자 양성, 국내외 공연 등 국악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1997년 혜화문 건너편 삼선교에 4층 건물을 짓고, 종로구 와룡동에 있던 대금전수소를 집 근처에 마련하였다. 집을 다시 돈암동으로 옮기고, 전수소는 성북동으로 이사하였다. 1996년 12월 10일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돈암동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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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66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 1가11-71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죽향(竹香) 이생강(李生剛) 선생은 1996년 12월 10일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세계각지에 국악을 알리는 일에 일생을 바쳐 온 ‘예인(藝人)’중의 예인이다. 우리나라 대금산조(散調)는 20세기 초 한숙구(1849~1925)·박종기(1879~1941)가 처음 연주한 이래 한주환(韓周煥), 한범수(韓範洙)를 거쳐 이생강으로 계보가 이어진다. 경남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를 원적으로 둔 이생강 명인은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출생하여 그의 천부적인 ‘부는 소질’을 알아본 아버지(이수덕 · ~1975)의 손에 이끌려 처음 ‘피리’를 잡은 뒤 국악 예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해방되던 해에 부산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국악인으로서의 수련기를 거치게 되는데 이때 그의 일생에 최대 전환인 당대 대금산조 최고 명인인 한주환(1906~1966)과 사제의 연을 맺은 사건을 맞는다. 어린 이생강의 단소 소리에 반한 한주환은 자신의 문하에 입문시켜 ‘죽향’이란 아호까지 지어 주었다. 이생강의 연주는 당대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된 것을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대금·소금·단소·피리·쌍피리·퉁소·태평소 등 전통 죽관악기를 모두 통달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민속악의 계승과 발전에 굵직한 궤적을 남기고 있다.
  • ▫ 중요무형문화재 제 45 호 대금산조 大笒散調 시대 : 기능보유자 : 이생강(李生剛)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삼선동 1가 11-71 지정연월일 : 1965 대금산조는 대금(大笒)으로 연주하기 위해 만든 산조(散調)이며 기능보유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생강이 성북구에 거주한다. 대금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횡으로 부는 피리의 하나로서 그 기원이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 고유의 대표적인 악기의 하나이다. 대금은 예부터 오랫동안 쓸 수 있는 황죽(黃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으나 최근에는 쌍골죽(雙骨竹)으로 만들어진 것을 최고로 친다. 즉 대나무의 양쪽 옆 위에서 밑에까지 도랑이 패어있는 대나무로, 속이 비어 있지 않고 살이 두터운데다가 거의 속이 차 있어 그 살을 패어내 뚫지 않으면 안 된다. 피리의 좌상(左上)에 취공(吹孔)이 있고 밑에 청공(淸孔)이 있는데 여기에 갈대 속에 있는 엷은 막을 붙여 진동시킴에 따라 대금의 맑은 음색을 조장(助長)시킬 수가 있다. 그 밑에는 지공(指孔)이 6개, 그 밑에는 고음(高音)과는 관계가 없는 허공(虛孔)이 5개 있다. 대금을 부는 법에는 저취(低吹)・평취(平吹)・역취(力吹) 3종류가 있는데 저취법은 부드러우며, 평취법은 곧고 굳게, 그리고 가장 높은 음을 내는 역취법은 청월한 음색을 낸다. 산조(散調)란 전라도 지방에 무속음악(巫俗音樂)과 관련이 있는 시나위(일명 心方曲 또는 神房曲)를 기조로 해서 여기에 판소리의 영향을 받아 정립한 민속악의 기악독주곡(器樂讀奏曲)이다. 19세기경 가야금의 명인 김창조(金昌祖, 1865~1920)에 의해 처음 창조된 가야금산조가 그 시작인데, 그 후 가야금산조뿐만 아니라 현금산조(玄琴散調), 대금산조(大笒散調)의 순서로 차례로 각 악기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기법이나 특색을 최대한 발휘해서 산조음악(散調音樂)을 파생시키는데 기본이 되었다. 대금산조는 대금으로 연주되도록 만들어진 산조를 말한다. 보통 판소리에 사용되는 장단과 선율로 되어 있으나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으로 4~6개의 악장(樂章)으로 구성되는 음악형이다. 대금산조에는 반드시 산조대금(散調大笒)이 쓰이지만 산조대금은 정악대금(正樂大笒)보다 그 기장이 조금 짧고 취공이 크고 음이 약 2율(律) 가량 높다. 산조 외에도 민속악을 연주하는 데는 지극히 편리하게 되어있다. 대금산조는 20세기 초에 박종기(朴鍾基)가 처음 만들었다고 하며, 그의 가락을 한주환(韓周煥)이 이어받아 이생강에게로 전승시켰다. 대금산조는 크게 두 가지로 음악적 특징을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 대금산조의 창시자인 박종기 류(類)의 ‘소리더늠 대금산조’이며, 또 하나는 강백천(姜白川, 1898~1982) 류의 ‘시나위더늠 대금산조’이다. ‘소리더늠 대금산조’란 소리 즉 판소리의 가락을 사용해서 만들어진 것을, ‘시나위더늠 대금산조’란 시나위 가락을 써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대금산조의 특징은 음의 장식적인 농음(弄音, 비브라토와 같은 것)과 즉흥성 등을 들 수가 있다. 산조에서 보여주고 있는 조(調)는 유파에 의해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략 진양조는 우조(羽調)・평조(平調)・계면조(界面調)로 구성하며, 중모리에서는 경조(京調)와 계면조가 주류를 이룬다. 중중모리에서는 계면조가 일반적이고, 자진모리에서도 계면조가 중심을 이룬다. 산조의 장단에는 보통 진양・중모리・자진모리가 큰 주(柱)로 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중중모리와 엇모리가 들어가는 일도 있다. 빠르게 연주하는 일이 가능한 현악기의 경우에는 휘모리가 들어가는 일도 있다. 가락의 붙임새(선율과 선율의 사이에 들여보내는 장식음)에는 붙임・엇붙임・완자걸이・잉여걸이・괴쪽뛰기 등이 있는데 이들 용어는 가락의 장식적 방법을 꾸미는 일종의 리듬기교를 이르는 것이다. 대금산조의 명인으로는 이생강 이외에도 편재준(片在俊)・김광식(金光植)・김동식(金東植)・김동렬(金東烈)・김영동(金永東) 등이 있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6, 1989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04-106쪽
  • ⑥ 大笒散調 大笒散調는 大笒으로 연주되도록 만들어진 散調를 말하며 196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성북구 삼선 1가11-71에 기능보유자(1992년 말 지정) 李生剛이 거주하고 있다. 大笒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橫으로 부는 피리의 하나로 그 기원이 新羅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韓國古有의 대표적인 樂器의 하나이다. 大笒은 옛부터 오랫동안 쓸 수 있는 黃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으나 최근에는 雙骨竹으로 만들어진 것을 最高로 친다. 즉 대나무의 양쪽 옆 위에서 밑에까지 도랑이 패어있는 대나무로, 속이 비어 있지 않고 살이 두터워 거의 속이 차 있어 그 살을 패어내 뚫지 않으면 안된다. 피리의 左上에 吹孔이 있고 밑에 淸孔이 있는데 여기에 갈대 속에 있는 짧은 膜을 붙여 진동시킴에 따라 大笒의 맑은 音色을 助長시킬 수가 있다. 그 밑에는 指孔이 6개, 그 밑에는 高音과는 관계가 없는 虛孔이 5개 있다. 大笒의 부는 법에는 底吹·平吹·力吹 3종류가 있고 底吹法은 부드러우며 平吹法은 곧고 굳게 그리고 가장 높은 音을 내는 力吹法은 청월한 音色을 낸다. 散調란 全羅道地方에 巫俗音樂과 관련이 있는 시나위(일명 心方曲 또는 神房曲)를 基調로 해서 여기에 판소리의 영향을 받아 정립한 民俗樂의 器樂獨奏曲이다. 19세기경 가야금의 名人 金昌祖(1865∼1920) 에 의해 처음 창조된 가야금산조가 散調의 시작인데, 그 후 가야금산조 뿐만 아니라 玄琴散調, 大笒散調의 순서로 차례차례로 각 악기가 가지고 있는 각자의 기법이나 특색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散調音樂을 파생시키는데 기본이 되었다. 大笒散調는 大笒으로 연주되도록 만들어진 散調를 말한다. 보통 판소리에 사용되는 長短과 旅律로 되어 있으나 느린 長短에서 빠른 長短으로 4∼6개의 樂章으로 구성되는 樂音形이다. 大笒散調에는 반드시 散調大笒이 쓰여지지만 散調大笒은 正樂大芩보다 그 기장이 조금 짧고 吹孔이 크고 音이 長 2度가량 높다. 散調외에도 民俗樂을 연주하는데는 지극히 便利하게 되어 있다. 大笒散調는 20세기초에 朴種基에 의하여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며, 그의 가락을 韓周煥이 이어받아 이생강에게로 전승시켰다. 대금산조는 크게 두가지로 음악적 특정을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 大笒散調의 창시자인 朴種基(1879∼1939) 類의 “소리 더늠 大笒散調”이며 또 하나는 姜白川(1898∼1982) 類의 “시나위더늠 大笒散調”이다. “소리더늠 대금산조”란 소리 즉 판소리의 가락을 사용해서 만들어진 것을 “시나위더늠 대금산조”란 시나위 가락을 써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 大笒散調의 특징은 音의 장식적인 弄音(비브라토와 같은 것)을 (形成) 즉흥성 등을 들 수가 있다. 散調에서 보여주고 있는 調는 流派에 의해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략 진양조는 羽調·平調·界面調로 구성하며, 중모리에서는 京調와 界面調가 주류를 이루고, 중중모리에서는 界面調가 일반적이고, 자진모리에서도 界面調가 中心을 이룬다. 散調의 長短에는 보통 진양·중모리·자진모리가 큰 柱로 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중중모리와 엇모리가 들어가는 일도 있다. 빠르게 연주하는 일이 가능한 鉉樂器의 경우에는 휘모리가 들어가는 일도 있다. 가락의 붙임새(선율과 선율의 사이에 들여보내는 장식음)에는 붙임·엇붙임·완자걸이·잉여걸이·괴쪽뛰기 등이 있는데, 이들 용어는 가락의 장식적 방법을 形容한 일종의 리듬기교를 이르는 것이다. 대금산조의 명인으로는 이생강외에도 片在俊·金光植·金東植·金東烈·金永東 등이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01-703쪽
  • 일본 동경 출생. 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 대금산조 기능보유자이다. 다섯 살 무렵부터 아버지에게 단소와 피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해방 후 대금 산조 명인 한주환을 스승으로 삼고, 대금, 태평소, 단소 등 부는 악기의 명인 스물 세 명에게 남도, 서도, 경기지역 음악을 모두 전수 받았다. 무용 음악 반주자로 활동하던 중 1960년 세계민속예술제 참가를 계기로 본격적인 독주 활동을 시작한다. 재즈나 팝송 등 다른 장르와 서양악기와 협연하고, 앨범을 내는 한편 대금과 단소 교본 발간, 제자 양성, 국내외 공연 등 국악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1997년 혜화문 건너편 삼선교에 4층 건물을 짓고, 종로구 와룡동에 있던 대금전수소를 집 근처에 마련하였다. 집을 다시 돈암동으로 옮기고, 전수소는 성북동으로 이사하였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75쪽
  • 죽향 이생강은 우리 민족 고유의 한과 흥이 담긴 민속악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대금 연주가이다. 본명은 이규식李圭植으로 1937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생강生剛은 일본인에게 지지 않는 굳은 의지와 기개를 가지라는 의미에서 아버지가 새로 지어준 이름이다. 그가 처음 악기를 만진 것은 다섯 살 무렵이다. 어린 나이에 몰래 일본으로 도망쳐 살아남기 위해 한국인임을 속이고, 일본인의 양아들이 된 아버지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단소로 달래곤 했다. 이생강은 아버지의 시름어린 표정이 싫어 재롱을 떨며 단소 부는 흉내를 냈다. 작은 손으로 단소를 잡고 부는 맵시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고 소리도 곧잘 냈다.
  • 1997년, 혜화문 건너편 성곽아래 삼선교에 집을 마련하였다. 큰 바위 위에 지어진 2층 집과 뒷집을 사서 바위를 평편하게 다듬고 4층 높이의 건물을 지었다. 종로에 있던 전수소도 삼선동 집 근처로 옮겼다. 20여 평 남짓한 연구소 벽면에는 그동안 걸어온 발자취가 담긴 상장과 사진이 빼곡했다. 한 해 100여 회 공연을 하면서도 연주 장소와 관객에 따라 매번 다른 연주를 하는 힘은 국악과 양악,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연구하고 시도하는 장인匠人기질에서 나온다. 삼선동으로 이사한 이후 이생강은 다양한 음악 장르와 협연을 활발히 펼친다. 1997년에는 소리꾼 장사익●, 피아니스트 임동창●과 함께‘공감콘서트’를 개최하여 피아노와, 사물놀이, 대금산조 등 분야를 넘나드는 무대를 선보인다. 이 공연은 ‘지금까지 볼 수 없던 신명나는 무대를 만들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우리에게 친숙한‘목포의 눈물’,‘ 소양강 처녀’ 등 트로트를 재즈연주가인 신관웅●이 편곡하고, 이생강이 대금으로 연주한 앨범 <희망가>를 발표한다.
  • 몇 년 전 맞은편 아파트로 이사하고, 대금전수소를 성북동으로 옮겼다. 아들은 중요무형문화재 전수조교로 뒤를 잇고, 손자들도 악기를 연주하는 국악 집안이 되었다. 수많은 제자들과 수십 종의 책과 음반이 이생강의 국악 인생의 보람으로 남았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악기를 처음 잡았을 때 느꼈던 마음과 우리 음악을 제대로 알리려는 열정을 가진 채 제자를 가르치며 연주를 하고 있다.
  • 1937 일본 동경 출생 1943 단소를 배우기 시작 1945 부산으로 이주 1960 프랑스 파리 세계민속예술제 참가 1965 임춘앵 여성창극단 음악악장 전국순회공연 1968 멕시코 올림픽 민속예술제 참가 공연 1977 제1회 대금산조 독창회 1988 88올림픽 폐회식 대금연주 1996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보유자 지정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이생강 주소: 성북동 분야: 음악(대금산조) 비고: 대금산조 전수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 大笒散調는 大笒으로 연주되도록 만들어진 散調를 말하며 196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성북구 삼선 1가 11-71에 기능보유자(1992년 말 지정) 李生剛이 거주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01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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