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구
1897.03.04 - ?
인물 개인 지역활동가
인물 개인 교육가
1930년대 성북동 지역사회 운동을 주도한 지역운동가이자 삼산학교 이사장이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성북리 구장(城北里 區長)을, 1936년 성북동이 경성부로 편입된 이후에는 성북정 총대(城北町 總代)를 담당했다. 그가 성북리의 구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지역학교였던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력은 당시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었는데, 그를 ‘항상 사회사업에 유의하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가 성북동이라는 지역사회에서 주민 대표직을 맡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경력(메이지대 출신, 고등보통학교 교사)과 함께 마을의 현안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지역사회에 능력과 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성북동
  • 경성부의입후보(京城府議立候補)푸로필 (3)-부립중학설립(府立中學設立) 이신구씨(李信龜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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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성부의입후보(京城府議立候補)푸로필 (3)-부립중학설립(府立中學設立) 이신구씨(李信龜氏)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비고: 성북리 189-5

근거자료 원문

  • 일본 명치대학 정경학부 졸업,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와 경성 협성실업학교 교사, 숭인면협의회원, 성북정 총대, 경성부회 의원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27쪽
  • 1930년대 성북정회城北町會의 출범 1930년대 성북동 지역사회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이신구李信龜였다. 그는 1897년 3월 4일생으로 성북구락부를 주도했던 서광훈보다 4살 위였으며, 성북리 189-5에서 거주했다. 이신구는 서광훈에 비해서 상류층에 속한 인물이었다. 일본에 유학하여 1917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정경학부 예과를 졸업하였으며, 1920년 같은 대학 정경과 2년 과정을 수료했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정주오산고등보통학교 교원, 1925년부터 1927년까지 경성협성실업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성북리 구장城北里 區長을,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숭인면 협의회원을 역임했다. 1936년 성북동이 경성부로 편입된 이후에는 성북정 총대城北町 總代를 담당했다. 1939년에는 경성부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이신구가 성북리의 구장을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구장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메이지대학 출신에 고등보통학교 교사 출신이라는 점이 기본적으로 작용했다. 이것에 더하여 지역 학교였던 삼산학교를 살려내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삼산학교는 지역 청년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에 빠져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신구는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신구의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이 신문기사에서는 이신구를 ‘항상 사회사업에 유의하던’ 인물로 묘사했다. 이신구가 성북동이라는 지역사회에서 주민 대표직을 맡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경력과 함께 마을의 현안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지역사회에 능력과 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신구가 성북구 구장이 된 1931년부터 1934년 시기에 성북리에는 여러 가지 지역주민운동이 있었다. 먼저 주민단합을 공고히 하는 지역축제들이 개최되었다. 1931년과 1932년에는 단오일을 맞아 ‘단오원유회’, ‘단오위안회’라고 불리는 마을축제가 열렸다. 1933년 7월에는 성북유치원이 설립되었다. 이 유치원은 성북리의 유지들이 설립했으며 원장은 유양호柳養浩였다. 성북리에는 성북유치원을 후원하는 후원회가 조직되었다. 구장이었던 이신구, 성북구락부의 구성원이었던 박성근, 이종린 등이 이사직을 담당했다. 이들의 활동에 의해 성북유치원을 위한 의연금이 모집되었다. 성북유치원이 설립된 지 2년 후인 1936년에는 성북리에 새로운 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의 이름은 영명학교永明學校였으며 신설목적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학령초과아동을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이학교의 원장은 이의석李義錫이었으며 이춘길李春吉, 유일劉鎰, 이희철李熙哲, 김상욱金湘旭 등이 이 학교의 직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무보수로 이 학교에서 일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1930년대 성북리에는 지역주민운동이 활성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신구의 역할과 함께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눈에 띄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92-94쪽
  • 성북정회의 활동 (1) : 신규 요정의 철폐 요구 1936년 4월 성북리가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일정한 명칭이 없던 성북동의 마을운영조직은 ‘성북정회’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마을일을 해오던 청년들과 유지들은 성북정회의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정회 총대로 이신구가 선출되었다. 성북정회는 성북동 주민들의 불만사항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 중 첫 번째는 마을의 주택지에 요정料亭을 허가한 행정당국에 문제를 제기하고 신규 요정의 설립 허가 조치를 취소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성북정에는 당시 유명했던 음벽정飮碧亭이 있었다. 성북정 주민들은 음벽정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음벽정이 생긴 이후 도로는 좁은데 자동차의 왕래가 심해져 통행에 불편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성북정에는 학교, 유치원, 예배당, 야학 등이 있었고, 1,500여명의 학생이 머물고 있었으며, 선생과 연구자 80여명이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 요정이었던 음벽정은 풍기상, 위생상 좋지 않은 곳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또 다른 요정이 설치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이에 이신구를 포함한 5명은 성북정회를 대표하여 동대문경찰서에 방문하여 요정허가의 부당함을 진정하였다. 그리고 동대문경찰서로부터 현재 있는 음벽정을 제외한 신규 요정은 허가하지 않겠으며 불편한 도로는 수리해주겠다는 답변을 얻었다. 이와 동시에 음벽정에도 요구사항을 제출했다. 하지만 음벽정에서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음벽정 측에서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실천하지 않자 주민들은 다시 정회를 열고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성북정의 주민들은 지속적인 요정 추방 운동을 벌이면서 성북동의 요정촌화를 막아낸 것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94-95쪽
  • 성북정회의 활동 (2) : 수도부설 진정운동 성북정회의 두 번째 활동은 수도부설 진정운동이다. 수도에 관련한 문제는 새롭게 경성부에 편입된 모든 지역의 문제였는데 성북정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36년 현재 성북정에는 약 800호, 4,00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물 한 개가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겨울철은 말할 것도 없고 여름철에도 혜화문 안에 있는 수돗물을 비싸게 사 먹어야 했다. 또한 불이 나면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주민들은 성북리가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수도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경성부로 편입된 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수도가 부설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성북정회에서는 이신구, 김창학, 윤병철 등 지역 유력자들이 발기인이 되어 경성부 수도과에 수도부설을 촉진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활동의결과 1937년 우선적으로 수도가 부설될 지역에 성북동이 포함되게 되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98쪽
  • 성북정회의 활동 (4) : 전염병원 설치 반대운동 성북정회의 또 하나의 활동은 마을 내에 전염병원 설치 반대운동을 한 것이었다. 1938년 2월 성북정에 전염병자를 위한 요양원이 설치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을 접한 성북정 주민들은 병원설립에 대한 반대의견을 표출했다. 하수도 설비가 없으며 수도시설이 없어서 우물물을 먹는 성북정에 전염병자를 위한 요양원이 만들어질 경우 주민의 건강상에 많은 위험이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병원은 성북동 상류지역에 설치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성북정 주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1938년 2월 16일 성북정회 회관에서 임원 35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먼저 교섭위원을 정해서 병원경영자인 정홍섭鄭弘燮에게 중지 권고를 하자는 것이 결정되었다. 만약 불응할 때에는 주민대회를 열고 동시에 당국에 진정하기로 결정했다. 교섭위원 6인은 서광전徐光前, 이휴선李烋善, 국수열鞠壽烈, 김창학金昌學, 김순철金順哲, 이신구李信龜였다. 회의의 결정에 따라 성북정회에서는 정홍섭에게 폐결핵 환자 수용을 주목적으로 하는 병원을 설치하는 것을 중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정홍섭은 병원이름을 내과라고 하고 계속 병원설립을 진행했다. 이에 성북정 유지 85명이 다시 모여 병원 설립을 반대하는 운동을 진행하였다. 이후 정홍섭이 경성보건의원京城保健醫院이라는 이름으로 병원을 열자 주민 630여 명은 병원에 반대하는 진정서에 날인했다. 이 진정서를 가지고 이신구, 김창학, 윤병철 등 8명이 동대문경찰서로 가서 제출했으며 병원이 운영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는 의견을 밝혔다. 이와 같이 성북정회는 지역사회의 이익을 도모하고 주민의 불편사항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성북정회의 활동이 모두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상당 부분 수용되었으며, 일정부분 경성부의 도시정책에도 반영되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02-103쪽
  • 삼산학교의 존재 여부를 걱정하는 주민들의 근심이 매우 높아졌다. 이러한 주민들의 걱정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되는 사람이 등장했다. 성북정회를 이끌었으며 후에 경성부의회 의원이 된 이신구였다. 이신구는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신구의 이러한 노력은 삼산학교 학부형들과 지역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12쪽
  • 경성부 의원에 입후보한 이신구 1939년 5월 4일자 『동아일보』에는 경성부회 의원에 입후보한 사람들의 사진과 함께 간략한 이력과 포부를 싣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서 이신구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먼저 희뜩희뜩한 머리카락에 많은 어려움과 고생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다음으로 과거 오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현재는 삼산소학교의 이사장으로 있다고 소개했다. 이신구의 포부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부립 중학교의 설립이었으며, 둘째는 토목 위생 시설의 촉진이었다. 이러한 이신구에 대해 신문 기사에서는 40대에 첫 출마하는 이신구에 대해 기대가 크다고 언급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92쪽
  • 삼산학교 이사장, 경성부 의원 입후보 부립중학 설립 히뜩히뜩한 머리카락에 풍상이 잠겨 있는 듯 오랫동안 오산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현재는 삼산소학교의 이사장으로 역시 교육에 몸을 바치고 있다. 씨의 말하는 포부는 교육확충에도 府立中學의 설립과 토목 위생시설의 촉진인데 인생은 40부터라고 이제 활동기에 첫 출마인지라 앞으로 기대가 크다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39. 5. 4.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60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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