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1933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교육가
인물 개인 언론인
문학평론가, 언론인이다. 1956년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경향신문』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에서 논설위원, 잡지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았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성북고등학교에 취직하여 학교 근처에서 살다가 삼선동으로 이사하였다. 경기고등학교 교사가 되며 성북구를 떠났으나 십여 년 뒤 다시 성북동으로 이사를 왔다. 신문에 연재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서는 우리 문화론을 펼쳤고, 1982년 발간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다뤘으며 그 외에도 2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삼선동 성북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근거자료 원문

  • 충남 아산 출생.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이다. 1956년 『한국일보』에 실린 평론 「우상의 파괴」로 일약 문단에 존재감을 알렸다. 스물여섯 살에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발탁되었고, 주요 일간지의 대표 필진으로 자리 잡았다. 1963년 신문에 연재한 에세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는 우리 문화론을 펼쳤고, 1982년 발간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다뤘다. 대학 졸업 후 처음 성북고등학교에 취직하여 학교 근처에 셋방을 얻어 살았다. 다시 삼선동으로 셋방을 구해 이사하였다. 경기고등학교 교사가 되며 성북구를 떠났으나 십여 년 뒤 다시 성북동에 집을 사서 이사를 온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연출, 초대 문화부 장관, 새천년준비위 위원장을 맡아 새로운 문화패러다임을 제시하기도 했다.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 영인문학관을 열고,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며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43쪽
  •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읍에서 태어난 이어령은 여섯 살 때 이미 동화를 쓸 정도로 문학에 재능을 보였다.
  • 글을 쓰는 한편 교단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첫 직장은 성북고등학교(현재 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였다. 당시에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미 문단에서 주목을 받고 있던 이어령은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으로 스승 이희승교수를 찾아가 고향에 생긴 대학에 추천을 부탁했다. 자신감 넘치는 당돌한 스물세 살 때 일이었다. 그러나 강의 경험이라고는 없는 졸업생이 당장 대학 교단에 설 수는 없었다. 패기보다 생활이 먼저였다. 게다가 대학 동기인 강인숙과 혼인을 해 가장으로서 책임도 있었다. 마침 성북고등학교에서 국어 선생님을 뽑았다. 혹시나 날카로운 인상 때문에 채용이 안 될까 싶어 풍채 좋고 말 주변 있는 친구에게 원서 접수를 부탁했다. 친구는 서울문리대(오늘의 서울대학 인문대) 학예부장을 맡으며 문단에 등단 신문에 이름까지 날린 이어령을 한껏 치켜세워 이 사람을 놓치면 학교로서는 큰 손실이라며 넉살을 떨었다. 친구의 활약으로 첫 직장을 구하고, 성북동에 셋방을 얻었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조지훈 선생 댁이 있었다. 소설가 전광용, 같은 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있던 조각가 송영수도 성북동에 살았다.
  • 얼마간 살던 성북동 단칸방을 떠나 근처 삼선동에 다시 셋방을 구한다. 집만 바뀌었을 뿐, 살림살이를 제대로 갖출 형편도 안 되어 궤짝을 놓고 글을 썼다. 잉크가 얼 만큼 추웠던 집은 신혼의 풋풋함으로도 지울 수 없는 남루한 단칸방이었다. 신혼, 첫 아이, 첫 직장의 기억이 모두 담긴 삼선동 셋방시절은 애틋한 추억이 되었다. 밖에서는「우상의 파괴」로 문단에 큰 파문을 일으킨 날카로운 평론가였지만, 집에서는 첫 아이를 안고 저녁 산책을 하는 다정한 아버지였다. 신혼 초를 보낸 성북동과 삼선동에서 첫 저서 『저항의 문학』(1959), 『지성의 오솔길』(1960)을 썼다. 다음 해 경기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기며 청파동으로 이사를 한다.
  • 남의 집에 세를 들었을망정 젊음과 신혼과 첫 직장이 있었던 삶의 스타트라인 출발점이 되었던 삼선동 성북동 일대는 어디를 가도, 내가 외국으로 이민을 가도 거기 자석처럼 내를 붙들어 매는 엥카(닻), 아무리 넓은 바다라도 닻을 드리우면 그곳이 하나의 생존의 공간이 되듯이 나에게는 충전점이 된다. 닻을 떨어뜨린 그런 곳이 바로 삼선동이다. - 이어령 -
  • 문학으로 사회를 통찰하고, 비평으로 문학을 꿰뚫어보던 그는 1972년 《문학사상》을 창간한다. 1958년 시사 잡지《새벽》에 최연소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어 전혀 새로운 도전은 아니었다. 주요 일간지의 논설과 칼럼, 평론과 에세이, 소설 등 다방면의 글을 쓰는 작가이자 대학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인 이어령의 저력은 잡지에 그대로 담겼다. 고전과 현대 문학 작품을 발굴하고, 작가 자료를 수집하였다. 해외문학 소개와 해외 석학 인터뷰, 신인 공모 등 문학계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노릇을 해냈다. 또, 문인들의 초상화를 표지로 내세워《문학사상》에 개성을 입혔다. 이어령은 1985년까지 권두 칼럼을 맡아 잡지의 색깔을 분명히 전했다. 이 무렵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성북동으로 집을 사서 다시 돌아왔다. 십여 년 전처럼 단칸 셋방이 아닌, 목조 이층집이었다. 문단과 언론 안팎의 활동이 무르익어 갔다. 젊은 시절 문단 선배의 실명을 걸고 날이 선 비평을 했던 것처럼 시인 김수영과 신문 지면에서 논쟁을 벌인다. 이어령은 정치권력에 눌리고 권력에 휩쓸려 가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모두가 숨죽여 사는 유신시대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소신을 가지고 행동했다. 김수영과 논쟁을 벌이기 전 반공법 필화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소설가 남정현의 증인으로 출두하여 당당히 검사와 맞서 그를 변호하였다.
  • 올림픽 후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된 자신을“새로운 집을 지으러가는 목수일 뿐”이라고 표현하였다. 집을 짓는 목수처럼 기초를 다지고 네 기둥을 세우겠다는 뜻이었다. 10개년 계획을 시작하며‘문화의 집’을 짓고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까치전화’를 만들었다. 2분 동안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는 까치전화는 하루에도 7백여 통이 넘게 올 정도였다. 우리 것을 찾고, 국민 모두 문화를 즐기는 생활 속 문화운동을 펼쳤고, 1993년에는 우수한 전문예술인들의 성장을 돕기 위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세운다.
  • 1933 충청남도 아산 출생 1960-1972 서울신문, 한국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중앙일보 논설위원 1966-1989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1994-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2001- 중앙일보 고문 2005- 앙코르-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6 한국측 조직위원장 2011- 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 2001 영인문학관 개관 2009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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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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