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기
1923 - 1942.05.23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성북동에서 거주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중동학교 재학 중이던 1940년 7월, 성북정 전태현의 집에서 함께 살던 손용우에게 '조선인은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해야 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같은 달 같은 곳에서 전태현과 손용우에게 일본은 패전할 것이므로 기회를 잃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1940년 9월에는 중동학교 교실에서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선독립이 실현될 것이라 말했고, 지원병제도를 반대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후 가혹한 신문과 조사를 받다가 판결이 나기 전인 1942년 5월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경성부 성북정 133-60(현 성북로 53-2)에서 전태현, 손용우와 함께 거주하였다.
성북동
  • 손용우 집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李完基
  • 이명칭: 石村完基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80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33-60 (성북로 53-2)
  • 비고: 경성부 성북정 133-60

근거자료 원문

  • ·이완기는 1940년 7월 초순 경성부 성북정 133번지에서 동숙 중이던 손용우에 대하여 말하기를 “조선인은 조선을 잊지 말고 학업중에는 학우를 지도하고, 졸업 후에는 농촌청년을 지도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 고 아 민족의 행복을 도모해야 한다는 취지로 제의하여 동인의 동의를 구함 ·1940년 10월 경 중등학교와 문화학원 학생의 민족의식 고취 사건으로 체포 ·가혹한 신문과 조사를 받던 이완기는 1942년 5월 23일 사망 ·경성부 성북정 133번지-60 (중동학교 생도)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02쪽
  • ○ 조언비어 이완기(李完基, 石村完基)는 1940년 경 18세로, 본적이 경성부 수송정 83번지-6호, 주소가 경성부 성북정 133번지-60호인 중동학교 학생이었다. 이완기는 1940년 7월 초순 경성부 성북정 133번지 전태현(全泰賢)의 집에서 동숙 중이던 손룡우에 대하여 “조선인은 조선을 잊지 말고 학업 중에는 학우를 지도하고, 졸업 후에는 농촌청년을 지도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고, 우리 민족의 행복을 도모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야기하였다. 또 1940년 7월 중순 성북정 133번지 동소에서 전태현과 손룡우에게 “금차 구주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귀결됨이 명확하여 독일은 구주통일 후 세력을 동양에 연장하고 일본과 충돌하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은 지나사변으로 경제가 피폐하였기 때문에 독일에 저항하지 못하고 패전할 것이므로 금후 그 기회를 잃지 말도록 준비하여 둠이 요망된다.”는 취지로 이야기하여 두 사람의 동의를 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1940년 9월, 교실에서 휴게시간을 이용하여 4학년 갑조생 대부분의 학생에게 “장개석이 일본에 대하여 화평조건을 제출하였는데, 이 화평조항 중 조선독립을 인정할 것이라는 조항이 있기에 조선독립은 지나사변을 계기로 실현될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이완기는 손룡우를 민족적으로 지도하여 “사립학교 생도는 자못 조선혼을 망각하지 말라.”고 설유하였다. 또 그는 1940년 9월 중순 경 중동학교 4학년 교실에서 일한병합에 탄식하고 “조선이 독립되어 있다면 조국을 위한 원정에 용감히 도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현재는 일본의 식민지이므로 일본병을 지원하여 일본을 위하여 희생하고 전쟁을 행하는 것은 전혀 필요가 없다.”고 하며 지원병제도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지원병을 보낼 즈음에도 조선혼을 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민족적으로 격려하고, 지나사변은 인구의 다과, 식량문제, 외국협조문제 등에 의해 결과는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고 조언비어(造言蜚語)를 하였다. 이 결과 1940년 9월 17일 중동학교생이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즈음 고의로 결석한 사람이 다수였고, 올해 여름 중동학교에서 군사강연할 때 지원병 희망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1940년 10월 경 ‘중등학교와 문화학원 학생의 민족의식 고취 사건’으로 체포되어 가혹한 신문과 조사를 받다가 1942년 5월 23일 사망하였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09-110쪽
    마지막 문장의 "중등학교"는 "중동학교"의 오기이다.
  • 5. 성북동 독립운동가 주소지 ○ 민족주의 계열 이름: 이완기 주소(당시): 성북 133번지-60호 주소(현재): 서울 성북구 성북동 133-60 비고: 손용우와 같은 주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7쪽
  • 본적 경성부 수송정 83번지-6, 주소 경성부 성북정 133번지-60. 중동학교 생도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는 이유로 수감되었고, 1942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 본적: 경성부 수송정 83-6 주소: 경성부 성북정 133-60 계열과 단체: 학생운동 <활동 내용> 이완기는 1940년 7월 초순 경성부 성북정 133번지 (全泰賢)金長顯의 집에서 同宿중이던 손용우(天日正雄)에 대하여 말하기를 “조선인은 조선을 잊지 말고 학업중에는 학우를 지도하고, 졸업 후에는 농촌청년을 지도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고 아 민족의 행복을 도모해야 한다는 취지로 제의하여 동인의 동의를 구하였다. 그리고 1940년 7월 중순 동소에서 동인에 대하여 금차 구주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귀결됨이 명확하여 독일은 구주통일 후 세력을 동양에 연장하고 일본과 충돌하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은 지나사변으로 경제가 피폐하였기 때문에 독일에 저항하지 못하고 패전할 것이므로 금후 그 기회를 잃지 말도록 준비를 하여 둠이 요망된다는 취지로 제의하여 양인의 찬동을 구하였다고 한다. 1940년 9월 일 불상, 교실에서 휴계시간을 이용하여 4학년 갑조생 전반에게 ”장개석이 일본에 대하여 화평조건을 제출하였는데 이 화평조항 중 조선독립을 인정할 사, 이 일항에 가입한 실사가 있기에 조선독립은 지나사변을 계기로 실현될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또 운동장에서 군사조련에 반대하는 등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손용우를 민족적으로 지도하여 사립학교 생도는 자못 조선혼을 망각하지 말라고 설유하였다. 1940년 9월 중순 경 중동학교 4학년 교실에서 일한병합에 탄식하고 조선의 독립이 독립되어 있다면 조국을 위한 원정에 용감히 도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현재는 일본의 식민지인 것이 조선의 존재이므로 일본병을 지원하여 일본을 위하여 희생하고 전쟁을 행하는 것은 전혀 필요가 없다고 하며 지원병제도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지원병을 보낼 즈음에도 조선혼을 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민족적으로 격려하였다. 또 지나사변은 인구의 다과, 식량문제, 외국협조문제 등에 의해 결과는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고 조언비어를 하였다. 그리고 동아신질서의 대방침을 비평하고, 왜 노등의 행위는 실로 교묘한 기만이라고 하는 불온전한 배일적 언사를 교환하였다. 9월 17일 중동학교생 전반에게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즈음 그것에 반대하는 의지로 고의로 결석한 사람이 다수였고, 올해 여름 중동학교에서 군사강연의 즈음에 지원병을 희망하는 사람은 거수하라고 종용함에도 거수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1940년 10월 경 중등학교와 문화학원 학생의 민족의식 고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가혹한 신문과 조사를 받던 이완기는 1942년 5월 23일 사망하였다. 1942년 5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소기각되었다. <특이사항> 창씨명은 石村完基 <참고문헌> 「이완기(석촌완기)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42.5.31.) 「치안유지법위반, 보안법위반 및 조언비어사건 검거에 관한 건」(1940.10.31.) 『사상에 관한 정보(12)』.
    자료 원문 확인 결과, 활동 내용의 마지막에서 세번째 문장의 "중등학교"는 "중동학교"의 오기이다.
  • ○ 민족의식을 일깨운 두 사람, 이완기와 김광섭 한편 단순히 시국담을 나누는 일을 넘어 주변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이들이 있습니다. 1940년, 성북동에 거주한 바 있는 중동학교 학생 이완기는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주변 친구들에게 “조선인은 조선을 잊지 말고 학업 중에는 학우를 지도하고 졸업 후에는 농촌청년을 지도해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해야한다”는 말을 하고 다녔지요. 만주사변과 수세에 몰린 일본군의 상황 등으로 말미암아 곧 독립이 실현될 것이라 장담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을 위해 일본군에 지원해 전쟁에 나갈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해 동급생들의 동의를 이끌어냈고 중동학교에서의 일본군 지원병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1940년 말 체포돼 가혹한 신문과 조사를 받다가 1942년 순국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10-111쪽
  •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이완기 1924-1942 / 애국장 / 성북동 133-60호 거주 중동학교를 다니던 중 1940년 7월 성북동 133번지의 손용우에게 “조선인은 조선을 잊지 말고 학업에 열중해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해야한다”라는 취지로 동의를 구했고, 같은 해 9월 교실에서 “조선독립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실현될 것이다”라며 지원병제도를 반대하는 발언을 했으며, 학생들의 군사훈련 또한 반대했습니다. 1940년 10월경 중동학교와 문화학원 학생의 민족의식 고취사건으로 체포되어 가혹한 신문과 조사를 받다가 1942년 5월 23일 순국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27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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