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
1854 - 1907
인물 개인 관료
인물 개인 교육가
관료이자 교육가이다. 고종의 측근으로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러일전쟁 발발 후 일본으로 납치된 그는 일본에서 근대적 교육기관을 살펴보고 그 필요성을 절감했다. 1905년 귀국하면서 600여 권의 서적을 사들여 와 번역하게 했으며 신교육에 의한 인재양성을 위해 보성소학교를 비롯하여 보성중학교 및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세계열강에 널리 알리려고 했으며, 프랑스와 러시아 등지를 유랑하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안암동
  • 이용익 흉상(1)
  • 이용익 흉상(2)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41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 (안암로 145)
  • 비고: 고려대학교(활동)

근거자료 원문

  • 이용익은 고종의 측근으로 일본에 반대하고 러시아와 제휴를 통해 견제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반일 성향을 가진 이용익은 조선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고자 했던 일본에게는 매우 불편한 존재였다. 이용익이라는 존재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일본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재빨리 그를 일본으로 납치했다. 일본에 의해 강제 연금을 당한 이용익은 하루아침에 고국을 떠나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이용익이 다시 고국 땅을 밟은 건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명확해진 1904년 12월 무렵이었다. 비록 자의는 아니었지만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이용익은 많은 것을 느꼈다. 특히 이용익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교육문제였다. 일본의 근대적인 교육기관을 두루 살펴본 이용익은 국내에도 근대적인 교육기관이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용익은 자비로 많은 서적을 구입하며 귀국 후 시작할 학교 설립을 준비했다. 이미 일본 체류 중에 이용익의 머리에서는 근대적인 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커다란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용익이 그린 큰 그림은 국내로 돌아오면서 구체화됐다. 귀국 후 이용익은 소학교부터 전문학교까지의 교육 기관을 체계적으로 설립한다는 구상을 발표했고 신해영申海永, 김기경金基璋, 김중환金重煥, 정명섭丁明燮 등과 함께 학교 설립 작업에 착수했다. 이용익은 1905년 1월 학교 설립과 운영에 관한 제반 사항을 담은 「사립보성전문학교규칙私立普成專門學校規則」을 발표하고 3월 『황성신문皇城新聞』에 학원 모집 광고를 실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62-263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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