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익은 고종의 측근으로 일본에 반대하고 러시아와 제휴를 통해 견제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반일 성향을 가진 이용익은 조선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고자 했던 일본에게는 매우 불편한 존재였다. 이용익이라는 존재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일본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재빨리 그를 일본으로 납치했다. 일본에 의해 강제 연금을 당한 이용익은 하루아침에 고국을 떠나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이용익이 다시 고국 땅을 밟은 건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명확해진 1904년 12월 무렵이었다.
비록 자의는 아니었지만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이용익은 많은 것을 느꼈다. 특히 이용익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교육문제였다. 일본의 근대적인 교육기관을 두루 살펴본 이용익은 국내에도 근대적인 교육기관이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용익은 자비로 많은 서적을 구입하며 귀국 후 시작할 학교 설립을 준비했다. 이미 일본 체류 중에 이용익의 머리에서는 근대적인 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커다란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용익이 그린 큰 그림은 국내로 돌아오면서 구체화됐다. 귀국 후 이용익은 소학교부터 전문학교까지의 교육 기관을 체계적으로 설립한다는 구상을 발표했고 신해영申海永, 김기경金基璋, 김중환金重煥, 정명섭丁明燮 등과 함께 학교 설립 작업에 착수했다. 이용익은 1905년 1월 학교 설립과 운영에 관한 제반 사항을 담은 「사립보성전문학교규칙私立普成專門學校規則」을 발표하고 3월 『황성신문皇城新聞』에 학원 모집 광고를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