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1904.05.18 - 1944.01.16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문인
종암동에서 거주한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이원록이다. 1925년(혹은 1926년)에 중국에 건너갔다가 1927년 여름 중국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1년 7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는 '이육사'라는 필명의 유래가 되었다. 1932년 중국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육생으로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3년 7월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군사활동이 아닌 문학활동을 시작하였고, 1939년 종암동 62번지로 이사하여 이 곳에서 「청포도」, 「절정」 등 대표작을 발표하였다. 그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종암동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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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李陸史
  • 이명칭: 이원록(李源祿, 본명), 이원삼(李源三), 이활(李活), 태경(台卿)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   인물 개인 문인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904.05.18 - 1944.01.16
  • 비고: 생년: 1904.04.04(음)

주소

  • 주소: 02804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 62번지 (종암로19가길 52)
  • 비고: 거주지, 미아리 공동묘지(묘지)

근거자료 원문

  • ○ 성북구 출신 독립운동가 이육사 - 온몸으로 저항한 민족시인 - 1904~1944 / 애국장 / 종암동 62번지 거주 - 1926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구속되었고 1929년 중국으로 가 의열단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해 독립투쟁을 벌였습니다. 1932년에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교생으로 입교해 이듬해 졸업했습니다. 이후 1939년 종암동으로 이사해 작품 활동에 매진했으며 이 시기 「청포도」, 「절정」 등의 대표작을 《문장》에 발표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8쪽
  • ○ 성북인의 목소리 셋 이육사 절 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매운 계절, 북방, 서릿발 칼날진….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이 어쩌면 이렇게 시리고 아플 수 있을까요. 시는 추운 만주 지역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독립투사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 발 비껴 디딜 곳조차 없는 상황. 그러나 화자는 눈을 감고 무지개를 떠올립니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고 말합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결코 희망을 놓지 않는 강인함은 곧 일제의 탄압에 맞선 독립투사들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일본에 저항했던 민족시인 이육사. 베이징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 출신인 그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돼 2년 7개월간 옥고를 겪기도 했지요. 「절정」을 발표한 1940년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그가 잠시 성북구 종암동에 터를 잡고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동시에 일본의 탄압이 가장 가혹했던 시기였지요. 조국 해방을 염원하는 그의 마음은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간절했을 겁니다. 이육사는 안타깝게도 광복이 되기 바로 직전해인 1944년 베이징의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68-69쪽
  • ○ 시로 적은 조국해방의 열망 -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 문단에는 저항문학이 등장합니다.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등이 바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자 민족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입니다. 이중 한용운과 이육사는 앞서 여러 번 언급되었던, 시인 그 이상의 큰 자취를 남긴 성북구의 독립운동가들이지요. 일본의 압력으로 많은 문인들이 친일문학을 하던 시절, 꿋꿋하게 독립을 노래한 이들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대중에게 읊어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독립 염원의 수단으로만 읽히는 시가 아닌, 문학적 아름다움을 갖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육사는 종암동에 거주하던 시기인 1939년부터 1942년까지 가장 많은 작품들을 발표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청포도」, 「절정」등의 대표작을 문예지 《문장》을 통해 발표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98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32년-이육사 중국에서 의열단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입교 1939년-이육사 《문장》지에 「청포도」, 「절정」 등 발표 1944년-이육사 베이징 감옥에서 사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13쪽
  •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위의 글은 시인 이육사의 대표적인 시 ‘청포도’이다. 이육사는 ‘내 고장’을 조국으로, 청포도를 민족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청포도가 익어가듯, 우리 민족도 ‘익어가서’ 독립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이 시를 썼다. 이육사는 본인 스스로 ‘청포도’를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가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다’고 표현하며 애타게 기다리던 손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육사는 또한 독립운동가였다. 1931년 1월 ‘대구격문사건’으로 수감된 것이 그의 본격적 독립운동 행적의 시작이었다(이후 그는 17번이나 옥살이를 한다). 1932년 4월에는 베이징에 가서 의열단 활동에 가담하기도 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군사간부로 성장하였다. 1933년 7월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군사활동이 아닌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문학활동은 군사활동처럼 치열했다. 그는 시, 수필, 소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발표했다. 1930년대 후반,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한글로 문학작품을 쓰는 것이 힘들어지자 그는 한시漢詩를 발표하는 것으로 저항했다. 1943년 4월,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다시 베이징으로 떠난다. 하지만 같은 해,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小祥(고인이 돌아가신 지 만 1년이 되는 날 지내는 제사)에 참여하려 귀국하는데, 이때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1944년 1월 16일 결국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한다. 그의 시신은 그의 아우 이원창에게 수습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아마도 서울 근교에 있고, 원창 자신의 집과 가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60년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고향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에 이장되었다. 다시 그의 시 ‘청포도’로 돌아가자. ‘청포도’가 쓰고 발표된 시점은 그가 가장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할 당시였다. 그의 작품 발표년도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작품이 1933년 이후에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고, 특히 1937년 이후에 가장 활발하였음이 확인된다. 1937년은 그가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주거를 옮긴 해였다. 그가 처음 서울에 자리를 잡은 곳은 명륜동이었다. 그리고 1939년 종암동으로 다시 이사를 간다. 그는 그곳에서 3년 가까이를 살며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처음 언급한 ‘청포도’,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절정’도 그의 종암동 시절의 작품이다. 종암동이라는 공간이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그곳이 그에게 일종의 ‘사색처’역할은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41년 폐질환으로 그는 종암동을 떠나게 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40-44쪽
  •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다. 자字는 태경台卿이고, 어릴 적 이름은 원삼源三이다. 이육사가 처음 필명으로 사용한 이름은 1929년 후반기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활李活이었다. 이육사라는 이름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30년 10월 『별건곤』이란 잡지 5권 9호인데, 여기에서 이육사는 목차에는 이활, 본문에는 이육사二六四를 사용하고 있다. 이 이육사가 대구 형무소 시절 그의 수형번호에서 유래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이름을 숫자 二六四로 표기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이후 그는 ‘고기를 먹고 설사한다’는 뜻을 가진 육사肉瀉라는 이름을 쓰며 세상을 조롱하기도 했고, ‘역사를 죽인다’는 뜻을 가진 육사戮史를 사용하며 혁명을 꿈을 비추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육사陸史이다. 아마도 다른 ‘육사’에 비해 노골적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박수진 외 5인, 2014, 미아리고개, 45쪽
  • 경북 안동 사람으로 종암동 62번지에 거주하였다. 1926년 봄 이정기(李定基)와 함께 북경에 가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북경대학교 사회과학과를 졸업하였고 1932~33년 남경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1기로 졸업하였다. 1934년 3월 서울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1944년 북경에서 옥사하였다.
  • 본적: 경북 안동 주소: 종암동 계열과 단체: 대구조선은행 투탄 <활동 내용> 경북 안동(安東)사람이다. 1926년 중국 북경 조선군관학교(朝鮮軍官學校)에 입교하여 제1기로 졸업하였던 그는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되어 피체당하여 2년 7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그리고 1930년에는 다시 대구격문사건(大邱檄文事件)의 주모자로 지목받아 피체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다. 그는 이후 1930년 말경, 중국 북경(北京)으로 가서 북경대학 사회학과(北京大學社會學科)를 졸업하고 『중외일보(中外日報』와 『조광(朝光)』등의 잡지에 시(詩)를 발표하면서 항일정신과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후 그는 크고 작은 사건에 연루되어 17회에 걸쳐 피체되어 서울 등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이옥비 여사는 (사)이육사추모사업회 상임이사이다. 이육사는 이옥비 이사 위로 각각 아들과 딸 한 명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사망했고, 남은 후손은 이옥비 여사가 유일하다. 이옥비 여사는 결혼 후 평범하게 활동하다가, 뒤늦게 아버지 이육사 선양사업에 뛰어들었다. 여사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 아버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은 많지 않지만, 어머니와 삼촌들 그리고 친지들과 아버지의 지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성북문화원, 2019,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이 나, 29쪽
    이옥비 여사는 이육사 지사의 딸이다.
  • 1926년 7월, 중국으로 가서 중궈(中國)대학 상과에 입학. 아울러 베이징대학에도 다님. *이육사의 중국행 시기와 중궈대학 : 1. "1925년 8월경 중국으로 건너가서 베이징의 중궈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1927년 중퇴", 2. "1926년 7월 중국으로 건너가서 베이징의 중궈대학 상과에 입학하여 재학 7개월" 등으로 기록이 엇갈림. *이육사가 다닌 베이징대학: 경찰 신문조서에는 모두 중궈대학으로 되어 있지만, 베이징 대학을 다닌 것도 분명한 사실로 보임. 1. 육사가 1943년 베이징의 중산공원에서 만난 백철에게 베이징대학을 '모교'라고 언급하였고, 2. 육사가 국문과 학과장인 마위자오이며, 3. 육사가 그 교수를 베이징대학 연구실에서 만났고, 4. 마위자오는 중궈대학에도 출강한 바 있으며, 5. 베이징대학은 1926년 10월부터 선택적으로 청강생 제도를 운영하였음. 요컨대 육사는 중궈대학과 더불어 베이징대학을 모두 다닌 것으로 보임. 육사는 일제 경찰의 신문 때에는 중궈대학을, 백철이나 조선 친구들에게는 베이징대학을 주로 언급함. 그 연유를 알 수 는 없으나, 베이징대학이 반일운동의 중심지였고, 지도교수 Y 및 루쉰과의 인연을 숨기려는 것 때문일 수도 있다. 베이징대학의 반일운동과 루쉰과의 인연은 향후 육사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침.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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