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09.16 - 1956.09.06
인물 개인 화가
정릉동에 거주한 화가이다. 오산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에서 공부하였다. 일본 화단에서 추상미술을 하는 화가들의 모임인 자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6.25전쟁 때 부산, 제주도로 피난을 다니며 서양화 단체인 ‘기조전(其潮展)’ 등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부터 캔버스나 물감을 구하지 못하면 송곳이나 연필로 담뱃갑에 붙어 있는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전쟁 후 서울로 올라와 개인전을 열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영양부족과 신경쇠약 증세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돈암동에 있던 성베드로병원에 옮겨졌다. 병원을 나와 잠시 근처 정릉동에 살던 한묵의 집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대표작으로 〈흰소〉, 〈투계〉, 〈사내와 아이들〉 등이 있다.
정릉동
  • 마해송_모래알 고금 표지(성북구립미술관)
  • 이중섭, <정릉 풍경>, 1956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李仲燮
  • 이명칭: 대향(大鄕)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화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근거자료 원문

  • 이중섭李仲燮은 1917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와 일본문화학원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다. 서양화의 구도와 화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완성하였으며, 대표작으로 <흰소>, <투계>, <사내와 아이들> 등이 있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종군화가단, ‘기조전’등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부터 캔버스나 물감을 구하지 못하면 송곳이나 연필로 담뱃갑에 붙어 있는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전쟁 후 서울로 올라와 개인전(1954, 미도파화랑)을 열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지인들의 집을 떠돌며 지내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56년 생을 마감한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41쪽
  • 은박지에 그린 그림인 은지화와 <황소>로 알려진 화가이다.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미국 예일대학 출신 미술교사 임용연에게 그림을 배우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일본 화단에서 추상미술을 하는 화가들의 모임인 ‘자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활동한다. 한국전쟁 때 부산, 제주도로 피난을 다니며 기조전에 참여하였다. 물자가 부족하던 때 캔버스, 물감을 구하지 못하면 송곳이나 연필로 담뱃갑에 붙어 있는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과 헤어져 지내며 가족의 모습을 은지화 담았다. 영양부족과 신경쇠약 증세로 정신병원에 입원, 돈암동에 있던 성베드로병원에 옮겨졌다가 병원을 나와 잠시 근처 정릉동에 살던 한묵의 집에 머문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58쪽
  • 이중섭과 한묵은 1940년대 강원도 원산에서 만났다. 박고석과는 부산 피난 시절에 만났다. 박고석이 살던 판잣집에 이중섭이 머물며 같이 스케치를 다녔고, 박고석, 한묵, 손응성과 함께 <기조전> 전시를 하였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이중섭은 늘 박고석을 찾아왔고, 정릉 집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구상과 어울리던 고은도 만났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59쪽
  • 평안남도 평원군의 대지주와 민족자본가 딸이었던 모친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다섯 살때 병으로 사망했지만 가장인 형과 모친의 보살핌으로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오산 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당시 미술교사였던 미국 예일대 출신의 임용연 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임용연 선생은 이중섭의 그림을 급우들에게 보여주며 미래의 대가가 될 그림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937년 일본으로 그림유학을 떠나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독립전과 자유전 등에 출품했고 분카학원을 졸업하던 1940년 미술창작가협회전(자유전의 개칭)에서 수상했고, 1943년 같은 협회전에서 최고상인 태양상을 받아 신인으로서 크게 각광 받았다. 1945년 일본여성 야마모토(山本方子)와 원산에서 결혼했고 이듬해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해방이후 어지러웠던 국내정세는 이중섭에게 큰 시련을 안긴다. 이북 지역에 속했던 원산은 공산당치하에 들어가게 되자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상당부분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대지주의 아들이었던 이중섭은 설상가상으로 친구인 시인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화를 그린 일로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중섭은 자유를 찾아 원산을 탈출, 제주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다. 이 무렵 일본인 부인과 두 아들은 전쟁을 피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게 되고, 이중섭은 홀로 남아서 부산과 통영 등지에서 생활한다.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했는데, 가족과는 그것이 마지막이 됐다. 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 한묵 이봉상 등과 같이 만든 기조전(其潮展)과 신사실파에 참여했고, 통영·서울·대구에서의 개인전을 가졌다. 작품의 소재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가장 많고, 불상, 풍경 등도 몇 점 전한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서 호를 대향(大鄕)이라고 짓고 고향과 가족을 그리는 마음을 작품에 많이 담았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가난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에서 큰 기대를 가지고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작품도 거의 팔리지 않았고 평단의 평가도 좋지를 않았기 때문에 무척 실망하여 더욱 건강을 돌보지 않았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55년 한 비평글을 통해 “우리 화단의 귀재”라면서 그의 작품 황소에 대해 “고구려의 기상과 민족혼이 살아있는 작품”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이경성 선생은 홍대박물관장 시절 그의 <황소>를 직접 구입해 홍대박물관 수집목록에 올려놓았다. 대표작으로는 「싸우는 소」, 「흰소」(이상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움직이는 흰소」, 「소와 어린이」, 「황소」(이상 개인 소장), 「투계」(국립현대미술관소장) 등은 대표적인 회화 작품이다. 가난 탓에 캔버스와 물감을 살 수가 없어서 담뱃갑 속 은지에 날카로운 철필로 그린 은지화들도 이중섭의 대표적 작품들이다. 영양부족과 신경쇠약 증세로 정신병원에 입원, 돈암동에 있던 성베드로병원에 옮겨졌다가 병원을 나와 잠시 근처 정릉동에 살던 한묵의 집에 머문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 입원했다가 사망해 무연고자로 처리됐다가, 3일만에 박고석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시신이 인도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07쪽
  • 이중섭 1916~1956 1955년 대구에서의 투병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소격동에 위치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 이후 이중섭은 병원을 나와 정릉 청수장 부근에 하숙방을 얻으며 거처를 옮겼다. 이중섭은 박고석을 찾아가 정릉 집에서 한동안 머무르곤 했다. 이중섭은 부산 피난 시절 화가 김병기의 소개로 박고석을 만났고 두 사람은 판잣집에서 같이 지내며, 근교로 스케치를 다녔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인연은 이어졌다. 이중섭은 말년에는 잡지 표지나 삽화를 많이 작업하였는데 생계를 위한 지인들의 배려였다. 마지막까지 정릉에서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은 1956년 홀로 생을 마감했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118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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