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철
1932.03.15 - 2016.09.18
인물 개인 문인
소설가이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학창시절 문학동아리에서 활동하며 문학의 폭을 넒혀갔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여하였다가 월남하였으며, 전쟁의 경험은 이후 그의 소설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1955년 황순원의 추천으로 『문학과 예술』에 「탈향」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는데 실향민의 애환을 자신의 경험담으로 풀어나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1956년 삼선교 하숙집에서 소설가 오상원과 같이 지내다가 황순원의 주선으로 출판사에 입사하며 삼선교를 떠났다. 이후 유신독재에 맞서 투쟁하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며 옥고를 이루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판문점」(1961), 「닳아지는 살들」(1962), 「소시민」(1964), 「서울은 만원이다」(1966) 등이 있다.
삼선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李浩哲
  • 이명칭: 견산(見山)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문인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 비고: 삼선교 일대 하숙집에 거주

근거자료 원문

  • 소설가이다. 황순원의 추천으로 《문학과 예술》에 1955년 「탈향」, 이듬해 「나상」을 발표하며 문단 생활을 시작한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인민군, 국군 포로, 미군부대 경비원 등을 거치면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전쟁 후 사회의 모습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판문점」, 「남녘사람 북녘사람」, 「서울은 만원이다」 등 작품을 발표한다. 김동리, 최정희, 서정주, 서기원 등 1950년대 문단의 생생한 모습을 『문단골 사람들』로 기록하기도 했다. 분단 문제와 민주화 운동,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글과 행동으로 참여하였다. 1956년 삼선교 하숙집에서 소설가 오상원과 같이 지내다가 황순원의 주선으로 출판사에 입사하며 삼선교를 떠났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42쪽
  • 한국전쟁, 남북관계에 문학의 뿌리를 내린 작가 이호철은 193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원산중·고등학교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서툴게나마 글을 쓰기 시작했고, 괴테, 셰익스피어 등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며 문학의 폭을 넓혀 나갔다. 주인공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감정을 함께 느끼며 언젠가 자신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소설을 쓰겠다는 꿈을 키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인민군으로 동원되어 눈앞에서 죽음을 경험한다. 충격과 공포, 전쟁의 상처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 경험은 소설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국군포로가 되어 북송되던 길에 천만다행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질 것이란 소문으로 피난 대열에 섞여 부산으로 내려온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부두 노동자, 국수공장 노동자, 미군부대 경비원으로 일하며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일기를 쓰고, 소설을 지었다. 횡보 염상섭에게 자신이 쓴 단편 「오돌할멈」을 보여주는 기회가 우연히 생겼고, 소질이 있어 보인다는 칭찬 한마디에 자신감을 얻는다. 서울로 올라온 이후 부산의 한 피난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던 황순원의 도움으로《문학과 예술》에「탈향」을 발표한다.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이 점점 옅어져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 실향민의 애환을 자신의 경험담으로 풀어나간「탈향」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오상원과) 만난 것은 1956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의 주황색 파일오바 차림을 지금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서로 어울리게 되면서 삼선교에서 둘이 같은 방에서 하숙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고향이 평북 의주였고, 모친에 두 형님도 같이 월남 해 와, 모친과 형님들은 용산 해방촌에 거처를 잡고 있었다. … 그러다가 오상원이 결혼하게 되어 나 혼자서 삼선동의 그 방을 쓰다가 정종화와도 잠깐 같이 있었는데, 그 무렵에 정종화는 서울대 영문과 대학원생이었다. 그런 어느 날, 부산에서 올라온 그의 동생이 서울대 입학시험을 치르러 상경했다며, 며칠 동안 그 좁은 하숙방에서 셋이 같이 먹고 자기도 했었는데, 물론 나는 그런 일이 일일이 기억해 둘 리가 없이 까맣게 잊어 먹고 있었다. - 이호철, 「기기묘묘한 만남들」- 이 무렵 이호철은 오상원과 같이 삼선교 한성여고 앞에서 잠시 하숙을 했다. 1956년 「나상」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소설가로 등단하고, 황순원의 주선으로 출판사 광문사에 입사하여 문단활동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충동적으로 사표를 냈고, 그 동문 친구는 자기 뜻대로 사표를 내던진 나를 이끌고 돈암동, 지금의 성신여대 앞의 한옥 문간방 하나에 하숙까지 잡아 주었을 뿐 아니라, 넥타이 매는 법도 가르쳐 주었고, 나는 그의 지시를 좇아 을지로 입구 미양사라는 양복점에 가서 난생 처음으로 료마에 양복까지 한 벌 맞추어 입었다. …그 동향 동문을 앞세우고 문성여중 이사장을 찾아 나섰다가 이건 또 웬 환란인가, 지금의 조선호텔 앞 샛길에서 내 그 친구가 누군가에게 붙들리며, “원수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다더라. 너 오늘 잘 만났다”라는 말과 함께 끌려가는 꼴을 멍하게 쳐다보는 신세로 떨어져야 하였던 것이다. - 이호철,「 첫 취직」- 문단에서 활동한지 60여 년 동안 분단 문제를 다룬 소설들을 계속해서 발표하였다. 「탈향」은 이호철을 대표적 분단작가로 자리 매김 시켜준 작품으로, 10여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1960년에 개최된 판문점 회담에 참관하며 북한 기자들과 이야기한 내용을 토대로 쓴 작품 「판문점」을 포함해 「소묘」, 「파열구」등 전쟁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섬세하기 그려내었다. 분단의 아픔과 자유가 없는 나라의 국민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호철은 ‘유신독재’에 맞서 투쟁하고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하며 옥고를 치루기도 한다. 또한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시민들의 삶을 글에 담으며 현실문제에 조금 더 다가간다. 자신이 제면공장에서 일하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시민」은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며 사회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서슴없이 펼친다. 이호철이 남긴 250여 편의 글 속에 담긴 이야기는 자신이 경험했던 삶이자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단상을 읽어낼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짙어지며,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바탕으로 한 소설들을 창작하고 있다. 2006년부터 분단 문학포럼 주최로 <이호철 소설 정기독회>를 개최하고 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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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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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 인물
    시기: 일제강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