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송희
1938
인물 개인 화가
인물 개인 교육가
동양화가이다. 한국 산수화의 현대화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눈에 보이는 자연의 사실적 모습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기운을 조화롭게 융합시킨 산수화를 통해 독자적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1978년 성북동에 집을 짓고 당호를 '취석헌(醉石軒)'이라 붙였다. '돌이 좋아 그 기운에 취했다'는 의미이다. 마당 끝에 커다랗게 누워 있는 자연석에는 '취석(醉石)'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대학에서 은퇴한 뒤 작업에 매진하며 실경산수, 파묵, 문인화, 추상화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성북동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근거자료 원문

  • 충북 괴산군 증평의 고향풍경이 가슴 속에 오래도록 간직되어서인지 이석 임송희의 그림에는 고향냄새가 난다. 이석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임창무(林昌茂) 선생의 여덟 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예술가의 자질을 가진 분이었다. 호랑이를 그리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림을 잘 그리셨고, 친구인 현제명 선생에게 바이올린을 배워 연주하기도 했다. 그 소질을 가장 많이 닮은 막내아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독립운동을 할 때 투옥되었더 후유증으로 이석이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 서울 창덕여고 미술 선생이었던 둘째 형 친구를 소개 받아 서울로 올라온다. 창덕여고 미술부의 청일점. 여학우들 사이에서 고개도 들지 못했던 순박한 시골 소년이었지만 그림 실력은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서울 미대 입학시험 날 석고상이 놓여있을 줄 알았던 자리에는 젊은 여성 모델이 앉아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했지만 그동안 연습한 데생 실력을 바탕으로 시험을 치렀다. 조마조마하게 기다린 합격자 발표날, 회화과 명단에는 이석의 수험번호가 있었다.
  • 1, 2학년 때는 동양화와 서양화를 함께 배우다가 3학년이 될 때 전공을 선택하였다. 학창시절부터 서양화를 중심으로 미술교육을 받았던 터라 많은 학생들이 서양화를 전공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석은 자연을 벗삼아 자라서 인지 기름으로 갠 물감을 사용하는 유화보다 담백하고 투명한 느낌의 동양화가 더욱 친숙했다. 그동안 수업시간에 이석을 눈여겨보던 한 교수님은 "자네는 동양화가 체질에 맞네."라며 그림 솜씨를 칭찬하기도 했다.
  • 1959년에는 서울미대를 중심으로 '묵림회'가 출범하였다. 묵림회는 전통회화의 통념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시대적 성격을 반영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었다. 이석은 군대 제대 이후, 묵림회에 참여하여 <소녀>와 <소년>을 출품하였다. 파묵 작품인 <소녀>는 소박한 소녀의 모습을 담고 있고, <소년>은 벌거숭이 어린 아이가 큰 돌을 메고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묵림회가 해체된 이후에는 새로운 동양미술을 추구하고자 한국화회가 출범하였다. 창립 멤버였던 이석은 '한국화회'라는 명칭을 짓고, 세 차례에 걸쳐 한국화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 돌에 대한 지극한 관심은 '돌로써'라는 뜻의 호 이석(以石)에서도 드러난다. 대학을 졸업하고 호가 없을 때 만난 한 학자가 동양화가는 호가 있어야 한다며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 오라고 하였다. 돌을 좋아하여 돌이 들어가는 글자를 모두 써서 보여드리니,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석을 호로 지어주었다.
  • 이석은 1978년 성북동에 집을 짓고 당호를 '취석헌(醉石軒)'이라 붙였다. '돌이 좋아 그 기운에 취했다'는 의미이다. 마당에는 수집한 석물들이 놓여 있다. 젊은 시절 돌을 찾아다니며 얻은 괴석, 석함(石函), 석등 등은 운반 장비가 없던 시절 여덟 명이 사흘에 걸쳐 옮긴 것이다. 마당 끝에 커다랗게 누워 있는 자연석에는 '취석(醉石)'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 연보 1938년 충북 증평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경력 덕성여자대학교 동양화전공 교수, 덕성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학장 역임, 현 덕성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남경박물원 고문, 한국미술협회 고문, 한국화회 회장 등 수상 전국미술지도상, 제1회 겸재 미술상 수상 전시 개인전 7회, 외국초대전(중국, 미국, 동남아, 일본, 호주 등) 16회, 국내 초대전 450여 회, 임송희 남경박물원 초대전(한중수교십주년기념) 등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한국), 남경박물원(중국) 등
  • 충북 괴산 출생. 소달구지, 원두막과 같은 시골의 정감을 담은 산수화로 이름을 알린 화가이다. 스승 박세원이 자신의 호 심경心耕에서 따 심정心井 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묵림회와 한국화회에 참여하였고, 3차례에 걸쳐 한국화회 회장을 지냈다. 1978년 성북동에 집을 짓고 당호를 ‘취석헌醉石軒’으로 지었다. 마당에는 젊은 시절 돌을 찾아다니며 얻은 괴석, 석등, 석함石函과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양의 큰 바위가 어울려 있다. 1층 화실의 큰 창문으로 마당의 전경이 집 안으로 들어오게 설계하였다. 대학에서 은퇴한 뒤 작업에 매진하며 실경산수, 파묵, 문인화, 추상화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54쪽
  • 산수와 화조, 인물 등 동양화의 전통적 주제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추상에 이르기까지 그 작품세계가 넓고도 깊다. 서울대 동양화과에서 심산 노수현과 월전 장우성, 심경(心耕) 박세원을 사사했다. 이석(以石)이라는 호와 더불어 그의 또다른 호인 심정(心井)은 스승인 박세원이 그에게 심산 노수현, 심경 박세원으로 이어지는 동양화단의 적자임을 인정하는 증표에 다름 아니었다. “심전경작(心田耕作), 즉 바른 마음으로 밭을 일궈야 좋은 농사가 되듯이 그림도 마음(心)이 곧아야 필(筆)이 곧고, 심이 깨끗하면 묵(墨)이 맑다”고 예술에 대한 마음가짐을 밝히고 있다. 바닥까지 훤히 비치는 깨끗한 물이 흘러 길을 가다가도 맑은 물에 입을 대고 마시고, 첨벙 들어가 멱을 감을 정도로 물 좋고 산 좋은 충북 괴산군 증평이 이석의 고향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임창무 선생의 8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부친은 그림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런 부친은 이석이 5살 때 일제에 의해 투옥되어 후유증으로 세상을 등져버렸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성직자의 꿈을 가진 이석은 아버지의 부재에도 형과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라났다. 학창시절 미술시간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미술에 소질이 있었지만 성직자의 꿈을 접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그가 잡지의 간디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은 인생을 바꾼다. 신방을 온 목사님이 그 그림을 보고는 미술대학에 가라고 권유한 것이다. 창덕여고 미술교사였던 형의 친구에게 지도를 받고 서울대 미대에 진학해 묵림회 활동에 참여했다. 전통회화의 통념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시대적 성격을 반영하려는 묵림회의 활동과 그의 작품경향이 맞았기 때문이다. 묵림회가 해체된 이후에는 새로운 동양화를 추구하고자 한국화회가 출범했다. 창립멤버였던 이석은 ‘한국화회’라는 명칭을 직접 짓고, 3차례에 걸쳐 한국화회 회장을 역임했다. 국전 등의 공모전에 나서기 보다는 전업작가의 길에 뛰어들어 인사동에 화실을 마련하고 인기 동양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중 1980년대 40대 들어서 뒤늦게 덕성여대에서 교수의 길에 들어선다. 이석은 붓을 쉬는 만큼 운필하는데 지장이 생긴다고 강조하곤 한다. 작품활동이 부족했던 교수시절에도 이른 새벽에 일어나 그림을 그렸다. 준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진지한 탐구야말로 자신의 조형어법으로 산수를 임리하는 것이 아니라 산수가 산수 그 자체의 온당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해 주는 조형의 중핵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무렵 나의 실경산수 작업은 주로 실제의 산청에 맞는 준법을 찾아 조형화시키는 준법의 탐구로 이어져갔다. 거기서 나는 강원도 설안삭의 준법이 다르고, 서울 북한산의 준법이 다르며, 충청도 단양 화양동의 준법이 다시 다름을 실증적으로 체험하였다. (작가의 말) 이석은 자연의 기, 자연과 마주쳤을 때 두근거리는 즐거움을 마음에 간직하고, 형태를 기억해 그 기운을 그림에 담는다. 요즘에도 ‘파묵산수(破墨山水)’의 새 장르를 개척해 선(禪) 사상의 직관적 정신을 표현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1978년 성북동에 집을 짓고 당호를 ‘취석헌(醉石軒)’이라 붙였다. 돌이 좋아 그 기운에 취했다는 의미이다. 마당에는 수집한 석물들이 놓여있다. 젊은 시절 돌을 찾아다니며 얻은 괴석, 석함, 석등 등은 운반 장비가 없던 시절 8명이 사흘에 걸쳐 옮긴 것이다. 마당 끝에 커다랗게 누워있는 자연석에는 취석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있다. 이곳에서 이석은 여전히 젊은 시절의 생활습관처럼 새벽이면 자신만의 시간을 가진다. 바위와 폭포, 비 온 뒤 운무가 드리운 계곡을 파묵으로 그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95-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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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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