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파 연구의 대가 임종국
1945년 해방되던 해, 퇴각하던 일본군 상등병이 한 중학교 3학년 학생에게 “20년 후에 반드시 돌아오고야 말겠다”고 말합니다. 정확히 20년 뒤인 1965년 성인이 된 학생은 당시 일본과의 회담을 준비하던 한 정치인이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회담을 성사시키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20년 전 만났던 일본군을 떠올리며 전율합니다. 당시 군사정부가 회담을 통해 얻고자한 목적은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일본자본유치였습니다. 이에 한일회담은 주요의제였던 대일청구권문제,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 등에 대한 정당한 요구를 제대로 받아내지 않는, 소위 굴욕적인 협상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는 분노했고 마침 문학사회사를 연구하고 있던 차에 친일연구에 뛰어들기로 결심합니다. 국가가 먼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한 개인이 나서게 된 것이죠. 심지어 그는 부친의 친일 행적까지 낱낱이 고백합니다. 시인, 비평가, 사학자를 지낸 임종국의 이야기입니다. 성북동에 거주했던 시인 조지훈이 그의 스승이었고 임종국 역시 1953년 조지훈의 집 앞에서 거주한 바 있습니다.
1966년, 월곡동 90-1547번지 거주 당시『친일문학론』을 발간한 그는 1970년대부터 더욱 본격적인 친일 연구에 들어갑니다. 친일파 개개인의 친일행적은 물론 그 집안의 친일내력까지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로 친일문제에 대해서 뛰어난 전문가로 거듭났지요. 이후 1983년부터 1987년까지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침략사』, 『일제하의 사상탄압』, 『친일문학작품선집』, 『친일 논설집』을 차례로 발간했습니다. 이후에는 친일문제 연구에 체계를 세우고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10권에 다다르는 친일파 총서를 계획하지요. 누구라도 쉽게 규명하기에는 민감하고 까다로웠던 문제를 홀로 오랜 시간 매달려 이토록 방대한 양과 깊은 고찰로 접근한 이는 해방 이후 임종국이 유일했습니다. 1989년 임종을 앞둔 순간까지도 친일파총서 집필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인생의 과업을 후학들에게 남기고 타계합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흐른 2009년 일제식민통치 당시 반민족 친일행위를 한 한국인의 목록을 정리·수록한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지요.
친일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과정이 없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민족사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임을 면할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 임종국 유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