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치정
1880.09.26 - 1932.01.09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된 독립운동가이다. 임치정은 1880년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태어났다. 1904년 미국에 건너가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일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신민회를 창립하고 간부로 일하다가 1911년 만주무관학교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에 105인 사건으로 다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32년 1월 9일 자택에서 뇌일혈로 별세한 후 미아리 공동묘지에 장지가 마련되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길음동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임치정
  • 임치정씨(林蚩正氏) 별세(別世) 구한말명사(舊韓末名士) 구(九)일 노일혈로 자택에서 파란중첩(波瀾重疊)하든 그 일생(一生)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林蚩正
  • 이명칭: 춘곡(春谷)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음동 일대
  • 비고: 미아리 공동묘지(묘지)

근거자료 원문

  • 舊韓末名士(구한말명사) 林蚩正氏別世(임치정씨별세) 광무 융희 연간의 민중운동 거두 춘곡 임치정 씨는 작 9일 오후 6시 시내 서대문정일정목 77의 2 자택에서 뇌일혈로 돌연 별세하였다. 향년 53. 임치정 씨는 1904년에 미국에 건너가 안창호, 이강 등 제씨와 함께 근대 최초의 민중운동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하여 그 간사가 되고 독립신문 이후의 최초 민간신문인 공립신보의 간부가 되었다. 1904년에 귀국하야 대한매일신보 부총무겸 회계로 양기탁 씨와 함께 일하였고 동시에 안창호․양기탁․고 전덕기․이동휘․이동녕․고 이승훈 등으로부터 조선 최초의 정치적 비밀결사로 유명한 신민회를 창립하고 그 재정을 맡은 간부가 되었다가 1911년 이른바 만주무관학교 사건으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개년의 선고를 받아 복역하는 중 다시 신민회 사건이라고도 하고 105인 사건이라고도 하는 유명한 사건으로 윤치호․양기탁․이승훈․안태국 등과 함께 징역 6년의 선고를 받아 대구감옥에 복역하다가 1914년 봄에 특사로 출옥하였고 그로부터는 실업에 종사하야 세상에 숨어 망명 동지의 가족을 구제하기로 일삼으며 금일에 이르렀다. 씨의 40년간 지기되는 모 씨는 말하되 “춘곡은 의리와 우정과 불평의 사람이었소. 그가 한번 허락한 동지에 대한 의리는 일찍 변해본 일이 없었소. 또 춘곡은 친구에 대하여는 항상 춘풍과 같은 우정을 가졌고 빈궁한 동지의 가족은 자기 가족과 같이 여겨서 의식을 같이하였소. 항상 불평이 있어 술로 잊으려 하였소.” 장례일자는 오는 13일 오전 11시라 하며 장지는 미아리 공동묘지라는데 씨에게는 미망인과 병두, 병기, 병수 3남 2녀가 있다. 동아일보 1932. 1. 11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064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의하면, 미국에서 귀국한 해는 1904년이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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