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自超 1327(충숙왕 14)∼1405(태종 5)
高麗말 朝鮮초의 중. 호는 無學·溪月軒, 성은 朴. 추증된 崇政大夫 門下待郞 仁一의 아들이다. 1327년(忠蕭王 14) 경상도 三岐(陜川郡)에서 태어나서 18세 때 小止禪師에게 중이 되어 具足戒를 받고 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운 뒤 鎭州의 吉祥寺, 妙香山의 金剛窟에서 수도한 다음 1353년(恭愍王 2) 에 元나라 燕京에 유학하였다. 이때 연경에는 고려 말엽의 명승인 懶翁이 가 있던 중이어서 대사는 指空禪師와 나옹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1356년 귀국했다. 그후 1373년(공민왕 23) 왕사가 된 나옹의 法을 이어 받았고 1376년(禑王 3) 에는 나옹이 그를 왕사로 추천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朝鮮太祖인 李成桂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安邊 釋王寺 절에 묵었는데 꿈에 한 노인이 쇠지팡이로 태조의 머리와 허리와 발 세곳을 찔러 꿰뚫는 것이었다. 또 거울이 깨지고 꽃이 떨어지는 꿈도 꾸었다. 그가 몹시 괴이적게 여겨서 강원도 伊川에서 토굴을 파고 수도하고 있는 무학대사를 찾아가 그 꿈의 길흉에 대한 해몽을 청함에, 일어나 크게 절하며 고려에 이어서 조선의 임금이 될 꿈이라고 하였다. 이에 태조가 대사와 함께 가기를 청하니 대사는 이천 토굴에서 나와서 태조와 함께 일단 석왕사에 이른 다음 文川 永興 咸興등지를 두루 돌며 名山 吉地를 얻어 조상을 親山에 緬禮하여 모셨다.
1392년 朝鮮開國후 王師가 되어 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 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 妙嚴尊者의 호를 받고 檜嚴寺에 눌러 있었으며, 그 다음해에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를 따라 鷄龍山 및 漢陽을 돌아다니며 마침내 漢陽으로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그의 壽塔이 회암사 북쪽에 세워지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金藏菴에 가 있다가 죽었다.
朝鮮王朝實錄의 太祖實錄 2년 1월 21일조에 「上 發松京 欲親見 鷄龍山形勢 將定都令三司事 安宗源……從之」「過檜岩寺 請王師自超以行」이라고 되어 있으며 2월 11일조에 「驚登 新都中心高阜 周覽形勢 問王師自超 以不能知對」라고 되어 있는바, 이때 대사는 “알지 못하므로 능히 말씀드릴 수 없다”고 대답함으로써 그곳이 도읍터가 될 만한 곳이 못된다는 것을 완곡히 일깨워 준 것이다.
그리하여 태조는 한양 北岳 아래 두곳에 마음을 두고 이를 친히 살피려 할 때 먼저 대사와 함께 도읍터를 살폈는데, 태조의 “북악 아래를 어떻게 보느냐”는 물음에 “사면이 높고 빼어났으며 그 한가운데가 펑퍼짐하니 도읍이 될 만하다. 그러나 중의에 따라 정하라”고 대답함으로써 계룡산 때와는 달리 은근한 중에 한양 북악을 적극 추천하였다. 이 의견에 쫓아 그날로 무악을 주장하는 河崙을 제외한 모든 신하들이 찬성을 표하는 가운데 한양정도는 결정을 보았다.
城北區 安岩洞 5가 157번지에 太祖 5년(1396) 王師無學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大韓佛敎 曹溪宗의 開運寺가 있다. 大雄殿을 중심으로 앞의 開運寺 현판이 걸린 큰 방과 大賢樓를 위시하여 應眞殿·山靈閣·鍾閣 등의 많은 건물이 있어 앞의 총총히 들어 선 民家와 경계를 連接한 곳에 一境의 佛家道場을 이루었다. 無學은 安岩山 기슭 지금의 高麗大 理工大 부근에 이절을 창건하고 寺號를 永導라 하였는데 正祖 3년(1779) 5월에 元嬪 洪氏가 세상을 떠나자 그 부근에 묘소를 정하고 이름을 永明園이라 함에, 절이 園墓에서 가깝다 하여 현재의 곳으로 옮겨 짓고 이름도 開運寺로 바꾸었다.
한편 성북구 안암 5동 34-5의 안암동 4거리를 기점으로 하여 제기동·용두동·상왕십리동을 남북으로 종단, 왕십리길과의 교차점인 성동구 무학국민학교 앞까지에 폭 25m, 길이 2,000m에 달하는 도로가 있는데 이는 조선 개국초에 이 도로의 종점지역인 왕심벌지역에 도읍지를 물색하려고 地相을 보러 다니던 무학대사를 인용하여 도로명을 붙인 것이다.
「漢京識略」에 “남산 꼭대기에 國師堂이 있는데 이것이 곧 木覓神堂인 것이다. 사당 안에 畵像이 있는바 일반이 전하여 이르기를 神僧 無學像이라 한다. 목멱신사에서는 해마다 봄·가을 두차례 醮祭(星辰祭)를 지내는데 그때 사당안에 뫼시어있는 화상은 그 옆 池閣으로 옮기어 놓는다”라고 하였고 「朝鮮人物古今誌」에도 “지금도 서울 木覓山위에 당을 설치하고 無學을 모시고 國師堂이라 한다. 많은 서울 사람들이 날마다 사당을 찾아가서 복을 빈다”고 되어 있어 서울 장안 사람들이 오랜동안 무학대사를 끔찍이 여겨 왔음을 알 수 있다.
저서에 《印空吟》이 전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35-7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