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상
1882.12.19 - 1974.05.14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정릉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미국 유학 후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고 외무차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상해에서 의열단으로 활동하며 국내로 폭탄을 반입시키다가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으나 증거가 없어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해방 후에는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의 부위원장을 지냈고,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 감옥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던 장건상은 정릉동 338-1번지(현 솔샘로6마길 17-4)에 거주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86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정릉동
  • 장건상 사진(일본유학시절)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장건상
  • 장건상 집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張建相
  • 이명칭: 장건상(張健相)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709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338-1 (솔샘로6마길 17-4 )

근거자료 원문

  • 본적: 부산 주소: 정릉동 계열과 단체: 임시정부 <활동 내용> 號 : 宵海 부산(釜山) 사람이다. 1916년 상해(上海)로 망명, 신규식(申圭植)이 조직 운영하던 동제사(同濟社)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으며, 1917년 만주(滿洲) 안동현(安東縣)에서 망명객의 길 안내역을 맡아 활동했고, 영국상선(이륭양행 소속) 안동지사장 죠지 쇼우와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수립을 위한 한인거류민단의 국민대회 준비위원이 되어 김규식(金奎植)·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임정을 수립하기 위한 준비에 분주하였다. 1919년 4월 13일 임정이 수립·선포되자 1919년 4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으로 선출되고 외무부(外務部) 위원이 되었다. 또한 동년 7월 1일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가 상해에서 창립되자 상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월 9일 의열단(義烈團)이 만주(滿洲) 길림(吉林) 파호문(巴虎門)에서 창립되자 후원자(총장)가 되고 기밀부·실행부로 구분하여 운영되는 조직의 기밀부 요직을 맡아 활약하였다. 1920년 2월에 북경(北京)으로 가서 2월에 의열단(義烈團)이 중국(中國)에서 폭탄을 매입하여 국내로 보낼 때 안동현(安東縣) 중국세관에 있는 영국인 보잉에게 임정외교차장으로서 신임장을 보내어 곽재기(郭在驥)와 이성우(李誠宇) 등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할 때 막후에서 지원하였다. 1921년 4월 19일에는 미국(美國)에 체재하고 있었던 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 이 미국정부에 대해 우리나라를 위임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 알려지자 이를 동지와 같이 크게 성토하였다. 동년 5월에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소위 창조파(創造派)의 일원으로서 김 립(金立)·원세훈(元世勳)·신 숙(申肅) 등과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를 북경(北京)에서 조직하고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8월에는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여 중앙정치위원 겸 7인 정치부의 한 사람으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공산당회의에 왕삼덕(王三德)·안병찬(安秉瓚) 등과 함께 대표로 참석하여 소련공산당 레닌을 면담하고 독립운동 지원자금 40만 루불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동년 9월에는 이르크츠크 재로한인공산자대회(在露韓人共産者大會)에 참가하였으며, 그곳에서 보리스 슈미야츠키를 만났고, 이르크츠크회의에서 의장단으로 사회를 맡았다. 1922년에는 북경에서 의사개업을 했던 한진산(韓震山)과 손잡고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대외업무를 수행하였다. 동년 1월 22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극동피압박인민대회(極東被壓迫人民大會)의 참가대표 52인 중 1인으로 선발되어 참석하고 김시현(金始顯) 등의 국내파괴 활동을 지원하고 협의하였다. 동년 12월에는 꼬르뷰로의 임원에 피선되었다. 1923년에 국내 및 국외의 지역대표로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를 구성할 때 노령(露領) 시베리아부 대표로서 상해(上海)에 왔으며, 회의 초안기초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후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 조직을 발기하였다. 192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외교총장으로 있으면서 의열단(義烈團)의 이종암(李鍾岩) 등의 입국활동시 필요한 혁명선언서 신임장과 위임장을 교부하였다. 1926년 북경(北京)에서 잡지 ≪혁명≫을 김성숙(金星淑)과 함께 발간하였다. 동년 10월 28일에 북경(北京)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의 취지문을 발표하고 7인 집행위원 중 1인이 되었으며 대표 조성환(曺成煥)의 명을 받아 중국 남부지방에 특파되어 선전에 주력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제3기 간부훈련을 마치고 민족혁명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다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당원으로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피선되었다. 1928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독립운동 자금관계를 의논한 뒤 상해(上海)로 돌아와 김원봉(金元鳳)과 만나 의열단(義烈團) 고문이 되어 폭탄을 만들어 국내에 반입하는 일을 지휘했다. 1929년에는 상해(上海)에서 클럽활동을 지휘했으며, 1930년에는 북경(北京) 화북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39년 상해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1년 동안 국내 각 경찰서로 끌려다니며 각종 고문을 받았다. 1941년에 건강의 악화로 사경을 헤맸으며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석방되어 가택연금 상태에서 휴양하였다. 1942년 국내를 탈출하여 만주·상해·홍콩을 경유하여 중경에 도착하였다. 동년 2월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개헌에 따라 주석 김 구(金九), 부주석 김규식(金奎植)이 선출되었는데, 이때 국무위원 겸 학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3년 10월 30일에는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서 인도공작원으로 파견되도록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에 신분보장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944년 4월에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5년 독립운동 좌우합작 대동단결을 위해 임정대표로서 연안에 파견되었다가 연안에서 광복을 맞이하여 중경 임정으로 돌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 6·25전쟁의 발발과 납북된 독립운동가들 전쟁 이후의 정세는 매우 어수선했고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까지 숱한 사건과 혁명, 희생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랬으므로 납북된 인사들은 물론 대한민국에 생존하고 있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과 조사,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때문에 나라를 위해 한평생을 살고도 궁핍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5·10 단독선거를 반대했던 많은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이 이승만 정권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 감옥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던 장건상은 정릉의 작고 남루한 오두막집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유가족들은 시신을 모실 관을 살 돈조차 마련하지 못했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친일파 색출 또한 이행되지 못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30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6년-장건상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 법과 졸업 후 상하이로 망명 1920년-장건상 의열단 고문으로 무장독립투쟁 지원 1946년-장건상 좌우합작운동 1950년-조소앙, 장건상, 안재홍, 조헌영 등 국회의원 당선 1952년-장건상 정릉동에 거주 시작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13쪽
  • ○ 한국광복군, 가장 강력한 독립군의 등장 이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1940년의 국외 상황은 충칭에 한국광복군이, 화베이에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조선의용대가 독립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임시정부에 합류합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국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시킵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협약에는 임시정부의 요인 조소앙과 장건상이 있었습니다. 장건상은 상하이에서 국내로 압송된 이후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있었는데 1942년 국내를 탈출해 충칭의 임시정부에 도착합니다. 그는 민족혁명당 당원으로서 외교연구위원과 국무위원, 학무부장 등의 요직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동합니다. 환갑을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젊은 당원들과 함께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 신청도 합니다. 장건상의 파견은 중국국민당의 견제로 불발되지만 그의 뜨거운 조국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14-115쪽
  • ○ 장건상과 배성룡, 이념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충칭에서 환국한 장건상 역시 좌우합작운동에 있어 중요한 인물입니다. 여운형과 친분이 각별했던 그는 해방정국의 극좌, 극우의 편향성을 지양하고 중간좌파의 노선을 지향했습니다. 미국 역시 이들 중도파를 지지하지만 1948년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운동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장건상은 여운형의 피살 이후 함께 창당했던 근로인민당을 이끌어갑니다. 같은 해 그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는데 회의에서 “우리 겨레는 공산주의를 가지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근로인민당 운동을 하는 까닭은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으로 평화롭게 살려는데 있다”는 발언으로 연금되고 맙니다. 결국 다른 인사들보다 보름이나 늦게 서울로 돌아오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6쪽
  • ○ 국외가 아닌 국내에, 임시가 아닌 정식의 정부가 수립되다 5·10총선 때 참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 세력은 2년 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대거 참여합니다. 그 결과 임시정부에서 일본과 맞섰던 조소앙, 장건상, 안재홍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됩니다. 조소앙은 성북구에서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로, 장건상은 부산에서 출마해 조소앙에 이어 전국 2위의 득표를 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9쪽
  • ○ 해방 이후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장건상 의열단의 든든한 고문 1882~1974 / 대통령장 / 정릉동 338-1 거주 미국 유학 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와 의열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입니다. 임시정부 수립 후 외무차장으로 활약했고 의열단 창립 후 고문으로서 무장독립투쟁을 지원했습니다. 해방 이후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의 부위원장으로, 제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 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9쪽
    신문 자료의 별세 기사를 통해 정릉동 338-2번지에 거주한 것을 확인하였다.
  • 해방 후 정릉동에서 여생을 보냈던 소해 장건상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조소앙과 마찬가지로 임시의정원으로 선출되고 외무부 위원이 됩니다. 그의 활약은 의열단의 창단 후 더욱 빛을 발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53쪽
  • 1920년대 항일단체를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요 단체가 의열단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11월에 만주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의로운 일을 열렬히 추진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단체입니다. 의열단의 특징은 오직 무력으로 싸워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무정부주의적 성향이었습니다. 외교와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이 어려우니 폭탄과 총으로 저항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지요. 이들의 무장투쟁은 실로 강력했습니다. 부산 · 밀양 · 종로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조선총독부, 도쿄 니주바시,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등에 차례로 폭탄을 투척해 일본을 겁먹게 합니다. 의열단의 주축은 독립군양성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58-59쪽
  • ○ ‘진짜 저항’을 보여주다, 의열단과 고문 장건상 의열단에서 활약한 성북인들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먼저 장건상이 있습니다. 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를 많이 했던 인물로 소개된 그는 의열단의 고문으로도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임시정부의 외교총장으로서 의열단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거나 자금을 모으는 일 등을 전체적으로 지원·지휘했습니다. 발로 뛰는 독립투사들의 활동을 위해 필요한 외교적 절차와 자금 문제 전반을 책임졌던 것이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59쪽
  • ○ 임시정부를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 - 한편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이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자금을 확보하는 데 역량을 모읍니다. 일종의 어음과 같은 애국공채를 발행해 독립자금을 모으기도 하고 외교정책을 위해 미주지역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1921년 일본이 연통제와 교통국을 와해시키고 이승만의 국제연맹청원사건이 알려지면서 위기가 찾아옵니다. 한반도의 운명을 국제연맹이 임시로 맡아 달라는 이승만의 주장이 알려지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충격을 받지요. 장건상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일을 크게 성토하고 1923년 위기에 빠진 임시정부를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됩니다. 국민대표회의의 의장은 김동삼이 맡았습니다. 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세력이 갈려 큰 논쟁이 붙습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고 주장하고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문제들을 점진적으로 고쳐나가자고 주장합니다. 이때 오세덕과 장건상은 신채호가 대표적인 인물로 있던 창조파로 활동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81쪽
  • ○ 조소앙,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다 1933년에는 조선혁명당, 조선의열단,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 한국독립당의 합당 논의가 결의돼 새로운 민족단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이 창당됩니다. 의열단 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장건상 역시 무장투쟁을 지향하며 당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지만 상하이에서 일본 영사관 형사에게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후 약 1년간 고문과 옥살이에 시달립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83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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