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시내버스 운행
?
사건 도시
1930년대 성북 지역에 처음으로 시내버스가 운행한 사건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에 시내버스가 등장한 것은 1928년 4월이었고 10대의 차량이 시내 중심부를 30분 간격 정도로 운행하였다. 점차 차량수가 늘어나면서 동소문, 삼각지 등으로 노선이 연장되었지만, 1930년대 전반까지 성북 지역까지 노선이 확장되지 않았다. 시내버스가 돈암동까지, 안암동을 거쳐 종암동까지 들어간 것은 1935년 전후 무렵이었는데, 성북 지역으로 봐서는 실로 하나의 공간혁명이었다. 1930년대 초 서울 전체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자, 시 외곽이었던 성북구 지역도 행정구역 확장과 시가지계획에 따라 1936년에 서울로 편입되었다. 자연히 교통 수요가 늘어나면서 버스노선이 만들어지고 1941년 전차노선이 혜화동에서 돈암동까지 연장되었다.
돈암동 종암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市內버스 運行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사건 도시

시기

  • 시대: 일제강점기
  • 시기: ?
  • 비고: 1934년 또는 35년부터 운행 시작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근거자료 원문

  • 3. 日帝下의 城北地域 變化에 영향을 미친 사건들 1931년 당시 京城府內의 인구수는 36만 5천인이었고 자동차 보유대수는 200대도 안되었다. 또 1934년 현재로 高陽郡 崇仁面내에는 한대의 자동차도 없었으니 당시의 이곳 주민이 서울市內로 가려면 徒步가 아니면 하루에 한 두번씩 밖에 안다니는 市外버스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1930년대 전반기, 京城을 출발하는 市外버스가 華溪寺와 安岩洞의 開運寺까지 다녔는데 하루에 2차례 왕복 정도였다. 요금은 화계사까지가 56전, 개운사까지가 20전이 었다. 가장 손쉬운 교통수단은 자전거였는데 1932년 12월 말 현재의 자전거 대수는 城北里 45대, 安岩里 75대, 鍾岩里 33대, 敦岩里 112대, 貞陵里 58대, 里門里 14대, 長位里 39대, 石串里 6대, 上月谷 4대, 下月谷 18대였으니 일반 대중들에게는 자전거를 탄다는 것도 하나의 꿈이었던 것이다. 京城府內에 市內버스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28년 4월이었고 겨우 10대의 차량으로 시내 중심부를 30분 간격 정도로 운행하다가 점차 차량수가 늘어나서 東小門까지 또는 西大門밖 靈泉까지, 弘濟內里에 있던 火葬場까지, 용산의 三角地 까지 등으로 노선이 연장되었는데 그래도 安岩洞이나 鍾岩洞 또는 敦岩洞까지의 확장은 30년대 전반기까지는 실현되지 않는다. 市內버스가 敦岩洞까지, 安岩洞을 거쳐 鍾岩洞까지 들어간 것은 1930년대의 후반기가 되면서 즉 1935년에서 36년에 걸쳐서였다. 城北地域으로 봐서는 실로 하나의 空間革命이었다. 이와같은 空間革命이 일어난데는 몇가지 要因이 있었다. 그 첫째는 人口의 증가 즉 交通需要의 증가였다. 1928년 당시 4,593호 22,185명이었던 崇仁面 인구수는 1933년에는 7,416호 36,797명이어서 戶數에 있어 61.4%,인구수에 있어 65.8%의 증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敦岩里의 경우는 28년의 406호 2,059명이 33년에는 861호 4,199명으로 戶數에 있어 112%, 인구 수에 있어서는 103.9%의 증가율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는 1934년에 普成專門學校가 安岩洞 1번지에 입지한 것과 같은 각종 시설의 입지였었다. 1939년에는 종전까지 明倫洞(당시는 崇洞)에 있던 京城高等商業學校(훗날 서울大學校 商科大學)도 鍾岩洞으로 이전 입지하고 있다. 세째는 서울의 行政區域 확장과 市街地計劃令의 시행이었다. 서울의 區域擴張으로 새롭게 京城府에 편입된 지역주민의 교통문제는 京城府가 책임지고 해결해 주어야 하는 것이 과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京城府市街地計劃중의 가장 주된 戰略事業으로 敦岩地區 구획정리사업이 포함되게 되었는데 구획정리가 되어 많은 주택이 들어서게 되면 당연히 주민의 교통문제가 시급한 과제가 되는 터였고 또 市內버스가 다녀야 그곳 땅을 사서 주택을 건축하겠다는 희망자도 나서게 된다는 필요성 때문에 市內버스 운영이 시급해진 것이다. 네번째의 요인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市內버스 운영권이 京城府에서 京城電氣柱式會社로 이양되었다는 점이다. 市內버스를 京城府가 운영할 때에는 그 路線선정이나 운영방식이 官僚的 姑息的이었을 뿐 아니라 市內電車와의 경쟁을 의식하여 電車가 다니는 길을 버스도 다니게 했으므로 兩者간의 경쟁이 치열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은 兩者의 영업성적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府營버스의 경우 1930년도의 收支決算이 겨우 1원 48전, 31년에는 14원 63전이 되어 減價償却은 염두에도 못두는, 사실상 缺損상태에 빠지게 된다. 31년 1월말의 新聞記事는 「京城府營버스 成績不良 存廢論 조차 대두, 그 대책을 철저 강구중, 2년간 缺損 近3만圓」이라고 보도한데 이어 31년 8월에는 「府營버스의 損害額 10만圓」이란 기사도 게재하고 있다. 電車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상세히 설명했듯이 府營버스가 이렇게 經營難에 허덕이고 存廢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府營버스와 競合關係에 었던 京城電氣柱式會社는 이 時期를 포착해서 府營버스 운영의 讓受를 획책한다. 監督官廳인 總督府·京畿道가 개입하여 府內外교통 전반문제를 토의한 결과 드디어 1933년 3월 10일자로 京電이 21만 8천圓을 京城府에 지불하고 府營버스 運營難을 京電에 양도한다는 假契約을 체결, 버스 54대, 貨物車1대, 車庫·事務所·工場·倉庫 등 24개陳 447평餘, 기타 機械工具類, 主任 기타 事務員4명, 現業員 188명 등 일체를 京電에 인계하고 33년 4월 1일을 期하여 새로 銀色으로 바꾸어 칠한 京電버스가 운행을 개시한다. 市內버스를 인수한 京電은 電車및 버스의 經營合理化를 위하여 버스노선을 電車노선과 병행시키지 않았으며 원칙적으로는 전차가 다니지 않는 區間을 택함으로써 버스를 전차의 보조수단으로 하였다. 즉 電車를 내리면 버스를 탈 수 있게하여 하나의 표(票)로써 兩者의 환승이 가능하도록 하고 料金은 종전대로 5전 균일로 하였다. 電車·버스 환승자유, 요금 5전 균일은 당시 日本國內에도 그 유례가 없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敦岩洞·鍾岩洞 등에 京電이 운영하는 市內버스가 들어간 정확한 일자는 찾을 수가 없으나 아마도 1934년 또는 35년경이었다고 추측하는 바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133-136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2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