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업
1843 - 1897
인물 개인 화가
화가이다. 김홍도, 안견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힌다. 인물화와 기명절지(器皿折枝, 일종의 정물그림),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렸으며, 근대화풍을 받아들인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장승업이 일구어낸 ‘오원양식’은 문인산수화풍과 남종화풍, 일격화풍을 모두 계승하는 한편, 이를 보다 호방하게 구사하면서 기이하고도 환상적 경향을 새롭게 수용했다는 평을 받는다. 장승업이 지내던 작은 초가집이 성북동에 있었는데, 현재 성북치안센터 뒤쪽의 집들이 들어선 곳이다. 화가 서세옥이 20대 시절 그곳을 찾았을 때는 그 초가집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장승업의 제자들도 스승을 따라 성북동 지역을 출입하였는데, 장승업의 직계제자인 조석진, 안중식의 뒤를 이른 근원 김용준도 ‘노시산방’이라는 이름을 붙인 성북동 집에서 살았다.
성북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張承業
  • 이명칭: 경유(景猷), 오원(吾園), 취명거사(醉瞑居士), 문수산인(文峀山人)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화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비고: 장승업 집터

근거자료 원문

  • 유학시절 방학을 이용해 잠시 귀국하게 되었고 어떤 지인의 집에 초청받아 갔는데 그곳에서 오원 장승업의 병풍을 보게 되 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겸재와 단원 등 대가들의 그림을 찾아서 공부를 하다가 결국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면에 칼로 베어낸 생선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생선의 살코기 무늬, 육질이 붓을 몇 번 안 댔는데도 얼마나 사실적으로 표현됐는지 살아 있는 생선으로 착각할 정도였다는 거예요. 그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위대한 화가가 있었구나.’ 감동하셨답니다. 또 붓이 한번 지나가면서 나뭇가지의 볼륨, 입체감이랄까, 농담에 의해서 나뭇가지가 힘차게 올라가면서 끝에 꽃과 과일이 달린 표현들을 보고 굉장한 경지라는 생각을 하신 거죠. 또 그릇의 원근법적 표현, 붓 한 번 찍어서 빛을 받는 부분과 그늘을 받는 부분을 농담으로 표현한 이파리 부분 등, 그 그림에 작가가 살아 움직이고, 대상으로 표현한 것이 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감동했다고 합니다. 이 때 오원 장승업이라는 화가를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우리나라 그림들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답니다. -서세옥, 「나의 스승 근원 김용준을 추억하며」중에서 오원 장승업은 근원 김용준보다 앞서 성북동에 살았던 예술가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았으나 작품을 통해 교감하는 관계로 그 인연이 인상적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14쪽
  • 장승업(張承業)은 김홍도, 안견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인물화와 기명절지(器皿折枝)와 화조화(花鳥畵)를 잘 그렸으며, 기운생동(氣韻生動) 하는근대화풍을 받아들인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장승업이 지내던 작은 초가집이 성북동에 있었다. 현재 성북치안센터 뒤쪽 집들이 들어선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高羲東) 화백과 문인화가였던 김용진(金庸震) 화백이 젊은 시절 장승업과 자주 어울렸을 때 있던 집이라고 한다. 이를 들은 서세옥 화백이 직접 찾아가보니, 집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랑채를 보니 방 한쪽 벽이 바깥쪽으로 물러나와 있어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장승업이 키가 커서 누워 자면서 다리로 벽을 밀어내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 집은 개발이 되면서 기록 되지 못한 채 없어지고 말았다.
  • 황해도 추정. 김홍도, 안견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꼽힌다. 호 오원吾園은 단원檀園 김홍도와 혜원蕙園 신윤복처럼 ‘나도[吾] 화원이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지었다. 그림 실력이 소문이 나 궁궐에까지 들어가 어명을 받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궁중화원이 되지 않고 그림 기법이나 유파에 얽매이지 않는 활동을 하였다. 그의 생애는 근원 김용준을 통해 일반에 알려졌다. 자신의 스승이자 장승업의 제자인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을 통해 들은 일화를 『근원수필』의 「오원일사」에 남긴다. 성북파출소(현재 성북1동 치안센터) 뒤쪽에는 장승업이 말년에 잠시 오가며 머물던 초가집이 있었다.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과 문인화가 김용진이 찾아와 장승업과 어울렸다고 전한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46쪽
  • ○ 오원 장승업은 이후 성북 미술인들의 선배 격 타고난 천재성으로 조선 화단을 호령했던 오원 장승업의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 성북동 지역 출입 장승업의 직계제자 조석진, 안중식을 뒤를 이은 근원 김용준은 ‘노시산방’이라고 불리던 자신의 성북동 집을 나중 후배이자 서양화가인 수화 김환기에게 넘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8쪽
  • 훗날 성북에 깃들어 살게 된 미술인들의 선배격인 오원 장승업. 그는 영화 <취화선>(2002)에서 술을 마신 취흥으로 일필휘지, 번득이는 영감을 화폭에 옮기는 천재적 조선말기의 화가로 관객들에게 각인됐다. 말 그대로 ‘취화선’이었다. 그의 호방한 아방가르드적 화풍이 후배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된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보여준 생사 경계를 초월한 듯한 신선과도 같은 장승업의 신화는 근원 김용준의 ‘근원수필’의 ‘오원일사’를 바탕으로 한다. “…오원은 생전 생사란 뜬구름과 같은 것이니 경개 좋은 곳을 찾아 숨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와 친했다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 종군기자 고 우미우라 아츠야의 말로는 매일같이 만나던 오원이 수년래로 거처가 불명하게 되었으니, 그는 필연코 신선이 된 것이라고 하더라….” ‘나도 화원이다’라는 뜻으로 스스로 오원(吾園)이라는 호를 붙인 장승업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함께 조선시대 3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조선말엽 최고의 화가다. 성북1동 치안센터 옆에는 그가 살았다는 초가집 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산정 서세옥이 20대였던 50여 년전 그곳을 찾았을 때는 그 초가집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분방한 열정과 탁월한 기량으로 ‘오원양식’을 일군 장승업은 지금의 광교부근에 육교화방을 마련하고 북경 역관들을 비롯한 서화애호가들의 후원을 받았다. 문인산수화풍과 관학화된 남종화풍, 참신한 일격화풍을 모두 계승하는 한편, 이를 보다 호방하게 구사하면서 기이하고도 환상적 경향을 새롭게 수용했다. 오원양식은 심한 변형으로 기괴한 느낌을 주는 고사산수화와 인물화 및 도석화를 비롯해, 당분법에 의해 호분과 농묵을 덧칠하거나 수묵과 담채의 번지기 또는 몰골법으로 활달하게 나타낸 감각적 화조동물화에서 각광받았다. 특히 그가 유행시킨 ‘기명절지화’는 문아(文雅)한 취향과 세속(世俗)적 기복이 공존하는 그림이다. 수묵을 위주로 하면서 연하게 바림하여 먹빛을 부드럽게 하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여 격조있는 문인화풍과 화원화풍이 교묘하게 복합한 화풍이다. 기명절지화의 유행은 그를 후원했던 중인 역관 계층의 취미 때문이었다. 이들은 직업상 중국을 자주 왕래하며 청말의 금석탁본, 서화고동 애완 문화를 직접 접했고, 이에 동참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고 감상과 수집을 할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신흥 엘리트 계층이었다. 기명절지화의 표본인 <백물도권>은 지식인들의 문화적 아취, 통속적 기복성, 그리고 유유자적한 일상의 향유 등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 고대 청동기와 난분, 백모란, 백목련, 수선화 등의 화훼류, 사군자에 속하는 국화와 난초 채소류인 배, 토란, 연밥, 가지, 무와 함께 게와 조개, 수석과 인삼, 주전자 등이 그려져 있다. 살아 꿈틀거리는 듯 호방한 그의 화풍은 화훼, 영모, 인물을 가리지 않는다. <녹수선경>은 사슴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신선을 묘사한 것으로 자화상이라는 설이 있는 작품이다. 이같은 오원양식은 개화기 서화계를 주도한 조석진(1853-1920)과 안중식(1861-1919) 등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90-191쪽
  • 정의 조선후기 「방황학산초추강도」·「기명절지도」·「호취도」 등을 그린 화가. 개설 본관은 대원(大元), 자는 경유(景猷), 호는 오원(吾園), 취명거사(醉瞑居士) 또는 문수산인(文峀山人)이다. 40세를 전후하여 화명이 높아지자 왕실의 초빙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감찰이란 관직을 제수받았다. 생애와 활동사항 장지연(張志淵)의 『일사유사(逸士遺事)』 장승업전에 의하면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의탁할 곳이 없다가 수표교(水標橋) 부근에 살고 있던 역관(譯官) 이응헌(李應憲 : 서화금석 수장가 이상적의 사위)의 집에 기식하면서 어깨너머로 글 공부와 원(元)·명(明) 이래의 명적(名蹟)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는 역관 출신으로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변원규(卞元圭)의 집에서 지냈고, 조선말기 유명한 정치가이자 서화가인 오경석(吳慶錫)의 동생인 오경연(吳慶然)의 집에 출입하며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화풍을 직접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실제 『시중화(詩中畵)』, 『고금명인화교(古今名人畵穚)』, 『인재화승(紉齋畵賸)』 등의 중국 화보를 임모하기도 했다. 그는 술과 여자를 몹시 좋아하여 미인이 옆에서 술을 따라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고 하며, 아무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방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그의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그의 예술안(藝術眼)에는 왕자(王者)나 부호(富豪)가 다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기질은 강렬한 필법(筆法)과 묵법(墨法) 그리고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設彩法)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산수화, 도석·고사인물화(道釋·故事人物畵),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사군자(四君子) 등 여러 분야의 소재를 폭넓게 다루었다. 전반적으로 문기(文氣) 어린 격조보다는 뛰어난 기량이 돋보인다. 초기 19세기 대표적인 화원(畵員) 유숙(劉淑)에게 배워 회화의 기틀을 다졌으며 40대 이후 그림이 원숙한 경지에 도달하여 대화가의 명성을 얻었다. 산수화는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 가운데 황공망(黃公望)과 왕몽(王夢)의 그림에 근거하고 있으며, 청나라 초기의 사왕오운(四王吳惲) 계통의 각종 남종화풍과 각체의 북종화풍을 함께 소화하여 그렸다. 또한 새로운 개성을 보이는 양주화파(揚州畵派)와 해상화파(海上畵派)의 근대적 화풍을 소화하였다. 특히 기명절지에서는 청나라 말의 조지겸(趙之謙), 오창석(吳昌碩) 등의 화풍과 근대 감각이 엿보이는 음영법(陰影法)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조선 말기의 회화를 마지막으로 꽃피우면서 그를 사사한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에게 전하여져 우리나라 근대 회화의 토대를 이루었다. 대표작으로 30대 기년작인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근역화휘(槿域畫彙)』에 포함되어 있는 「방황학산초추강도(仿黃鶴山樵秋江圖)」(1879년), 간송미술관 소장의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 「산수도」, 「귀거래도 歸去來圖」, 「기명절지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홍백매십곡병(紅白梅十曲屛)』, 「호취도(豪鷲圖)」,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등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장승업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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