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성
1912.06.22 - 2005.02.28
인물 개인 화가
인물 개인 교육가
동양화가이다. 193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연구단체인 ‘후소회(後素會)’를 김기창 등과 함께 만들었고, 이후 잇따라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해방 이후 삼선교 언덕배기에 살다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설립되면서 동양화 교수가 되어 서울대 관사로 들어갔다. 1963년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하고 동양미술을 가르쳤으며 이듬해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다. 1966년 귀국하여 삼선동 4가 45번지에 ㅁ자 구조의 단층집을 마련하여 살다가, 1971년 지역개발로 인해 이사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이충무공 영정」, 「성모자상」, 「김유신장군 초상화」, 「백두산 천지」 등이 있다. 시(詩)·서(書)·화(畵)를 온전히 갖춘 현대화단의 마지막 문인화가로 평가받는다.
삼선동
  • 1959년 중앙공보관 전시실에서 월전 장우성과 2인전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4가 45번지

근거자료 원문

  • 3. 장우성(1912~2005) 한국전통 문인화의 맥을 잇는 화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연구단체인 ‘후소회’를 1936년 김기창, 장덕과 함께 발족했다.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입선한 이후 1941~1943년 연속 특선해 화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1946년 서울대 미술대학이 설립되며 동양화 교수를 맡아 박노수, 박세원 등 해방 후 1세대 작가를 양성했다. 월전은 특히 이순신, 김유신, 권율, 강감찬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위인 초상화를 가장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 삼선교 언덕배기 집에서 셋방을 살다가 서울대 관사에서 생활했다. 1963년 미국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하고 1964년에는 미국 국무성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한국화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1966년 귀국한 이후에 한국미술가협회 부이사장(1969),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1970)에 취임하고 그해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또 같은 해에 국전 운영위원으로 선임되는 등 미술단체의 중요보직을 두루 거쳤다. 주요작품으로는 아산 현충사와 정읍 충렬사에 봉안된 ‘이충무공 영정’, 바티칸궁전 소장 ‘성모자상’, 경주 통일전 ‘김유신장군 초상화’, 국회의사당 벽화 ‘백두산 천지’, 예산 충의사 ‘윤봉길의사 영정’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또한 현대화단의 마지막 문인화가로 평가받는 장우성 화백은 시(詩), 서(書), 화(畵)를 온전히 갖춘 전통문인화의 깊이 있는 세계를 일치시킨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화동원(書畵同源ㆍ서예와 회화의 뿌리가 같다)’의 인식에 기반한 월전의 작품들은 높은 문인화의 경지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1966년 귀국한 이후 삼선동의 ㅁ자 구조 단층집에 거주하다가 1971년 지역개발로 인해 삼선동을 떠났고, 1990년 팔판동에 월전미술관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92-193쪽
  • 한국 전통 문인화의 맥을 잇는 화가이다. 1936년 김기창, 장덕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연구단체인 ‘후소회後素會’를 발족시켰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설립되며 동양화 교수를 맡아 박노수, 박세원 등 해방 후 1세대 작가를 양성하였다. 이순신, 김유신, 권율, 강감찬 등 우리나라에서 위인 초상화를 가장 많이 그린 화가로 꼽힌다. 해방 이후 삼선교 언덕배기집에서 셋방을 살다가 서울대 관사에서 생활하였다. 1963년부터는 미국에서 동양예술학교를 설립하고 한국화를 알린다. 1966년 귀국하여 삼선동 4가 45번지에 ㅁ자 구조의 단층집을 마련하였다. 지역개발로 1971년 삼선동을 떠났고, 1990년에는 팔판동에 월전미술관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47쪽
  • 한국 문인화의 맥을 잇는 화가 장우성은 1912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세 살 되던 해 봄, 항일의병단에 자금을 지원했던 증조부는 일본의 탄압을 피해 가족들을 이끌고 경기도 여주 외사리로 이사한다.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누구보다 강했던 집안어른들은 일본식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닐곱 살이 될 무렵 공립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아이들과 달리 집 가까이 살던 한학자 이광암의 글방에서 한학을 배운다. 문우文友들과 함께 시를 짓고, 책을 읽는 모임에서 옛 선비들의 풍류를 익혔다. 이때 배운 동양사상과 풍류는 훗날 그의 그림에 녹아든다. 어린시절 마을을 뛰놀며 꽃과 나무, 새와 야생동물이 자라는 모습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감수성을 키웠다. 한밤에 뜨는 달빛은 특히 장우성에게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날마다, 계절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달의 정취에 빠져 아무도 없는 텅 빈 밤에 한없이 달을 바라보기도 했다. 아름다움을 보는 예민한 감각은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집에 걸려 있던 그림과 글씨를 따라 해보기도 하고, 미인도를 그려 방에 붙여 놓기도 했다. 열 서넛 무렵 놀러간 친구네 집에서 대형 초상화를 처음 보았다. 얼굴 표정, 옷 주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눈 앞에서 대하는 듯했다. 비단 위에 그려진 초상화를 본 뒤부터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화가를 ‘환쟁이’라 업신여기던 시절, 위당 정인보처럼 훌륭한 한학자가 되길 바랐던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 무렵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처음 올라왔다. 새로운 문물과 수많은 사람들을 보니 시골에서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고향마을에서도 신식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늘어나자 신학문을 배우고 싶은 조바심이 일었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매부에게 부탁하여 보통학교 국어독본을 얻어 독학하고, 일본어와 신문학을 익혔다. 이를 알게 된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일본인들이 가르치는 신학문을 몰래 공부하는 것보다는 화가가 낫겠다는 생각에 서울에 있는 이당 김은호에게 아들을 보낸다. 당시 김은호는 화단畵壇을 이끌던 작가 중 한 명으로 그에게 배우는 제자가 여럿 있었다. 서울로 아들을 유학 보내며 아버지는 훌륭한 화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월전月田’이란 호를 지어준다. 아들이 좋아하는 달[月]과 마을 이름 ‘사전絲田’에서 글자를 따서 지은 호이다. 달은 어두운 밤을 대낮같이 비춰 주는 광명을 가졌고, 그 빛이 정감에 넘쳐 시인, 화가 등 예술인들과 항상 친근한 벗이 되어 왔을 뿐 아니라, 그 청아한 밤의 정취가 누구에게나 즐겁고 반가운 존재이니 화가의 아호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것이고, 밭은 꼭 농경지를 뜻하는 밭이 아니라 넓은 땅, 펼쳐진 들녘을 의미하는 것이니, 달과 밭을 곁들여 생각할 때 이 호가 갖는 풍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씀하셨다. - 장우성, 「선친께서 지어 주신 월전」- 서울로 올라와 종로 단성사 뒤편의 봉익동에 하숙을 정하고,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김은호의 낙청헌絡靑軒을 찾아 갔다. 당시 낙청헌에는 운보 김기창, 현초 이유태, 향당 백윤문 등이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이당 화숙은 그림을 그리는 스승을 본보기 삼아 각자 자신의 실력을 키우는 수업법이었다. 교육생들은 어깨너머 스승의 기법이나 표현 방식을 배우고 익혔다. 그림을 공부하는 한편 아버지와 오랜 친분이 있던 위당 정인보에게 동양철학과 조선의 역사를 배운다. 정인보가 가르치고 가슴에 심어준 민족정신은 우리 전통 문인화의 정신을 찾아 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한국화의 바탕은 올곧은 정신을 바로 세우는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1933년 제12회 서화협회전에 글씨를 출품하여 입선한다. 이듬해 서예의 대가 성당 김돈희가 이끄는 상서회尙書會에 참여한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한학과 서예를 배운 바탕 위에 서법을 두루 익혀 글씨를 한층 다듬어 나갔다. 이때 평생의 벗 소전 손재형과 인연을 맺었다. 장우성은 도제식 학습방식으로 많은 젊은 화가들이 스승의 화풍을 그대로 따라 이어가는 풍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화풍을 고민하며 연습을 거듭한다. 이당 화숙에서 공부한지 1년만인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해빈소견海濱所見>으로 입선을 하며 주목을 받는다. <해빈소견>은 파도가 치는 바닷가의 바위 위에 여러 마리의 갈매기가 노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갈매기를 실제로 본적이 없던 장우성은 작품 구상 후 창경원 동물원에 찾아가 새를 관찰하고, 스케치를 했다. 새의 움직임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 위해 스케치만 수백 장을 한 끝에 작품을 완성했다. 선전 13회부터 15회까지 잇달아 <신장新粧>, <귀목歸牧>, <요락搖落>이 연이어 입선하며 호평을 받았다. 선전 입선으로 화단에 발을 내딛은 장우성은 1936년 김기창, 이유태 등 이당 화숙의 화우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연구단체인 ‘후소회後素會’를 만들었다. 공자가 말한 회사후소[繪事後素: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이후에 한다는 뜻으로, 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에서 따온 이름으로 정인보가 지어주었다. 1930년대에는 서화협회전이나 선전 등 몇몇 공모전 외에는 화가들이 그림을 발표하고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후소회 회원들은 전시를 열어 화가들의 활동을 독려했다. 창립전에는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백윤문 등이 출품하였고, 김은호와 소정 변관식이 후소회 창립과 발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강제 징용을 피해 고향으로 내려간다. 1945년 10월 서울로 돌아와 가깝게 지내던 서양화가 길진섭의 소개로 성북구 안암동에 있는 국악인 유기룡의 집에 잠시 거처한다. 얼마간을 안암동에서 지낸 뒤 돈암동 삼선교 언덕배기, 성곽 바로 아래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한다. 집 주인은 해방 전 부터 알고 지낸 정동석이었는데, 그가 취직한 후 마련한 삼선동 집의 바깥채를 빌려 살림을 차렸다. 바로 이웃동네인 성북동에는 서양화가 김환기, 소설가 이태준, 백양당 서점 주인 배정국 등 문화예술인들이 살고 있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전통을 잇고 예술을 즐기는 공통점이 있어 이들과 곧잘 어울렸다. 삼선동 셋방으로 이사하고 얼마 뒤, 미술평론가이자 화가인 근원 김용준이 장우성을 찾아왔다. 우석 장발이 서울대학교에 미술대학을 만들고 있다며 주선을 해 줄테니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일본 동경미술학교와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장발은 미술대학을 만들어 미술 교육에 힘쓴 교육자이자 화가이다. 장우성은 예술가 스스로 사명감을 가지고 화가를‘환쟁이’라며 낮춰 보는 선입견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재능 있는 학생들이 체계 잡힌 교육을 통해 실력을 키우면 자연히 화가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것이었다. 장발의 권유로 1946년 새로 생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생활을 시작한다. 해방을 맞고 미술 전문 교육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대학으로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방향 설정이 문제였다. 미술학부 교수들은 민족미술 건설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 했다. 우리들의 전통을 어떻게 살리고 이어갈까 하는 현안 문제를 놓고 근원(김용준)과 나는 책상을 마주 놓고 앉아서 틈만 나면 이야기를 나눴다. … 이때 근원과 나는 전통을 되살리는 데 목표를 두고 새로운 시대사조를 수용하려는 데도 신경을 썼다. - 장우성,「 한국화의 방향」- 이 무렵 장우성은 삼선동에서 계동으로 이사한다. 월세 집을 전전하는 장우성에게 김환기는 성북동에 사둔 2층 양옥을 내어 주었다. 그러나 이삿짐을 제대로 풀기도 전에 언론인 이관구에게 집이 넘어간다. 그간 사정을 아는 이관구의 배려로 서울대 관사로 이사할 때까지 아래층과 위층을 나눠 생활할 수 있었다. 혜화동 195번지 관사에 살던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일찍 피난을 가지 못해 삼선동 한성여고 아래 후미진 곳에 살던 처남 집과 정동석의 집에 숨어 지냈다. 이념 대립은 학교 안에서도 일어나 교수인민재판, 강제 납북 등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몰아치는 인민군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급히 가족을 데리고 대구와 부산으로 피난한다. 1951년에는 이유태와 김인승, 김원, 김흥수 등의 화가들과 함께 종군화가로 참여하여 전쟁의 참상을 그려 기록한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현장에서 지낸 3개월이란 시간이 더디고 길게 느껴져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그때의 경험에서 전쟁의 공포와 생명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종군 후 부산에 있던 서울대학교의 피난학교에 합류한다. 피난학교는 송도 해수욕장에 있는 일본 요릿집의 방 몇 개를 빌려 마련한 열악한 교사였다. 교수들도 이곳에서 합숙하며 피난살이를 견뎠고, 생계를 잇기 위해 김세중, 박세원, 장운상 등과 학생들과 함께 대한도자기회사에서 수출하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임시학교가 판잣집으로 옮겨가고 미술대학의 간판도 걸어 제법 자리를 잡아 가자 학교 일에 전념하기 위해 도자기회사 일을 그만두고 부산에 정착하여 대구, 부산 등지에서 몇 차례 전시회를 열었다. 종군화가단에 참여했던 화가들은 대구에서 <6·25 기념전>을 개최하고 전쟁기록화와 사진, 전리품을 전시해 전쟁의 참담함을 알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 친구집에서 인상 깊게 본 인물 초상화를 그릴 기회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부산 피난 시절 조병옥의 소개로 만난 권승하가 현충사 이순신 영정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한다. 초상을 그리기 전 이순신에 관한 기록을 찾아 공부하고, 후손을 만나 얼굴과 골격을 살펴 고심을 거듭한 끝에 영정을 그린다. 조선시대 명장 이순신의 위엄과 기개를 담아 그린 영정은 1953년 10월 아산 현충사에 봉안되었다. 인물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표현하는데 능숙하여 1950년대 초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를 그린다. 이 작품은 성모마리아의 성년을 기념하여 바티칸 교황청이 개최한 국제성미술전에 출품한 성화 3부작이다. 그림 가운데 성모가 아기예수를 안고 서 있고, 왼쪽에는 여성 순교자 3인, 오른쪽에는 남성 순교자 3인을 그렸다. 한국 가톨릭 전통을 보여주려는 듯 성모와 순교자 모두 한복 입은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 전쟁 후 서울로 돌아와 학생을 가르치며 전통문인화의 맥을 이어갔다. 박노수, 박세원 등 해방 후 1세대 작가들이 장우성의 지도 아래 화단으로 진출하였다. 1959년에는 서울대학교 동료 교수이자 조각가인 김종영과 <장우성·김종영 2인전>을 열기도 했다. 벽에는 그림이 걸리고, 가운데에는 조각 작품이 놓였다. 이 전시는 동양화와 조각이 한 자리에 전시된 첫 번째 사례로 새로운 지평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1년 종로구 관훈동에 2층 양옥을 빌려 ‘월전화실’을 열고 작품 창작에 힘을 쏟는다. 학교는 떠났지만 한국화를 배우려는 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이 시기 제자 중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외교관 부인들이 세계의 가족이란 뜻의 ‘오환회五環會’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그림을 배우고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주한 외국인들과 교류가 생기면서 미국과 유럽의 현대미술을 알아보기 위해 1963년 7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가톨릭대 미술관전시회, 미국 국무성 화랑 초대전, 워싱턴 스퀘어 갤러리의 세계 38개국 작가 초청전시에 한국 대표로 출품하여 작품을 선보였다. 1965년에는 오환회 회원들과 함께 사단법인 동양예술학교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지도하고 작품전을 개최하여 우리 문화와 한국화를 알리기도 했다. 미국 생활 4년 3개월만인 1966년 10월, 한국으로 돌아와 종로구 수송동에 화실을 마련하고 ‘백수노석실白水老石室’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각별하게 지낸 전각가 철농 이기우가 하루는 술에 취해 흥이 올라 그 자리에서 당호를 새겨주었다. 주머니칼로 새겨 깊이 파이기도 하고, 새김면이 고르지도 않았지만 친구의 손맛이 멋스럽게 들어간 작품이었다. 장우성이 서울대를 그만두고 미국에 있는 동안 가족들은 동료 교수의 배려로 서울대 관사에서 지내지만, 계속 머무르지 못하고 어렵게 삼선동 4가 45번지에 집을 마련했다. 삼선동은 셋집을 전전하긴 했지만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 한동안 머문 동네이고, 가까이 살며 교유한 지인들과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했다. 삼선교 개천에서 멀지 않았던 집은 나무와 벽돌로 지어진 ㅁ자 구조의 작은 단층집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방과 거실, 작은방 앞에 조그마한 마루가 이어져 있고, 작은 마당이 있어 몇 그루 꽃나무를 심을 수 있었다. 돌을 감상하는 취미가 있어 모은 돌을 구석구석 놓고 소소하게 집안을 꾸몄다. 그러나 삼선교 주변이 개방되어 상가아파트가 들어서고 주변이 복잡해지자 한적한 수유리로 이사한다. 미국에서 그린 그림 여덟 점과 귀국 후 그린 그림 스물 일곱점을 모아 연 개인전을 시작으로 실제의 경치를 그대로 담아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구도와 화법으로 새로운 문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수묵으로 선을 긋고 색채를 더한 화폭에는 시구가 함께 어우러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제2대 관장인 삼불 김원룡은 “시서화의 3절로 이 세 가지를 겸전한 전통적 작가는 장우성이 유일하고 그로서 이 전통은 마지막이 될 것이다”이라고 평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환경오염으로 죽어가는 백로, 남북분단 등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그림을 발표하였다. 또한 초상화 작업을 이어나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위인 초상화를 가장 많이 그린 화가로 꼽힐 정도였다. 대표작으로 권율 장군, 다산 정약용, 강감찬 장군, 김유신 장군, 윤봉길 의사 등이 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걸릴 작품을 의뢰 받았을 때는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고심 끝에 <백두산 천지>를 그렸다. 이때는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못 얻을 때라 수소문 끝에 어렵게 백두산 천지를 찍은 사진을 보고 와 길이 7미터, 높이 2미터의 대작으로 그려냈다. 작품활동 외에 홍익대학교 미술부 학장, 대한민국예술전람회 심사위원, 예술원 회원 등 화단의 중진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였다. 1990년에는 종로구 팔판동 35-1번지에 동양미술전용 미술관인 월전미술관을 설립한다. 화실 당호는‘대나무 같이 맑고 차며, 물빛처럼 투명하고 푸르다’는 뜻을 담아 ‘한벽원寒碧園’이라 하였다. 미술관 운영과 함께 한국화단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동방예술연구회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 정기적인 문집 《한벽문총》을 발행하였다. 마음을 제대로 갖춘 후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정신과 절제된 무위사상의 동양화 정신을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월전미술상을 제정하였다. 동양 고유의 정신을 온전히 화폭에 구현하고, 동시대의 모습을 새롭게 담아낸 화가 장우성은 2005년 9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2년 후인 2007년, 유족에게 기증받은 작품과 소장품으로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이 개관하여 장우성의 정신을 잇고 있다.
  • 1912 충청북도 충주 출생 1932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 <해빈소견> 입선 1936 후소회 창립 1946~1961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 1949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최연소 심사위원 위촉, 추천작가 선정 1965 미국 워싱턴 동양예술학교 설립 1971 제16회 예술원상 수상,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수 1991 월전미술관 개관, 동방예술연구회 개설 2001 대한민국 문화훈장 금관장 수훈 2005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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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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