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초
1919 - 2002
인물 개인 음악가
첼로연주가이자 교육자이다. 1919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평양에 있었던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음악공부를 하였다.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하여 실내악을 공부하고, 동경제국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 후 고려교향악단에서 활동하다 1952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제자를 길렀다. 첼로를 대중에게 알리고 실내악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5년에는 바로크합주단을 창단하였고, 1979년에는 동양 최초로 첼로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였다. 활발한 연주활동 외에도 음악계의 원로로서 더 좋은 음악환경을 만들고 음악계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힘썼으며 대한민국 예술원상, 대한민국 금관 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삼선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全鳳楚
  • 이명칭: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음악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근거자료 원문

  • 193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민간 음악전문교육기관인 경성음악전문학원이 생기며 이관옥이 교수로 참여하는 가운데 개교 3주년 기념음악회의 초청연주자였던 전봉초와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며 초대 음악교수로 함께 일하고, 삼선동 이웃으로 지낸다. 해방 후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에 윤이상, 이인범, 전봉초, 이봉수 등이 참여한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82쪽
  • 실내악 운동을 펼친 첼로 연주가이다. 숭실중학교 2학년 때 우리나라 1세대 첼로연주가인 김태연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여 첼로를 배운다. 일본 동경제국음악학교에 유학하고, 해방 후 고려교향악단과 서울교향악단에서 수석 연주자를 맡았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교수로 있으며 실내악과정을 개설하고, ‘실험악회’, ‘푸리마 트리오’, ‘서울실내악협회’ 등을 조직해 실내악을 알린다. 그가 우리나라 최초로 창단한 실내 관현악단인 바로크합주단은 2015년 창단 50주년을 맞았다. 한국전쟁 후 성악가 이관옥이 살던 삼선동 집으로 이사하였고, 몇 년 뒤 근처에 집을 마련하였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80쪽
  • 첼로 연주자인 전봉초는 1919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집안 사정으로 할머니 밑에서 지내다 국민학교 1학년 때 북창에 있는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다. 북창은 대동강 상류에 위치한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승합자동차가 이틀에 한 번 평양을 오갈 뿐, 바깥 문화를 접할 기회가 드물었다. 부모님이 하던 잡화점에 담배, 석유 등 생필품이 들어오면 집 앞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을 할 정도였다. 한학과 서화에 뛰어난 외할아버지와 마을에서 유일하게 글을 읽을 줄 알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형제들 모두 예술적 감수성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밤 마실을 온 이웃들에게 <장화홍련전>, <옥루몽>과 같은 이야기책을 읽어주곤 했다. 아이들도 아주머니들 곁에서 옛이야기를 들으며 상상력을 키웠다. 전봉초는 평양으로 진학한 형들이 방학 때 돌아와 들려주는 대도시 이야기와 전화, 유성기, 사진기 등 새로운 물건들에 흥미를 느꼈다. 캔버스를 메고 산과 들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 큰 형과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작은 형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형이 듣는 음악을 따라 하모니카로 한 음, 한 음 어설프지만 음을 이어가며 노래를 연주 해 보기도 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아동성경학교에서 난생 처음 보는 악기인 바이올린 소리를 김동진의 연주로 듣게 되었다. 그 선율에 반해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운다. 우리나라 대표 가곡 <봄이 오면>, <가고파> 등을 작곡한 김동진이 숭실중학교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 작곡법을 배울 때였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큰 형 전화황(본명 전봉제)은 동창인 김동진에게 동생의 바이올린 강습을 부탁하였다.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장로교회와 천도교 소년회를 두루 따라 다니며 주로 민족주의 사상의 고취에 심취되어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먼 촌수되는 나의 형님으로 굳게 믿었던 나는 성장해서 전봉준과 같은 혁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의 일이다. 평양 숭실중학에 다니던 김동진씨가 하기夏期아동 성경학교에 와서 바이올린 독주를 하는데 내 나름대로 굉장히 감동되고 감격하였던 모양이다. 김씨의 바이올린 연주로 해서 나의 혁명가의 꿈은 사라지고, 어린 심금을 울려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 전봉초의 글 - 연주 솜씨가 하루가 다르게 늘며 음악에 재미가 붙어 전봉초는 음악공부를 할 수 있는 숭실중학에 진학한다. 현제명, 안익태 등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선구자들이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학교였다. 본격적으로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배우며 두각을 나타내 2학년때는 평양방송국 개국기념 프로그램에서 바이올린 협주곡인 마스네의 <타이즈의 명상곡> 연주에 참여하기도 한다. 학교를 다니던 중 폐렴이 걸려 요양을 하는 동안 큰 전환점을 맞는다. 우리나라 첼로 1세대 연주자인 김태연의 연주를 듣고 나지막하고 깊이가 있는 첼로 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김태연에게 2년 동안 첼로를 배우고, 전문적인 음악공부를 위해서 일본 동경제국음악학교 기악과에 입학한다. 아무도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 밖의 실력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오무라 우히치[大村卯七]는 전봉초를 일본교향악단 객원 연주자로 추천했다. 다른 일본인 학생들보다 먼저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한편 현악과 주임을 맡은 스즈키 선생이 만든 실내악단에서 수석 첼리스트로 참여하며 실내악 경험을 쌓아간다. 이 무렵 바이올린 연주가이자 작곡가인 김재훈이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교육기관인 경성음악전문학원을 설립한다. 독일의 전문적인 음악교육제도를 본 뜬 교육과정을 기본으로 음악이론과 음악사, 외국어 등을 가르쳤다. 성악가 이관옥, 오경심, 바이올린 안기영, 이승학 등이 교수진으로 참여하였다. 학교에서는 매년 음악회를 개최하여 서양음악을 일반에 소개하는 활동을 펼쳤다. 1940년 개교 3주년 음악회에 연주자로 초청받은 전봉초의 연주는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연주 초청이 잇달았다. 이듬해 피아니스트 조윤옥, 바이올리니스트 안성교와 중구 태평로에 있던 부민관府民館에서 3중주 연주회를 열었다. 일본에 돌아간 전봉초는 한국인 젊은 연주가들과 실내악 그룹을 만든다. 바이올린 박민종, 정희석, 피아노 윤기선 등과 곡 연습을 하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1943년 동경제국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요미우리 신문사가 주최한 전全 일본신인선발연주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한다. 일본 콘서트홀의 시초인 히비야 공회당[日比谷公會堂]에서 랄로의 <첼로협주곡>을 연주하였다. 그러나 전문 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하던 때,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될 위기에 처한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길이었고,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건강하게 다시 첼로 연주를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입대를 며칠 앞두고, 스승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제자의 재능과 미래를 걱정한 오무라 교수는 “기량과 인품은 내 명예를 걸고 책임 질 수 있다”는 소개장을 써주었다. 만주로 건너가 쟁쟁한 실력의 일본인 연주가들이 모여 만든 신경교향악단에 입단한다. 학교를 막 졸업한 새내기 단원이라 손이 얼어붙는 듯 한 하숙방에서 추위를 견디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 베토벤의 <운명>으로 입단 심사를 받고, 다음 해 같은 곡을 연주한 차석 연주자가 된다. 첼로파트의 맨 뒷줄 자리에서 2년만에 수석 첼리스트가 되어 지휘자 바로 앞자리까지 올랐다. 교향악단 연주와 별도로 유학생들을 모아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을 이어나간다. 1945년 신경교향악단의 일본인 음악가들과 함께 만주 흑하성黑河省에 위문공연을 갔을 때였다. 8월 15일, 드디어 한국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패전 소식을 들은 대다수 일본인 단원들은 불안에 휩싸였고, 전봉초를 경계하기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먼저 친구 임원식에게 잠시 맡겨둔 악기를 찾으려 하얼빈으로 간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밤을 빌어 이동을 했지만 일본인이라는 오해를 받아 소련군에 끌려가고, 중국인들에게 악기와 악보를 빼앗기는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5월 월남하여 현제명과 김생려가 주축이 되어 만든 ‘고려교향악단’에 참여한다. 해방 이후 최초이자 유일한 교향악단이었다. 지휘는 계정식, 악장은 김생려가 맡았고, 전봉초가 수석연주자 겸 기획부위원을 담당했다. 서양음악을 알리고 음악계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1년 동안 스물 네 번의 연주회를 열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단원들이 개인사정으로 악단을 떠나고, 재정까지 악화되었다. 이에 뜻을 같이하던 계정식, 이인선, 김천애, 김생려, 전봉초 등은 의기투합하여 1946년 10월 서울관현악단을 창립한다. 1년 뒤 서울교향악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제1회 정기공연을 개최하였다. 교향악단의 수석연주자로, 독주자로 활동하며 촉망받는 젊은 첼리스트로 점차 이름을 알린다.
  • 해방 후 사회가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서울교향악단 지역 공연 중 대구에서 전쟁 소식을 듣고 가족이 있는 서울로 급히 돌아온다. 그러나 이미 서울은 인민군 치하였고, 모두 남쪽으로 피난을 가느라 바빴다. 고향으로 갈 수도 없고, 두 아이와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가기도 어려웠다. 우연히 만난 친구의 도움으로 인민군협주단에 들어갔으나 국군을 피해 인민군이 퇴각하며 가족을 서울에 남긴 채 북한까지 올라간다. 다행히 고향 근처에서 도망쳐 육군 군악학교 교관이 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부산으로 피난해 친척이 하는 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내던 중 서울대 음악대학 학생과장을 맡고 있던 현제명이 찾아왔다. 어려운 시기 일수록 후학을 키우고 음악가로서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설득에 현제명의 일에 동참한다. 10년 가까이 현제명을 가까이에서 보필하였고, 그가 세상을 뜬 뒤에는 마음 속의 스승이자 어른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국군이 서울을 되찾고, 휴전이 되며 피난민들이 고향을 찾아갔다. 그러나 삼팔선으로 나뉜 남과 북,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은 졸지에 고향을 잃었다. 전봉초의 사정을 안 성악가 이관옥과 한규동 부부는 성북구 삼선동 자신의 집 한 편을 내어준다. 성곽 바로 아래 1천 평이 넘는 터에 양옥 세 채가 있었다. 비탈진 땅이어서 계단식으로 이어진 집 중 가장 아래쪽 집이 새 보금자리가 되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로 앞뒷집으로 붙어있어 한 식구처럼 서로 오가며 지냈다. 다음해 딸 미영이 태어날 때 이관옥은 친정엄마처럼 아내의 산바라지를 해주었고, 백일 때 손수 떡을 해서 잔치를 열어주었다. 1954년도에 이관옥 선생님과 남편 한기동 선생님이 워낙 자리 잡고 있었어요. 천 평 이상이 되는 넓은 땅이 있는데 꼭대기에요. 집은 뭐 다닥다닥이었죠. 뜰 안에 같이 있는 건물이었는데 우리는 아랫집을 분양했어요. 아이들을 기르는데 마당에다 그네도 매고 연못도 만들고 아이들 노는 중심으로 꾸몄어요. 집 앞에는 우물이 있고 작은 개울이 흘렀어요. 동네 사람들이 와서 물을 길어 가는 곳이에요. 우리는 둘째 셋째를 낳고 살다가 그 위에 공터가 있어서 집을 짓게 되었어요. 고려대학교 정한숙 선생님네가 이관옥 선생님 옆집에 있었어요. 우리는 우리대로 공터쪽으로 올라가고 정한숙 선생님은 공터에 자리잡은 우리 집 옆에 터가 나니까 거기로 이사 오셨어요. 원래 있던 우리집은 바이올리스트 이봉수 선생님이 분양해서 왔어요. - 부인 이복련 - 아들과 딸이 태어나고, 부지런히 돈을 모아 성곽 바로 아래로 터를 사서 집을 지었다. 지인에게 설계와 건축을 부탁하여 지은 붉은색 벽돌집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딸이 쓰는 방과 전봉초의 첼로 연습실을 좌우 양 끝에 두고, 가운데 거실과 부엌, 방을 둔 일자형 구조였다. 성곽이 담장을 이루고, 성곽 앞으로 물이 흘러나오는 큰 바위가 있어 산 속에 사는 기분이었다. 냉장고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사시사철 차고 맑은 물이 나왔다. 담쟁이가 성곽을 타고 넝쿨져 운치를 더했고, 마당에는 아내가 키우는 꽃과 나무가 가득했다. 몇 살 터울인 이관옥 부부의 아이들과 전봉초의 아이들은 형제처럼 어울려 지냈다. 전봉초는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버지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창덕궁이나 도봉산 등지로 자주 소풍을 나갔다. 아이들도 아버지의 재능을 타고나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 첼로, 성악을 전공하였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긴 전봉초는 배석빈, 한규동 등과 ‘목요회’를 만들어 목요일마다 산행을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화가 박고석, 시인 고은, 함께 실내악단 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술자리도 즐겨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봉수는 전봉초 가족이 살던 집에 뒤이어 이사를 와 몇 년 간 이웃으로 지냈다. 연말에는 제자들이 집에 모여 즉석 연주회를 열었다.
  • 일본 유학시절부터 실내악 활동을 한 전봉초는 부산 피난 시절에는 임원식, 윤이상 등 젊은 음악가들과 만든 ‘실험악회’, ‘푸리마 트리오’, ‘서울실내악협회’ 등 음악을 탐구하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활동으로 196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8차 세계음악협의회의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동양음악가에 의한 서양음악의 연주>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며 한국에서 서양음악 수준이 높아지고, 훌륭한 연주자가 나올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며칠간의 회의를 마친 후 음악회, 연주홀, 음악학교, 악단을 찾아가 유럽 음악계의 모습을 직접 체험한다. 17~18세기 바로크 음악을 중심으로 실내악 활동이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는 흐름을 읽고 돌아와 서울대 음악대학에 실내악 과정을 개설하였다. 1965년에는 실내악 과정을 이수한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바로크합주단을 창단하여 지휘자로 단원들을 이끌었다. 서양음악이 들어온 지 몇 십 년밖에 되지 않다보니 연주자 층이 얕고, 교향악단과 독주자 중심으로 음악회가 열려 실내악에 대한 관심이 낮았다. 자유롭게 실력을 선보일 수 있는 만큼 책임감도 따르기에 곡을 해석하고 연구하면서 연주자의 기량을 닦을 수 있고, 청중도 다양한 곡과 연주방식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실내악이었다. 각 악기의 소리를 섬세하게 다듬어 다른 악기와 조화를 이루고, 연주자들 사이의 호흡이 잘 맞아야 하기에 지휘자의 역량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실내악 활동을 한 경험이 그대로 후학들에게 전해졌다. 연주가는 항상 고전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위대한 작가들의 정신 세계와 통공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는 대신 또한 연주를 통하여 청중과 더불어 공감을 일으키고 만인공유의 정신적인 재산을 만들어 놓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케 한다. - 전봉초, 「연주가의 책임을」- 첼로를 대중에게 알리고 실내악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전봉초는 독주자와 협연자, 지휘자, 교수로 평생 음악만을 위해 살며, 우리나라 서양음악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79년에는 제자 48명이 첼로오케스트라 그룹을 만들어 스승의 회갑을 축하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첼로 오케스트라 공연이었고, 30여 년 동안 1백 여 명의 첼로 연주자를 키워낸 결실이 맺어진 뜻 깊은 자리였다. 1993년에는 음악인생 50년을 결산하는 독주회를 열었다. 1948년 배재학교 강당에서 연 첫 독주회 이후 21번 째 단독 공연이자, 120번째 공연이었다. 이후 연주 보다는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등 음악계의 원로로서 더 좋은 음악환경을 만들고 음악계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위해 힘썼으며 대한민국 예술원상, 대한민국 금관 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바로크합주단은 창단 후 50년을 이어 국내 음악계 뿐 아니라 세계로 뻗어나가 한국을 대표하는 실내악단으로서 큰 이정표를 세웠다. 2002년 전봉초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42년 전 서양 음악가들에게 말했던 대로, 그의 뒤를 이은 제자들이 세계를 무대로 음악을 펼치고 있다.
  • 1919 평안남도 안주 출생 1943 일본 전국 신인선발 음악회 참가 1948 제1회 독주회, 정동 배재학교 강당 1943~1945 만주국 신경교향악단 1948~1963 서울교향악단 수석연주자 1952~1984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65 바로크합주단 창단 1982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1985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1988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장 2002 별세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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