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우
1934.06.02 - 2018.04.06
인물 개인 화가
인물 개인 교육가
성북동에서 활동했던 화가이다. 호는 우송(雨松)으로 간송 전형필의 장남이다. 1934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어릴 때부터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찾는 예술가들을 통해 그림을 보는 안목과 지식을 익히고 교육받았다. 서울대학교 미대에 입학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대미술을 접하고 추상화의 세계에 빠져들어, 해방 후 1세대 추상화가가 되었다.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귀국하여 1966년 전형필의 지인들과 함께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새롭게 개편시켰다.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하고, 보성고등학교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퇴직 후에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주제로 삼았던 「만다라」를 이어 「청화만다라」 연작을 발표하였고, 국내외에서 많은 개인전과 초대전을 하였다.
성북동
  • 보화각 전경(1938)
  • 보화각 개관기념일(1938)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37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성북로 102-11)
  • 비고: 간송미술관(활동)

근거자료 원문

  • 큰 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꿩과 토끼가 뛰노는 소나무 숲, 아버지 간송 전형필 선생이 모은 문화재와 예술품으로 둘러싸인 북단장(北壇莊), 우송이 평생을 살아온 고향이다.
  • 주말이면 아버지가 형제들을 불러 화제(畵題)를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우송에게 일부러 가장 낮은 점수를 주어 실력을 키우게끔 독려하였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들에게 당시로는 귀한 유화 물감을 사주거나, 아들이 그림을 그리다 놀러 나가면 유화 붓을 깨끗이 발고 팔레트를 정리해주며 말없는 가르침을 보여주셨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는 혼자 석고 데셍을 연습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예술가에 대한 인식이 낮아 화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화가를 제대로 이해하던 사람도 없던 시절, 집안의 지원을 받으며 서울대 미대 입학시험을 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정부기관과 학교가 모두 무산으로 피난을 가 있던 어려운 시기였다. 사과도 없이 사과 다섯 개를 그리라는 시험 문제는 지금 같으면 상상력과 구성 실력을 요구하는 수준 높은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석고상이나 제대로 된 종이조차 구하기 마땅치 않았던 당시에는 전쟁 상황에서 피난지의 현실을 보여주는 문제였다. 피난을 가서 머물던 울산에서 부산으로 통학을 하다가 3개월 만에 미국 유학을 가게 된다.
  • 일본 유학도 쉽지 않던 1950년대 초, 미국 유학을 가는 것은 가족과 영영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전장(戰場)에 나가는 것만큼 위험하고 기약 없는 길이었다. 부산 수영 군용비행장을 떠나 일본 도쿄를 거쳐 일주일 만에 시애틀에 도착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푹신한 카펫이 어색하고, 화려한 네온사인이 낯선 곳이었다. 도착한 날이 미국 독립기념일인줄 몰라 기념 폭죽 소리가 폭격 소리인줄 알고 놀랐던 열아홉 살 청녀는 몇 년 뒤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때까지 동양과 서양의 고전 미술만 공부했던 우송은 샌프란시스코 주리대학에서 새로운 현대 미술을 만난다. 입학 후 첫 미술시간은 손에 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핑거페인팅(finger painting) 수업이었다.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핑거페인팅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가지고 간 스케치북을 선생님에게 보이고 4학년으로 월반을 한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수업 방식도 모른 채 들어간 수업에서 이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추상화를 그리게 된다. 피난시절 아르바이트로 그렸던 군대 포스터의 디자인 개념을 떠올려 나름대로 추상화를 이해하며 새로운 화풍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림 공부에 매달린다. 노력의 결실로 2학년 때 학교 예술제에서 금상을 수상하고, 교수 추천으로 캘리포니아 미술대학(California School of Fine Arts)에 입학한다.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황금시대인 1950년대, 그 한가운데에서 그림을 공부할 수 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캘리포니아 미술대학과 밀스대학,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학위를 따는 한편 볼스화랑(Bolles Gallery)과 전속계약, 잇따른 개인전, 휘트니미술관 '젊은 미국 1960(Young America 1960)' 초대전 등에 참여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캘리포니아의 자연과 분위기가 반영된 추상표현주의인 '외로운 인물(Lonely Figure)', '캘리포니아의 풍경' 같은 작품을 발표한다. 1960년대부터는 평생 작품 주제가 되는 '만다라'를 선보인다. 당시 미술계는 동양 사상의 영향을 받은 추상표현주의가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런 환경에서 동양 삼국의 문화를 가까이 보고 배운 우송은 더욱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동양과 서양의 미술을 연구하고 고민하며, 치열하게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 한창 작가로서 유명세를 타던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남으로서 집안을 돌봐야 하는 책임감으로 귀국을 한다. 귀국 후 1965년 신문회관에서 연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전시를 개최한다. 우리나라 화단은 미국에서 정식교육을 받고 인정을 받으며 활동하던 젊은 작가를 주목한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색(色)을 통해 동양적인 이미지의 밝고 깊숙한 시(詩)의 세계를 표현해낸다'며 컬러리스트로 불린 우송을 평하였다. 한편 이화여대, 서울대 교수로 처음으로 정규 교과과정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추상화를 가르친다. 새로운 미술의 흐름과 이론을 먼저 받아들여 선보이고, 학생들과 답사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혀주었다. 1967년 우리나라 화단에서 처음으로 아크릴릭(Acrylic)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이형(異形)캔버스 작품을 발표한다.
  • 풍류와 멋 속에서 살던 아버지를 보고 자라며 익힌 안목과 문화재를 보존하려는 의지는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새롭게 탄생시킨다. 당시 국립박물관과 미술사학계에서 활동하며 간송과 교류하던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 김원룡 박사 등 학자들이 발기인이 되어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부설기관으로 간송미술관을 둔다. 스스로 힘으로 우리 문화를 지키는 어려운 길을 개척한 아버지 간송을 이어 미술사와 전통문화를 연구하고 알리는 길을 일구기 시작한 것이다.
  • 교수로서 작가로서 한국에서 자리를 잡아갈 무렵 보성중고등학교 이사장인 어머님을 도와 학교 교장을 맡게 된다. 우송의 할아버지 대부터 교육 사업에 뜻을 둔 집안이었기에 학교 운영과 인재 양성은 자신의 길을 잠시라도 접을 만큼 중요한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후 이십여 년 동안 화가이면서 교육자로 충실한 삶을 산다.
  • "성북동은요, 뭐라고 그럴까, 자연 그대로였어요. 여기서 보면 전부 소나무길이었고. 마음 속에는 있죠, 옛날 성북동 모습이. 성북동과 함께 아버님은 항상 같이 있죠. 또 그렇게 살고 싶고. 이 앞 소나무 밭이 아버님이 여기서 사실 때 걸으시던 산책길이에요. 저는 어렸을 때 아버님하고 꼭 똑같이, 아버님 뒷짐 지고 가시면 나도 뒷짐 지고 쫓아다니고 그랬죠. 지금도 아침에 산책하면서 아버님을 늘 생각하며 걷습니다. 작품이나 인생, 삶에서 다 하나일거예요." -전성우의 말-
  • 환갑이 되던 해 퇴임을 하고, 다시 자신의 자리인 그림으로 돌아온 우송은 '청화만다라' 연작을 발표한다. 부모님의 유지인 교육의 길을 벗어난 송구스러움으로 흰색과 청색만을 쓴 청화만다라를 그렸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전성우가 동양의 미를 환원하는 모습으로서 또다시 단순 명쾌하고 신비로운 한국의 예술로 귀의하는 당연한 결과'라며 '이조백자의 수준 높은 해탈의 아름다움을 어깨너머로 보아왔고 느끼면서 인간으로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 연보 1934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캘리포니아 미술학교(B.F.A), 밀즈대학교 대학원(M.F.A),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과정 졸업 경력 미국 밀즈대학, 리치몬드 아트센타 부속 미술대학,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보성고등학교 교장·재단 이사장 등 수상 샌프란시스코 미술관 공모전, 미국 국회도서관 판화전, 샌프란시스코 예술제 최고명예상 등 개인전 샌프란시스코 루시엔 라보트화랑(1958), 샌프란시스코 볼스화랑(1961~65), 신문회관(1965), 가나화랑(1994), 일본 후쿠오카시미술관(1998), 가나아트센터(2005), 샌프란시스코 북캘리포니아 추상표현주의 재조명전(2010) 등 초대전 'Young America 60'(1960), 파리비엔날레(1967), 혜화동인전(1977~93), 한국현대판화40년전(1993) 등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한국), 휘트니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국회도서관, 데이빗 록펠러(미국),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일본) 등
  • 서울 출생. 해방 후 1세대 추상화가이다. 간송 전형필의 아들로 성북동 북단장北壇莊에서 보화각 소장 문화유산과 집에 찾아온 당대 최고의 문화예술인들을 보며 자랐다. 부산 피난 중에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지만, 현대미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한다. 미국에서 작가로 이름을 알려가던 전성우는 귀국하여 1965년 신문회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국내외에서 전시를 열었다. 우리나라 화단에서 처음으로 아크릴릭Acrylic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이형異形캔버스 작품을 발표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보성중고등학교 교장을 맡아 20여 년 동안 교육자로 지냈다. 환갑이 되던 해 퇴임을 하고 <청화만다라> 연작을 발표하고 있다. 2013년 만들어진 간송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63쪽
  • 우송(雨松) 전성우 화백은 간송 전형필 선생의 장남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간송미술관을 만들어 국보급 문화재가 해외에 반출되는 것을 사재를 털어 막아낸 간송의 장남인 전화백은 어릴 시절부터 문화재가 그득한 북단장(北壇莊)22)에 드나드는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예술적 분위기를 몸으로 습득했다. 그 시절 전화백의 집에는 위창 오세창 선생이 쓴 글씨와 심산 노수현 선생이 그린 그림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예술가들이 집에 와서 그림을 그릴 때면 옆에서 먹을 갈기도 하고,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같은 유명한 서양화가들의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그림을 보는 안목과 풍류를 자연스레 익혔다. 부친인 간송 선생은 동기인 화가 이마동 선생보다 미술 성적이 좋을 만큼 미감이 뛰어났고, 외조부는 일본 우에노대 서양화과 졸업생이었으니 예술의 DNA는 타고난 것이었다. 주말이면 부친이 형제들을 불러 화제를 주고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우송에게는 일부러 가장 낮은 점수를 주어 실력을 키우게끔 했다고 한다. 중1 때부터 혼자 석고 뎃생을 하면서 화가의 꿈을 키워나가다가 한국전쟁 중에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고, 1953년 미국 시애틀로 유학을 떠난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에서 현대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접하고 추상화의 세계를 만난다. 대학2학년 때, 학교 예술제에서 수상하고 교수의 추천으로 캘리포니아 미대에 입학한다.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황금시대인 1950년대의 예술적 분위기의 세례를 흠뻑 받은 셈이다. 1960년대부터 평생의 작품주제인 ‘만다라’를 발표한다. 이때 미국 예술계에는 동양 사상의 영향을 받은 추상표현주의가 유행의 중심에 떠오른 시기였다. 한창 작가로서 유명세를 타려던 무렵, 부친인 간송 전형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장남으로서 집안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귀국해 국내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이화여대, 서울대 교수로 추상화를 가르치면서 1967년 우리나라 화단에 아크릴릭 물감을 소개한다. 또한 국립박물관에 자주 드나들면서 미술사학자 최순우 정양모 이흥우 이종석, 미술평론가 이경성 이구열 등과 미술당을 결성했고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답사하는 한편, 혜곡 최순우 선생의 성북동 집 뜰에 모여서 예술과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친목을 다진다. 집안에서 맡아 경영하던 보성중고등학교의 이사장인 모친을 도와 교장으로도 일하면서 교육자로서의 또다른 일도 충실히 해 나간 전화백은 환갑이 되던 해에 퇴임하고 작가로서의 못이룬 꿈을 ‘청화만다라’연작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10-211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1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