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완
1913 - 2007.04.27
국가무형문화재
인물 개인 공예가
유물 무형문화재
동소문동에 거주했던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기능보유자이다. 침선장이란 바느질로 옷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1913년 정인보의 맏딸로 태어나 혼인 후 사대부 가문과 왕실 가문의 침선기법을 함께 배웠다. 1985년 이후 일본 오사카, 고베, 교토 등 여러 도시에서 복식 전시를 열어 전통 바느질 기법을 널리 알렸다. 우리 전통 의상의 아름다움이 주목을 받게 되면서, 1988년 8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로 선정되었다. 근대 이후 복식의 서구화 추세가 가속화되면서 침선기술의 전통이 단절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뒤늦게나마 다행히 몇 사람의 전승자가 현재는 쓰이지 않는 옛 침선기술을 계승하고 있다. 2007년 사망과 함께 지정이 해제되었으며, 맏며느리인 구혜자가 계승하였다.
동선동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제작 모습(1)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제작 모습(2)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시침질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전수 장면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마무리 작업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각종 침선 도구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철릭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저고리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치마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당의본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깃본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조바위본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주머니본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길표 버선본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바느질 바늘
  • 국가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정정완 보유자_사각함
  • 정정완 사진 액자
  • 정정완 제8회 인간상록수 추대 사진
  • 정정완 <해돋이에서 해넘이까지> 전시 개막식
  • 정정완 회갑 기념 사진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 6가 6-2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국가무형문화재
  • 지정일: 1988.08.01
  • 비고: 2005.04.20 보유자에서 해제되고 명예보유자로 재지정, 2007.04.27 명예보유자 사망으로 인해 해제

근거자료 원문

  • ⑤ 針線匠 바느질로 옷을 만들던 장인을 말하며 1988년 8월 1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었다. 그 첫 지정자는 鄭貞婉인데 현재 동소문 6가 6-2에 거주하고 있다. 전통사회구조 속에서 옷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가족과 자신을 위해 직접 지어 입었지만, 왕실과 사대부를 비롯한 특수층의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제작활동에 관여하지 않고 솜씨가 뛰어난 장인을 官匠 또는私匠의 형태로 고용하여 조달하였으며, 서민층의 옷이라 하더라도 평상복이 아닌 관혼상제등에 필요한 특수복은 솜씨있는 사람에게 의존하였다. 조선시대 京工匠에는 10명의 침선장이 工曹에 소속되었고, 外工匠에도 2개소에 64명이 소속되어 제작활동을 전개하였다. 옷을 제작하는 데는 바느질 기술은 물론 실을 만드는 制絲匠, 실이나 천에 물을 들이는 靑染匠·紅染匠, 옷감을 짜는 織造匠·陵羅匠, 천을 다듬고 손질하는 擣練匠, 옷감을 재단하는 裁作匠, 금박이나 자수 등 무늬를 놓는 金萡匠·刺繡匠 등의 협업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나 옷의 맵시나 품위, 효용성 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침선장이다. 궁중에서는 왕실복식의 주달을 전담하던 尙衣院에 경공장 가운데 8명을 분속시켜 각종 궁중복식을 제작하도록 하였고, 부족한 일손은 妓女의 신분인 針線婢로 하여금 거들도록 하였다. 바느질의 기본공구로는 옷감과 실·자·가위·바늘·바늘집·골무·인두·다리미·누비밀대·실패·실고리·받침고리 등이 필요하다. 바느질기법은 감칠질·홈질·박음질·상침뜨기·휘갑치기·사뜨기·시침질·공그르기·솔기질 등을 기본으로 하여 이음새나 옷의 종류, 위치에 따라 적절히 사용한다. 옷감은 여름에는 홑으로, 봄·가을에는 겹으로, 겨울에는 밀도 높은 비단을 사용하되 안팎 사이에 솜을 두어 보온효과를 놓였으며, 그에 따라 바느질도 홑바느질·겹바느질·누비바느질로 나뉘었다, 근대 이후 복식의 서구화 추세가 가속화되면서 침선기술의 전통이 단절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뒤늦게지만 다행히 몇 사람의 전승자가 현재는 쓰이지 않는 옛 침선기술을 계승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00-701쪽
    문화재청에 기록되어 있는 공식 지정일은 1988년 8월 1일로 본문의 설명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 IV. 침선장 정정완 1. 침선장 보유자 정정완(鄭貞婉)의 한평생 정정완은 계축년(癸丑年;1913) 음력 9월 초엿새에 아버지 위당 정인보 (鄭寅普)와 어머니 성계숙(成癸淑) 사이의 맏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예로부터 글 좋아하는 선비 집안으로 위로 할아버지 • 양할머니경주 이씨와,생할머니 달성 서씨,아버지, 어머니,그리고 아래로 7남매의 형제가 있었다. 아래로 동생을 칠남매나 둔 맏딸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를 도와 여러 동생들을 보살피고 키우기에 큰 몫을 하였다. 특히 바느질과 수놓기에 남다른 취미와 손재주가 있던 정정완은 여섯 살 때부터 바늘을 잡고 바느질을 하였다. 바느질을 배울 때 같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본(本) 을 오려 주면서 익히도록 했으나,그는 손재주가 있어 스스로 가위질을 하고 마름질해 가면서 익혔다고 한다. 그리고 눈썰미가 있어 쓱 보면 무엇이나 만들곤 했는데, 남의 집 아이가 두른 턱받기 • 앞치마 • 타래버선 하나도 눈여겨 보아 동생들에게 풀꽃 수라도 놓아서 해 입히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를 않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중요무형문화재「침선장」, 259쪽
  • 비록 외아들에 외딸밖에 없는 시댁이었지만, 딸린 식솔은 언제나 열대여섯명이 넘었다. 6촌 시동생 • 8촌 시동생 • 8촌 시누이… 등 시골에서 올라와 먹고 자며 학교에 다니는 친척이 늘 많았다. 이들을 뒷바라지하여 먹이는 것도 큰 일이었지만,빨래며 다림질 등 의복치닥거리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부모님을 모시니 그 옷수발도 만만치 않았다. 사랑 어른의 옷은 감히 젤 수가 없어 슬쩍 먼발치로 그저 한번 스쳐보고 눈이 저울이라고 눈대중으로 옷을 지어 드렸는데 지은 옷은 유건에서 토시 버선까지 무엇하나 안 맞는 것이 없이 순편하고 점잖고 품위가 있었다. 그리고 두벌만 있어도 벗어 주고 당신은 갈아입을 것이 없을 정도였으니,저녁에 벗으신 옷을 밤을 도와 만져 날이 새면 입으시게 하느라고 마음과 손이 겅중겅중하였다고 한다. 빨아 다듬어 다시 짓기를 거퍼 하다 보면 저고리 하나가 해어져 더는 못 입게 될 때까지 몇 번을 고쳐지는 바람에 바느질 솜씨가 늘지 않을 수 있었겠냐고 그는 술회한다. 친정에서 8남매가 북새치며 자라면서 양할머니 • 생할머니 • 어머니 슬하에서 익힌 솜씨가 시댁에 가서 두 시어른과 여러 친척 시동생 • 시누 뒷바라지에,또한 자신이 낳은 9남매의 뒷바라지에 솜씨는 절로 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중요무형문화재「침선장」, 260쪽
  • 8.15 광복과 잇달아 터진 1950년의 한국 전쟁 • 1951년 1.4후퇴로 정정완의 집안에도 갖은 어려움이 연거푸 닥치게 되었다. 당시에는 재봉틀 하나에 온 식구의 생계가 달려 있었다. 고운 기생 옷으로부터 온 집안 대소가 어른 • 애 옷이며, 아이들 교복 • 운동복 • 모자 • 잠옷 • 베개까지 그가 손대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슬하의 9남매를 공부시켜 대학까지 보내느라 그 손은 쉬는 날이 없었다. 사회가 안정되고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 전통 의상의 아름다움도 주목을 받게 되어,1988년 8월 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針線匠)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인정 당시 정정완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보다 속으로 간직하는 것을 미덕(美德)으로 지니고 살아 왔기에,또한 장인(匠人)이란 최고의 기능 보유자이면서 동시에 천하게 여겨 온 통념때문에 지정받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가족들의 설득과 우리 옷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의 나이 일흔 여섯으로,이것은 정정완의 생애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바느질이야 언제나 해 온 것이지만,침선장 지정을 계기로 의욕적으로 후진 양성에 뛰어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딸이나 며느리를 데리고 바느질이나 하다가 대학 강사 • 교수를 비롯하여 의류직물학과에서 전통 한복을 연구하는 대학원 학생들 등 젊은 제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중요무형문화재「침선장」, 259-263쪽
  • 1990년부터는 국립민속박물관 공예관에서 강의를 시작으로 전통공예 건축학교 침선방의 강사로 활동하였으며,그것만으로 미진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집에서도 가르쳤다. 그리고 1995년 성균관대학교 가정대학원에서 ‘ 전통 복식 구성’ 강의를 비롯해 각 대학 박사과정의 실기 지도도 했다. 그리고 작품 활동도 꾸준히 하여 1985년에는 일본 오사카 민족학박물관(日本大阪民族學博物館)의 의뢰로 모시도포를 지어보내기도 했고,1986년 8월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가정대학에서 의뢰한 명주 도포를 지었으며,1986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가정대 학 의류직물학과 석사학위논문(도포)을 지도하였다. 지정 이후에는 1989년 5월 중요무형문화재 전시회에 남녀 혼례복 일습(원삼 • 활옷 • 다홍 스란치마 • 연두 회장저고리 • 당의 • 마고자 • 무지기같은 해에 일본 고베시(神戶市) 패션미술관(FASHION美術館)의 의뢰를 받아 혼례복 일습 110여 종(신랑 • 신부 별복 • 원삼 • 속옷 • 스란치마 • 저고리. 비단신 . 바 지 . 저고리. 마고자• 조 끼 • 도 포 • 목포화. 수 모 • 겨시 • 집사옷 일체와 신랑 • 신부의 일체 장식품 • 전안상 일체 등)을 제작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97년 4월에는 패션박물관의 개관식에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 2. 정정완(鄭貞婉) 선생 바느질의 특징 정정완의 바느질은 꼼꼼하고 튼튼하며,입어서 편안하고 점잖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특히 선이 부드럽고 아름다와 인체 공학을 감안한 앞뒤 도련과 배래 • 버선 등 선의 미가 자연스러우면서도 남다르다. 또한 터지기 쉬운 아기 옷의 겨드랑이 둥에 쌍밀이 단추를 맺어 앉히기도 하여 옷에 실용성과 장식의 미를 곁들였으며,솔기가 곱다. 한 예로 모시나 은조사 • 깨끼옷의 솔기는 남이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야무지고 실같이 가늘다. 그리고 끝동을 안까지 겹쳐 대어서 얇은 안의 버짐을 막고, 안에 때가 타기 쉬움도 막아 주는 지혜를 발휘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동정을 달 때에도 항라 • 숙고사 • 공단 등을 한지(韓紙)에 배접하여 동정이 칼같은 느낌이 없이 부드럽고 차분하며 품위게 앉혀지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점도 예사롭지 않다. 옷고름을 달 때도 시접을 안으로 접어 넣고 한번 꿰매고 다시 접어 박음질까지 하여 튼튼하고 너불거림이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 또한 정정완 바느질의 다른 점이다. 한편 정정완이 지은 옷을 보면 그 배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단색으로 아래위 한벌을 해 입기도 하지만, 우리 전통 한복은 저고리와 치마,저고리와 바지 • 마고자 • 조끼 • 토시 • 허리띠 • 대님까지도 배색을 신경써서 미감(美感)을 돋았다. 다홍 치마에 연두 저고리, 꽃분홍 치마에 노랑 저고리 등 상하의 배색을 맞추고, 깃 • 고름 • 끝동 • 회장 • 색동 또한 그 배색이 빼어나다. 이러한 전통 한복의 색감을 그대로 이어받은 그의 옷은 천성적인 미의식에서 나온 둣 아름답다. 저고리나 당의에 횐색 거들지를 시쳐 연두빛 . 자주빛과 횐색 거들지의 어울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실용성을 겸하고 있으니,동정과 같은 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겹치마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흩치마에 비할 것이 아니지만, 특히 숙고사 • 생고사 같은 겉감에 횐색 숙고사로 안을 받쳐 겉감의 무늬를 산뜻하게 살리는 것은 양색의 미와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겠다.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중요무형문화재「침선장」, 267-268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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