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화
1900.08.03 - 1991.11.02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돈암동(현 동선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대동단 총재인 시아버지 김가진, 남편 김의한과 함께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갔다. 이후 1930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을 위하여 6회에 걸쳐 국내를 왕복하면서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임시정부가 위치를 옮길 때마다 함께 항일활동을 하였다. 1940년대 충칭의 3.1유치원 교사로 임명되어 독립운동가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고, 국내외 한인 부녀의 총단결과 조국광복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정정화의 아들 김자동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후 돈암동 178-1번지(현 동선동 3가 130-7)의 한옥에서 거주하였고, 성신여고 앞쪽에 있었다고 한다.
동선동
  • 김자동: 6.25전쟁 당시 의용군 징집과 탈출 이야기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정정화
  • 김자동 구술 돈암동 집 약도
  • 김자동 구술 상하이 임시정부 및 자택 위치
  •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기강, 1940.6.17)
  • 3.1유치원 추계 개학기념 사진(1941.10.10)
  • 김의한·정정화 집터
  • 김자동: 6.25전쟁 당시 의용군 징집과 탈출 이야기
  • 독립운동가 김의한,정정화의 아들 김자동 인터뷰(3)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鄭靖和
  • 이명칭: 정묘희(鄭妙喜)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40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3가 130-7 (동소문로26길 27)
  • 비고: 돈암동 178-1번지

근거자료 원문

  • 본적: 충남 연기 주소: 돈암동 계열과 단체: 중국방면 항일운동 <활동 내용> 충남 연기(燕岐) 사람이다. 시부(媤父)인 대동단(大同團)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따라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갔다. 그녀는 1930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을 위하여 6회에 걸쳐서 국내를 왕복하면서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고 한다. 1932년에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上海)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가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으로 이동함에 따라 이동녕(李東寧) 김 구(金九) 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이동하여 임시정부를 도왔다. 1934년에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에 입당하여 활동하였으며, 1940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창당요원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또한 같은 1940년에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조직하고 그 간부로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41년에는 임시정부의 보호 하에 있는 중경(重慶) 3 1유치원(幼稚園)의 교사로 임명되어 독립운동가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였다. 1943년 2월 23일에는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 산하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의 재건조직에 참여하여 훈련부장에 선출되었으며, 국내외 한인 부녀의 총단결과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에 있는 동포여성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고, 혹은 위문 금품을 거두어 일선에 있는 독립군을 위문하며, 혹은 적진 중에 끼어 있다가 포로수용소를 통하여 넘어오는 동포 여성들을 계몽 교육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또 전란과 병고로 고생하는 동포들을 찾아 정성어린 위문과 부조로 천애이역(天涯異域)에서 동포애의 꽃을 피우기도 하였으며, 멀리는 미주 한국여성단체들과의 긴밀한 연락으로 재미(在美) 각계 동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성원을 두터이 하는 데에도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그녀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 해방 이후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정정화 1900-1991 / 애족장 / 동선동 3가 거주 대동단 총재인 시아버지 김가진, 남편 김의한과 함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1920년 상하이 망명 후 6차례에 걸쳐 국내와 상하이를 왕복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위치를 옮길 때마다 함께 움직이며 항일활동을 펼쳤고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21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21년-정정화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자금 임시정부에 전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1쪽
  • ○ 최익환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결사단 대동단 대동단원들 중에는 주목해야 할 성북구의 독립운동가들이 꽤 많습니다. 의열단의 숨은 조력자로 알려진 오세덕, 임시정부의 요인이자 독립군양성에 헌신했던 김의한, 김의한의 아내이자 역시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여성 계몽운동에 힘썼던 정정화 등 모두 독립운동에 있어 큰 활약을 했던 성북인들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52쪽
  • ○ 임시정부의 든든한 대들보, 김의한과 정정화 임시정부에서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안주인이라 일컬어지는 정정화입니다. 그녀는 1919년 김가진과 김의한이 먼저 상하이로 망명한 후 이듬해 홀로 망명길에 오릅니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먼저 갔다고 해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면 먼 길을 선뜻 나서기 어려웠겠지요. 임시정부의 요인이자 동포 여성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정정화는 1921년부터 1931년까지 10년 간 6차례에 걸쳐 한국과 중국을 왕복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전달했습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거처를 자주 옮기는 중에도 임시정부의 재정과 교육을 도맡았지요. 1940년대에 이르러 그녀의 활동은 더욱 뜨겁게 이어집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84-85쪽
  • ○ 에피소드 아홉-어느 독립운동가 가족의 이야기 대동단의 총재였던 김가진과 그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 그리고 외아들 김자동. 삼대에 걸친 집안 이력은 우리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국내와 해외를 무대로, 해방 후에는 남북으로 삼대의 운명이 갈렸기 때문이죠. 김가진은 의친왕 이강 망명 시도 실패 전인 1919년 10월에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다 2년 뒤 병사했습니다. 이후 김의한, 정정화 부부가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했습니다. 정정화는 훗날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릴 만큼 당찬 인물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부부도 함께 움직였고 1928년 낳은 아들 김자동 또한 독립운동가 부모님을 따랐지요. 1944년, 청소년이 된 김자동은 중국군에 지원해 일본군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지만 입대가 거부되었습니다. 해방 후 1946년 고국 땅을 오랜만에 밟은 가족은 돈암동에 거처를 마련하지만 오붓한 시간을 누리지도 못한 채 김의한의 납북으로 생이별을 합니다. 이후 김자동은 1956년, 정릉에서 북한방송을 통해 아버지의 소식을 처음 접했고 1964년에는 별세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정정화는 1991년 눈을 감았으며 김자동은 2004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현재까지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85쪽
  •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정정화, 김의한의 아들이다. 1928년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태어난 그는 이시영, 이동녕 선생을 할아버지라고 불렀으며 김구 선생을 아저씨라고 부르고, 윤봉길 의사에게 초콜릿도 받은 그야말로 임시정부의 아들이다. 그 역시 해방 이후에 부모님과 함께 돈암동에 거주하였으며, 당시 이미 20세에 가까운 나이였으므로 돈암동 집의 주소지 등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인터뷰에서는 임정시절의 기억은 물론, 해방 이후 돈암동 시절의 기억, 부모님에 대한 기억, 김구 선생 등 임정요원에 대한 기억 등 다양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성북문화원, 2019,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이 나,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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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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