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1902.06.20 - 1950.09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교육가
인물 개인 언론인
시인이다. 1902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작 「향수」는 일본 유학시절인 1927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한 시인데, 대중가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시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억압받던 때 순수한 우리말로 생생하게 고향을 그려내 새로운 시 언어를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영랑, 이하윤 등과 동인지 『시문학』을 내고, 이태준, 박태원, 유치진 등과 ‘구인회’ 활동을 하였고, 청록파 시인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성북구 돈암동에 살았는데 사회주의 계열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조선문학가동맹에 관여한 바람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던 도중에 사망하였다.
돈암동

기본정보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902.06.20 - 1950.09
  • 비고: 6.25전쟁시 납북 중 사망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근거자료 원문

  • 1944년 5월 1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고희동 선생 주례로 정지용, 길진섭의 사회로. 성북동 274-1. 근원 선생이 손수 지으신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보금자리를 꾸미다. 섬에 내려가서 가족을 데려오다. 홀어머님과 아이들을. ― 김향안, 『월하의 마음』중에서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11-212쪽
  •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39년에는 이태준이 그의 또 다른 친구 정지용과 함께 발행한 잡지 『문장』의 표지도 장정해준다. 그들이 오랫동안 이웃사촌으로 지내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인연 때문이지는 알 수 없지만 김용준은 정지용의 『지용시선芝溶詩選』의 장정도 맡게 된다. 이태준이 산문의 일인자였다면 정지용은 운문의 일인자였다. 이태준이 성북동에 이사 오기 전부터 친구사이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듯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알음알음 이어진다. (중략) 하지만 인연의 공교로움은 가까운 집의 거리에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문장』이 발행되던 그해, 조지훈은 정지용에 의해 「고풍의상古風衣裳」이라는 시가 『문장』에 실리며 등단한다. 『문장』의 또 다른 중심인물이 이태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이들이 알던 사이였기에 좋게 봐줬을 것이라는 불온한 생각까지는 아니더라도 ‘등단 이후 한 번 인사라도 하러 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피하기 어렵다. (중략) 그러나 조지훈→정지용→이태준→김용준으로 이어지는 성북동인 맥도를 거꾸로 찾아올라 가보고 싶은 욕심은 떨치기 힘들다. 그리고 보니 그들의 집도 그렇게 성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차례로 만날 수 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23-224쪽
  • 「격! 흉금을 열어 선배에게 일탄을 날림」으로 첫 집단행동을 한 구인회는 바로 두 번째 행동에 돌입한다. 바로 강연회이다. 첫 번째 강연회는 1934년 6월 30일 열린 “시와 소설의 밤”이었다. 당시 광고는 “시와 소설의 밤”의 주체가 구인회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발표자는 이태준,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이었고, 장소는 종로 중앙기독청년회관(YMCA)이다. 역시 종로였다. (중략) 구인회 회원들도 성북동을 찾았다. 수연산방을 나와 성북천을 건너 조금만 오르면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걸어서 5분도 되지 않을 거리이다. 이 별장에서 이태준은 구인회 회원인 정지용, 이상 등과 함께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단순히 그 한번뿐만 아니라 구인회 회원들은 자주 성북동을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수연산방은 일종의 별장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런 좋은 곳을 손님들이 가만히 두었을리 없다. 구인회는 이후 여러 번 회원들의 교체를 겪는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김상용, 이상, 김유정, 김환태 등 8명이다. 구인회는 1936년 동인지인 『시와 소설』의 발행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접는다. 구인회도 1936년 10월에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지용, 이상, 박태원 등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이상은 1937년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더 이상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정지용, 박태원과는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함께 활동했다. 정지용은 자진 월북인지 납북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북으로 가는 도중 폭격으로 죽었거나, 북에서 폭격으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30-233쪽
  • ○ 시로 적은 조국해방의 열망 - 《문장》 역시 성북구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문장》에서 소설을 심사했던 이태준은 성북동에 거주했고 시를 심사했던 정지용은 이종석 가옥에서 활동했으며 돈암동에서 거주한 바 있습니다. 《문장》의 장정(裝幀)은 성북동 노시산방의 김용준이 주도했는데 이들 외에도 《문장》에 참여한 많은 예술인들이 성북구에 거주하거나 성북구를 문학의 아지트 삼아 자주 드나들곤 했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98-99쪽
  • ○ 성북구의 월·납북 인사 - 정지용(鄭芝溶, 1902~1950, 돈암동 거주) ㆍ해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고 경향신문의 편집주간으로 활동 ㆍ1946년 2월에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되고 그해에 시집 『지용시선』 발간 ㆍ1947년 서울대학교에서 『시경(詩經)』 강의 ㆍ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학독본』 출간 ㆍ1949년 2월 『산문(散文)』 출간 ㆍ1949년 6월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 뒤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강제로 가입되어 강연 등에 동원 ㆍ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기림(金起林), 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북한군에 의해 납북, 도중 사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49쪽
  •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우리나라 현대시에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이다. 김영랑, 이하윤들과 동인지 《시문학》을 내고, 이태준, 박태원, 유치진들과 ‘구인회’ 활동을 하였다. 이태준과 함께 한국문단에 추천제를 정착시킨 《문장》의 심사위원을 맡아 청록파 시인-박목월·조지훈·박두진을 발굴하였다. 1930년대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휘문고보 선후배인 두 사람은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였다. 대표시인 「향수」는 채동선과 김희갑이 곡을 붙여 널리 알려졌다. 일본 유학 후 종로구 효자동, 재동, 서대문구 북아현동 등지에 살다 1946년 돈암동으로 이사하였다. 같은 해 『지용시선』을 발간하였다. 경향신문 주간과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녹번리 초당에 은거하다가 한국전쟁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된 뒤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납북 당하여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11쪽
  • 「향수鄕愁」의 시인 정지용은 1902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박종화, 이태준 등과 사귀었다.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모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1933년 《가톨릭청년》 편집고문을 맡는다. 이때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한편 이태준, 유치진, 김기림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여 ‘순수예술추구’를 목표로 활동하였다. 1939년에는 이태준과 함께 《문장》의 심사위원을 지냈는데, 한국문단에 추천제를 정착시킨 이 잡지를 통해 청록파 시인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이 발굴되었다. 정지용의 대표작 「향수」는 일본 유학시절인 1927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한 시이다.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억압받던 때 순수한 우리말로 생생하게 고향을 그려낸 이 시로 새로운 시 언어를 개척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정지용시집』과 『백록담』, 『지용시선』, 산문집 『지용문학독본』과 『산문(부역시)』등을 펴냈다. 서울 재동과 북아현동, 경기도의 부천 등으로 옮겨 살던 정지용은 1946년 돈암동 산11번지로 이사한다. 형제처럼 막역하게 지낸 김동리와 자신이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초빙한 염상섭이 근처에 살았다. 경향신문 주간을 그만두고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중 자신이 반대하던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의되자 녹번리 초당에 은둔하며 지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며 그의 작품도 한동안 출판되지 못하였다. 1988년 해금조치가 된 이후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정지용의 문학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또한 1930년대 채동선이 곡을 붙여 발표한 가곡과 김희갑이 작곡한 대중가요「향수」는 많은 사람들의 애창곡으로 불리고 있다.
  •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 충북 옥천 출생.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시작詩作활동을 하였다. 1939년부터는 《문장》의 시 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박목월 등을 등단시켰고, 1945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작품으로「향수」(1927)와 시집 『정지용시집』(1935), 『백록담』(1941) 등이 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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