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趙炳玉 1894(고종 31)∼1960
독립운동가·정치가. 초명은 炳甲. 호는 維石. 충청남도 木川(지금의 천안)출생.
仁元의 아들이다. 공주소학교를 거쳐 1909년 평양숭실중학교와 1914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뒤 1918년 미국 와이오밍대학을 졸업하고, 1925년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그해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新幹會 등에 깊이 관여하였다. 광주학생운동·신간회사건·수양동우회사건 등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5년에 걸치는 옥중생활을 하였으며, 1931년에는 조선일보사 경영에도 한때 가담하였다. 그뒤 광복이 되기까지 야인생활을 하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였으나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혼란기의 치안을 맞게 되자 철저한 南勞黨숙청으로 首都警察廳長 張澤相과 더불어 그 이름을 전국에 떨쳤다.
1948년에 새 政府가 들어서자 희망했던 閣僚자리(內務部長官)에 들어가지 못해 李承晩대통령에게 강하게 반발하였으나 李대통령의 설득으로 大統領特使가 되어 여러 友邦을 순방하고 UN총회에도 참석하여 신생 大韓民國의 국제적 신임을 얻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50년 5월 30일에 치루어졌던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신의 本宅(敦岩洞 89-7)이 있던 城北區에서 입후보, 社會黨의 趙素昻과 치열한 선거전을 전개하여 서울市民은 물론 전 국민의 뜨거운 시선을 집중시켰으나 패배의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다.
6·25사변이 터져 政府가 大田에 내려가 있고 전국이 거의 無政府상태나 다름없던 1950년 7월 14일에 內務部長官으로 임명되었다. 전투가 점점 불리해지고 마침내 戰線이 洛東江邊에서 大邱북방의 八公山까지 밀려나자 UN軍을 비롯한 政府의 모든 주장이 大邱를 포기하고 淸道의 팔조령까지 후퇴하자고 했을 때 趙 내무부장관이 大邱死守를 완강하게 고집함으로서 결국 大邱는 후퇴하지 않았고 敵의 유린을 받지 않게 되었다. 大邱방위에 결정적인 功을 세운 것이다. 다음해 (1951년) 5월 7일 독재화되어가는 李承晩에 실망하고 대통령 이승만에게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로 탄생하였으므로 반드시 민주국가로 발전, 성장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낸 뒤 물러났다. 1953년에는 반공포로석방에 반대하는 견해를 취하다가 테러를 당하고 잠시 투옥되는 변을 당하였다.
1954년 5월 20일에 시행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大邱 乙區에서 당시 최대 야당이었던 民國黨으로 입후보, 官權에 의한 갖은 탄압과 간섭을 받았으나 29,805표라는 압도적인 다수표로 당선되었다. 大邱死守에 대한 그의 功을 大邱市民은 票로서 보답한 것이다.
1955년 민주당 조직에 참여하여 최고위원, 民主黨 舊派의 首領格이 되었으며 1958년 5월 2일에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 이번에는 전연 연고가 없던 城東乙區에서 입후보, 27,428표로 당선되었다. 이 선거가 끝난 후 民主黨대표 최고위원으로 추대되면서 自由黨 독재정치에 항거하는 反獨載鬪爭을 先導하였다.
1960년 민주당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미국의 윌터리드육군병원에서 수술 끝의 심장마비로 죽었다. 결국 그는 끝내 本據地인 城北에서는 한번도 국회의원을 해보지 못한 城北 最高의 政治人이었다. 그의 정치관은 매우 폭이 넓고 거시적이었다는 평을 듣고 었다. 四捨五入개헌으로 이승만정권의 독재화가 노골화되자 민주당을 이끌어 반독재투쟁을 전개하면서도 “빈대를 잡기위하여 草家三間을 태울 수는 없다.”고 하는 국가관과 정당관을 남겼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저서로 《민주주의와 나》·《나의 회고록》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52-754쪽
정의
일제강점기 신우회 회원, 신간회 재정부장, 총무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개설
출생지는 충청남도 천안. 초명은 조병갑(趙炳甲), 호는 유석(維石)이고, 아버지는 조인원(趙仁元)이다. 공주소학교,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신간회(新幹會), 수양동우회 사건 등과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해방후 미군정청 경무부장을 역임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사망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1894년 충청남도 목천(지금의 천안)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고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영명중학을 거쳐 1909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하였다.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4년에 졸업하였다.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시 미국 유학 후 귀국한 이승만과 김규식·신흥우·백상규 등의 영향으로 유학을 결심하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8년 펜실바니아주 와이오밍 고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유학 중인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북미 지역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병옥도 이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고, 4월 16일에는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1925년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이사와 비밀 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이루어진 신간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재정부장·총무부장 등을 지냈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조병옥은 미국 체류 중 안창호와 교류하게 되면서 깊은 영향을 받아 기호지역인 충청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서북파가 주도하던 흥사단·수양동우회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귀국 후 안창호의 강력한 영항아래 있던 이광수를 찾아가 함께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의 국내 지부 결성을 추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2년을 복역하였다.
한편 1932년 조만식 등 서북 출신들이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 경영을 담당하게 되자 전무로 참여하였고, 보인광업회사라는 광산회사를 운영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였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취임하여 1948년까지 재직하면서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과 함께 경찰력을 장악했다. 미군정기 가장 중요했던 물리력인 경찰력을 장악함으로써 좌익 탄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애초 조병옥은 안창호를 지지하였으나 그가 사망하고 해방이 된 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경무부장으로서 그는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그해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 제4차 국제연합 총회에서 단장으로 참가하였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별하게 되면서 조병옥도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의 신익희·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이승만의 부름으로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대구 방어에 공을 세웠으나, 1951년 5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954년 5월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범야 신당 창당 준비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곽상훈·김도연·김준연·장면·박순천 등과 함께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반대하였다. 결국 조봉암이 배제된 채 1955년 민주당이 결성되었고, 조병옥이 이에 참여하면서 1956년 신익희의 급서로 대표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 신파와 구파 간 분쟁이 가시화되면서 조병옥은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지명대회 표결 결과 조병옥은 세 표 차이로 승리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조병옥은 대통령 후보등록까지 마쳤지만 갑자기 발병하자 도미하여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한 지 23일 만에, 선거를 불과 한 달여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1960년 2월 2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