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1908.08.31
인물 단체 독립운동
인물 단체 학술
우리말과 글 연구를 목적으로 창립된 학술단체이다. 1908년 8월 주시경과 김정진 등이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여 활동하였으나 1917년 활동이 중단되었다. 1921년 12월 임경재, 최두선, 이승규 등이 모여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학회를 재건하고,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쳤다. 조선어학회는 학문 연구뿐 아니라, 말과 글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일을 실천하였다. 1942년 일제에 의해 학회의 중요 인사가 모두 검거되거나 기소되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인해 학회활동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광복과 함께 활동을 재개하였고, 1949년 9월 5일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한 인사 중 성북구에 거주했던 인물로는 안재홍, 최두선, 이극로 등이 있다.
성북구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學會
  • 이명칭: 한글학회(─學會), 국어연구학회, 배달말글몯음, 한글모, 조선어연구회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1908년 조선어연구회 창립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명칭 변경 후 재건 1931년 조선어학회로 명칭 변경1949년 한글학회로 명칭 변경
  • 유형: 인물 단체 독립운동
  •   인물 단체 학술

시기

  • 시대: 일제강점기
  • 시기: 1908.08.31
  • 비고: 1917-1921년 활동이 중단됨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3길 7 한글학회)
  • 비고: 현재 학회의 위치

근거자료 원문

  • ○ 우리말을 연구한 조선어학회 - 국어 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도 중요한 단체입니다. 1920년대의 조선어연구회의 맥을 잇는 조직으로 이름 그대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1927년 잡지 《한글》을 창간하고 1929년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으나 일본의 탄압으로 끝을 맺지는 못했습니다. 1933년에는 오늘날 한글 표기의 기준이 되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도 발표했지요. 그러나 일본의 민족말살 통치로 인해 1930년대 후반부터 큰 위기를 맞습니다. 일본은 1937년부터는 모든 관공서에서 일본어만 쓰게 했고 1940년부터는 학교에서 우리말을 아예 못 쓰게 했습니다. 결국 조선어학회를 해체시키고 대부분의 회원들을 감옥에 가둡니다. 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조직인 청년외교단과 신간회 활동을 했던 언론인 안재홍은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돼 옥고를 치른 바 있습니다. 1942년 수감된 그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콘크리트 감방에서 100여 일 동안을 서서 지내는 고문 등으로 고된 감옥살이를 하다 감옥 안에서 조국의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성북동에 거주했던 최두선도 조선어연구회의 발족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중앙중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경성방직회사 사장을 지냈던 그는 1925년 조직된 기독교계열의 항일운동단체 흥업구락부 소속이기도 했습니다. 흥업구락부는 안재홍이 간부급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단체이지요. 최두선은 후에 제8대 국무총리와 제5대 대한적십자 총재를 역임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91-92쪽
  • 정의 1908년 우리 말글의 연구와 통일 및 발전을 목적으로 창립된 학술단체. 개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과 김정진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우리 민족의 문맹을 깨치고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자 세운 민족학회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단체이다. 창립 초기부터 한글학회의 활동은 우리 말글의 수호와 연구, 그리고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에 목표를 두었다. 광복 후에는 한글문화와 국어학 발전 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꾸준히 정기간행물을 발간하여 한글문화를 보급하고, 국내외의 지회와 부설기관을 통해 우리 말글의 선양 사업을 펼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1908년 8월 31일 주시경과 김정진 등이 창립한 ‘국어연구학회’를 모체로 한다.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바꾸고, 1913년 3월 23일 ‘한글모’로 바꾸어 1917년까지 활동하다가 4년 동안 활동이 중단되었다. 1921년 12월 3일 임경재, 최두선, 이승규 등이 모여 국어연구 및 국어운동단체인 ‘조선어연구회’로 이름을 고쳐 재건하였다. 10년 뒤인 1931년 1월 10일의 총회 결의에 따라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치고, 광복 뒤 1949년 9월 5일 정기총회에서 다시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모임은 창립 당시부터 단순한 학문의 연구만을 위한 학회는 아니었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그의 정신과 학문을 이어받는 데 힘쓰고, 국어학의 원리와 이론[學理]을 연구하는 한편, 말과 글을 통해서 민족정신을 지키고 불어넣는 일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우리 말글의 수호와 연구, 민족의식 고취를 실천하던 중 1942년 10월 일제에 의해 학회의 중요 인사가 모두 검거되거나 기소되는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이 벌어졌다. 직간접적으로 학회에 관련된 사람들이 투옥되어 학회활동이 다시 중단되었으나,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활동을 다시 벌여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기능과 역할 식민지 시기에는 우리 말글의 수호와 연구, 그리고 보급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활발히 활동하였다.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인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이라 정하였는데, 이것이 ‘한글날’의 시초이다. 1929년 한글날에는 100여 명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국어사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1939년 원고가 1/3 가량 완성되어 총독부에 제출하여, 그 중 많은 부분을 고친다는 조건으로 다음해에 출판허가를 받았다. 1942년 봄에는 조판이 시작되고 가을에 모든 원고가 완성되어 교정이 시작될 무렵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나 사전 편찬이 중단되었다. 1930년 12월 총회에서 ‘맞춤법 통일’, ‘표준말 제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을 결의하고, 맞춤법제정위원을 두어 1932년 12월에 원안이 이루어졌다. 이 원안은 1년 동안의 수정작업을 거쳐 1933년 10월 19일 임시총회에서 결정되어, 그 해 10월 29일 한글날 기념식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였다. 이는 약 3년에 걸쳐 제정한 것으로, 한국어 정서법의 근간이 된다. 1931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신문사에서 벌인 ‘문맹퇴치운동’에 발맞춰 교재편집과 교정을 맡고, 많은 회원을 강사로 보냈으나, 순수한 글자계몽운동마저 왜경(倭警)에 의해 중단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의 공통어가 될 표준말 확립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낀 학회는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두어 1935년 1월부터 1936년 8월까지 표준말 사정(査定)을 끝내고, 그 해 10월 28일 한글날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공표하였다. 1941년 1월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착수한 때부터 준비하던, 외국의 사람이름[人名]과 땅이름[地名]의 표기를 통일하는 데에 필요한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완성하여 간행하였다. 광복을 맞은 혼란기에 우리 말글교육의 바탕이 되는 『한글 첫걸음』·『초등국어 교본』·『중등국어 독본』 등의 교과서를 편찬·보급하였으며, 한글강습회와 ‘세종 중등국어 교사양성소’를 통하여 국어교사를 양성하였다. 한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중단된 사전편찬작업을 정상화하여, 1947년에 『큰사전』 제1책, 1949년에 제2책을 간행하였다. 제3책의 인쇄와 제4책의 조판이 끝날 무렵 6·25 전쟁이 일어나 중단되었다가, 1957년 한글날에 마지막권6책을 간행하여 『큰사전』의 편찬사업을 마쳤다. 광복 후 70여 년 동안 한글학회는 민간 학술단체로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글 전용, 한글 기계화, 우리 말글 바로쓰기, 우리 말글의 교육과 보급 등 각종 우리 말글 진흥 사업을 펼쳐왔다. 또한 수백 차례 국어학 연구발표회를 열었으며, 대규모의 국제대회도 2008년까지 6회 개최한 바 있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북한의 언어 및 언어학 연구,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해마다 두 차례씩 전국 규모의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국어학자들의 심도 깊은 연구와 토론의 장을 마련하였다. 또한 정기간행물로는 1932년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학-언어학 학술지인 『한글』을 발행하고, 『문학 한글』·『교육 한글』·『한힌샘 주시경 연구』·『한글 새소식』 등을 발행하여 인문학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현황 한글문화의 보급과 발전을 위하여 2000년부터 ‘외국인 한국어 발표 대회’와 ‘우리 말글 지킴이 위촉’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1년부터는 ‘아름다운 우리말 가게이름 선정’, 2005년부터는 ‘휴대전화 쪽글(문자) 자랑’, 2012년부터는 ‘한글 손글씨 공모전’ 등과 같은 우리 말글 진흥 사업을 펼치고 있다. 정기간행물로 1932년 창간한 기관지『한글』은 2014년 7월까지 통권 304호가 발행되었으며, 또한 『문학 한글』·『교육 한글』·『한힌샘 주시경 연구』·『한글 새소식』 등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1972년부터 매월 발행한 『한글 새소식』은 말글 교양 잡지로서, 2014년 통권 500호를 발간하였다. 한글학회는 2014년 현재 부산·전북·대구·대전·인천·경남·전남·울산·진주와 충남-세종 지회 등 10개의 국내 지회와 일본 간사이, 중국 흑룡강, 중국 절강 지회 등 3개의 국외 지회를 두고 있고, 부설 기관으로 ‘한말글문화협회’와 ‘한글서체연구원’이 있다. 이들 지회와 부설기관을 통해 국어순화 경시 대회, 글짓기 대회, 한글 붓글씨 쓰기 대회, 한국어 말하기 대회 등 우리말과 우리글의 선양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이 밖에도, 2011년에는 서울시와 ‘공공언어 바르게 쓰기’ 업무 협약을 체결하여 쉬운 행정용어 사용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2011년부터 한글날 공휴일 지정 청원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쳐 그 뜻을 이루었다. 또한 2013년부터 국회기와 국회 휘장, 국회의원 배지 한글화 운동을 주도하여 관련 법안 통과를 이끌어 냈으며,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 건립을 청원하여 국비 지원이 확정되어 2014년 8월 29일 제막식을 개최하였다. 2014년 현재 정회원 660명, 준회원 90명, 그리고 일반회원 7,0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한글학회 100년사』(한글학회,2010) 한글학회 (http://www.hangeul.or.kr) 집필자 집필 (1995년) 허웅 개정 (2014년) 윤혜영(한라대학교 교양학부)
  • (전략) "경마장 다음 정류소"는 지금의 안암역이며, "영도사"는 지금의 개운사다. 보성전문학교는 고려대학교다. 개운사에서 출발해 고려대 안암학사 쪽 출입문으로 들어간 뒤 한적한 대학 둘레길을 따라 걸어간다. 내리막길 왼쪽으로 숭례초교 가는 동네 입구가 나오고 그 길로 곧장 가면 막다른 곳에 에덴 떡 방앗간이 보인다. 그곳을 포함해 왼쪽 4개 건물과 오른쪽 1개 건물 공간이 바로 이 극로가 살던 종암동 40번지다. 개운사에서 이곳까지 도보 30분이 소요된다. 토지는 세월이 흘러 8개 필지로 쪼개졌고, 각각 건물이 신축되어 옛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이 극로는 독일 유학을 마친 뒤 1929년에 귀국했다. 조선어학회 활동을 위해 서울의 여관을 전전하다가 그해 12월 결혼 후 성북구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성북구에 정착한 이유는 임남보통학교(강원도 통천군 소재) 교사였던 부인 김 공순이 1932년에 종암동 숭인보통학교(지금의 숭례초교) 교사로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이 극로는 경남 의령 출신이지만 종암동에 애착이 많았다. (후략)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9-15

관련 마을아카이브

  • 안재홍
    이야깃거리
    안재홍
    분류: 인물
    시기: 조선시대
  • 이야깃거리
    최두선
    분류: 인물
    시기: 조선시대
  • 이야깃거리
    이극로
    분류: 인물
    시기: 조선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