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1887.04.10 - 1958.09.10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인물 개인 정치인
돈암동에서 거주하고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한 후 경신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중국에 망명하여 항일단체 대동당을 조직하였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독립운동 지도급 인사 39인의 공동성명으로 발표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정의 이론정립 등 전반에 걸쳐 주역을 맡았고,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다. 성북구 돈암동에 거주하면서 1950년 5.30 총선에 사회당으로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였다. 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조병옥을 꺾고 당선되어 제2대 국회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납북되어 1958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정릉동 성북동
  • 성북구 주민 이강한 2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성북의 풍경과 조소앙에 대한 기억①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조소앙
  • 대한독립선언서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조소앙 홍보 전단(1)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조소앙 홍보 전단(2)
  •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이 스탈린에게 보낸 공함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앞으로 보낸 공문
  • 2.8독립선언서(1919.2.8)[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
  • 외무부장인 조소앙이 중국 정부 외교부장에게 보낸 공함(1941.12.10)
  • 김구가 상해 홍구비행장 도착시 환영식장에서 찍은 사진
  • 성북구 주민 이강한 2 :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성북의 풍경과 조소앙에 대한 기억①
  • 조소앙 집터
  • 자살정보(自殺情報)와 조소앙씨(趙素昻氏) 집
  • 성북구(城北區)의 개표풍경(開票風景)
  •  성북구 개청식 성대, 사무 취급 3일부터

기본정보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887.04.10 - 1958.09.10
  • 비고: 6.25전쟁 당시 납북

주소

  • 주소: 02833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 1가 50 (성북로2길 43)
  • 비고: 돈암동 445-1

근거자료 원문

  • 남겨진 조소앙 가족의 슬픔 6.25동란 때 납북된 저명인사 몇몇이 북한 김일성 괴뢰집단에 대항하기 위하여 제3당을 암암리에 조직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그 중 조소앙 씨가 음독자살하였다는 정보가 있다는 사실이 보도(본보 4월 26일자)되자 서울 시내 성북구 정릉동 130번지의 113호에 있는 조씨 집에는 집안 친척 몇 사람이 모여앉아 시름에 젖어 세월을 한탄하는 오영선 부인을 위로하고 있다. 오 여사는 지금 노쇠로 병석에 누운 채 정황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3일 오후 찾아간 기자에게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으면서 원통한 그의 심정을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조씨의 조강지처 오 여사는 올해로 일흔넷. 내외가 동갑이며 아들 인제 씨와 딸 필제 씨의 남매 단 둘을 두고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나마 딸 필제 씨는 약 삼년 전에 출가하고, 외아들인 인제씨가 오 여사와 세 딸 덕래 양(13, 혜화국민교 6년생), 현래 양 (8, 혜화국민학교 2년생), 인숙 양을 데리고 미아리고개 너머 1여 간의 후생주택에 살고 있다. 그이가 빨갱이라고 이 사회에서는 아들까지도 누명을 씌워 누가 취직이나 일자리를 어디 마련해 줍니까? 하고 오 여사는 말하면서 아들은 벌써 몇 해를 두고 실직중이라 가정생활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씨는 원래 6형제의 맏형이었는데 전부 8.15 해방 전에 사망하여 조씨만이 그래도 그 형제 중의 유일한 생존자였었다고. 오 여사는 결혼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명치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쭉 동경에서 같이 하숙생활로 고생을 나누며 앞날을 기약하고 참아왔던 것이 그 후 오늘날까지 단 하루도 다리를 뻗고 평안한 잠자리를 가진 일이 없다고 한다. 중국에 망명하고 있을 때도 이리저리 보따리를 싸고 일제 관헌의 눈을 피하여 숨어야 했는데 오늘날 해방 후에는 그 이상 이렇게 하고는 일단 말문을 닫는다. 도대체 누가 공산당이요, 아이고 원통해 하며 칠순 노인은 제정신 차릴 사이없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6.25 당일 국회에서 끝까지 사수하자고 결의까지 하고는 그때 남하못했으니 이제 공산당이라고 하니 이런 원통하고 가슴 아픈 일이 어디 있느냐고 슬퍼하는 것이다. 동아일보 1959. 5. 1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084
  • 성북동, 조금 범위를 더 넓혀 성북구 전체에서 가장 유명했던 중도파 정치인을 꼽으라면 조소앙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선생의 일화는 1950년 5월 30일 치러졌던 국회의원 선거전 비사를 통해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 이후 두 번째였던 이 선거는 당대에 바람의 선거라고 불리기도 하였지만 국회 내 제3세력이라고 불리웠던 중도파, 남북협상파들이 대대적으로 당선되었던 선거였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조소앙은 당대의 유력자이자 미 군정청 경무국장을 역임했던 조병옥의 갖은 선거 공작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당시 조소앙은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 쓴 게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라는 벽보와 삐라 때문에 30일 새벽 지프차에 확성기를 달고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등, 갖은 고초 끝에 당선되었다. 조소앙을 필두로 한 이들 중도파들은 한국 정치에서 큰 꽃을 피울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던 것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45-146쪽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기치 못하게 납북된 인사들이 많았다. 오늘날 납북자의 전체적인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서울 시민들의 경우 2~4천명 사이로 납북자 수가 추정되고, 성북구의 경우 225명 정도가 납북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들 중에는 안재홍, 조소앙 선생, 역사학자 손진태 선생 등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름 없는 청년단원, 여학생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연구와 증언의 차이에 따라 다르지만 당시 성북동은 당시 이들 중요 인사들이 연금되어 있던 안가가 있었던 곳이었다. 이들은 이전까지 주로 인민군의 대남방송에 활용되었다가 8월 중순에서 9월 사이에 납북되었다. 그러나 많은 납북자들이 피신하는 도중 공습에 명을 달리하였고, 나머지도 전쟁 후 북에 남거나 소식만 간간히 들려오는 등 중도파들의 명맥은 이때를 기점으로 크게 쇠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 중도파들이 마지막으로 머물다간 땅이 바로 여기 성북동이었던 것이다. 당시 중도파의 가장 저명한 인물이었던 조소앙은 이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하지만, 1958년경 수상스럽게도 물에 빠져 그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48쪽
  • 제2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되었다. 이때는 서울특별시에 배정된 議員定員이 16명이었고 1949년에 區가 된 城北區에서도 1명의 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이때 城北區에 입후보한 자는 臨時政府要員이며 社會黨에 소속하고 있던 趙素昻과 民主國民黨의 重鎭이었던 趙炳玉이었다. 당시 이 나라안 최고의 두 거물이 입후보하였는데 趙素昻은 당시의 大統領 李承晩의 비판세력 중 領袖格이었는데다가(金九는 1949년에 被擊 死亡하였다) 趙炳玉은 美軍政下에 警務部長을 지냈고 새 정부 수립 후는 大統領特使로 UN 등에 파견된, 親 李承晩系인물이었다. 전국의 모든 시선이 집중된 이 선거에서 趙素昻(당시 63세)이 34,035표를 얻어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깝게도 6·25 事變때 人民軍에 의해 北으로 납치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210-211쪽
  • ◎ 趙素昻 1887(고종 24)∼1959 독립운동가·정치사상가. 본명은 鏞殷, 자는 敬仲, 素昻은 호이다. 본관은 成安. 경기도 파주에서 아버지 順奎와 어머니 朴必陽에게서 태어났다. 6세부터 통정대부인 祖父 成龍으로부터 한문을 수학, 1902년 성균관에 입학, 1904년 성균관을 수료하고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동경부립제1중학에 들어갔다. 1906년 日本 明治大學 法學部에 입학하였으며, 1909년 동경에 있는 조선인의 각 단체를 통합한 大韓興學會를 창립하여 회지 《대한흥학회보》의 주필이 되었다. 경술국치 때는 ‘한일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고 비상대회 소집을 꾀하려다 발각되어 고초를 겪었다. 1911년 조선 유학생친목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1912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신학교·양정의숙·대동법률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중국에 망명, 申圭植·朴殷植·申采浩·鄭寅普 등과 同濟社를 博達學園으로 개편한 뒤 중국혁명가 陳果夫·黃覺과 함께 항일단체 大同黨을 조직하였다. 30세 전후에는 민족대동단결의 정신적·종교적 통일을 위하여 六聖敎를 제창하고, ‘主權不滅論’·‘民權民有論’의 취지를 1917년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문제의 의제로 제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1918년 만주 吉林에서 무장항쟁노선이 집약된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독립운동 지도급인사 39인의 공동성명으로 발표, 내외에 그 영향력을 크게 떨쳤다. 1919년 3·1민족항쟁에 즈음하여 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漢城政府 교통부장에 추대되었다,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정의 국체와 정체의 이론정립 및 엄정 대외홍보 전반에 걸쳐 주역을 맡았다. 6월에는 파리에 도착, 김규식과 외교면에서 괄목할 성과를 올렸다. 만국평화회의 대표단 지원을 비롯하여 만국사회당대회와 국제사회당집행위원회의 활동을 위하여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또 네덜란드로 다니면서 한국의 자주독립과 그 당위성을 역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동당 지도층 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유로 영국 하원에도 한국문제를 정식 제기하도록 활약하였다. 유럽 순방에 이어 1921년 국제사회당 대표단으로 러시아 각지를 시찰한 뒤 모스크바를 경유, 5월 北京에 와서 공산주의 비판인 ‘滿洲里宣言’을 발표하고 상해로 돌아와 이듬해 임시정부 외무총장·의정원의장이 되고, 세계한인동맹회장에 취임하는 한편 金相玉을 국내에 밀파하여 의거하도록 하였다. 1929년 李東寧·李始榮·金九·安昌浩 등과 韓國獨立黨을 창당, 독자적 이념체계인 三均主義에 입각한 정강·정책의 ‘태극기 민족혁명론’을 제창하였는데, 삼균주의는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다. 1934년 삼균주의를 국시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건국강령’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채택하게 하였다. 1937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 1940년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으로서 창당선언에서 삼균주의를 다시 확립하고, 1942년 한중문화협회를 창설하여 중국 외교부장 孫科와 손잡고 김규식과 공동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43년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 1945년에는 重慶 임시정부 외무부장이 되었다. 광복이 되자 12월 1일 임시정부요인 2진으로 환국, 1946년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여 그 의장이 되어 김구주석과 함께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다.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고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통합을 이룰 때 다시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왔고, 12월 方應謨·白泓均·趙時元 등과 社會黨을 결성, 당수가 되었으며 1950년 5·30총선에 사회당으로 서울 城北區에서 출마하여 3만 4천여표로 전국 최고득표자가 되어 2대 民議員에 당선되었으나 6·25동란 때 서울에서 강제 납북되어 1958년경 사망한 것으로 전하여진다. 저서로 《韓國文苑》·《素昻集》·《遺芳集》이 있으며, 1970년 三均學會에서 《素昻文集》 상·하권을 간행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49-751쪽
  • 그러나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이 성북동이 바로 정부 수립 후 한국정치의 가능성을 내포했던 중도파의 희망과 아픔이 함께 했던 곳이라는 점이다. 성북동, 조금 범위를 더 넓혀 성북구 전체에서 가장 유명했던 중도파 정치인을 꼽으라면 조소앙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선생의 일화는 1950년 5월 30일 치러졌던 국회의원 선거전 비사를 통해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한국정부 수립을 위한 5 · 10 선거 이후 두 번째였던 이 선거는 당대에 바람의 선거라고 불리기도 하였지만 국회 내 제 3세력이라고 불리웠던 중도파, 남북협상파들이 대대적으로 당선되었던 선거였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조소앙은 당대의 유력자이자 미군정청 경무국장을 역임했던 조병옥을 상대로 갖은 공작 끝에 선거에 당선됐다. 당시 조소앙은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쓴게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라는 벽보와 삐라 때문에 30일 새벽 지프차에 확성기를 달고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등, 갖은 고초 끝에 당선되었다. 조소앙을 필두로 한 이들 중도파들은 한국 정치에서 큰 꽃을 피울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던 것이다. 『동아일보』1999.11.15.; 9.26 / 『동아일보』1948.3.31. /『경향신문』1955.8.8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2, 역사비평사, 1996.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2
  • ­ 독립운동가 조소앙의 중도 노선 (돈암동 거주) 독립운동가이자 제2대 성북구 국회의원.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거 조병옥과 대결한 조소앙은 전국최다득표로 당선 1950년 당시 중도파, 남북협상파들이 지지를 얻게 된 정치적 격변의 현장의 중심이 성북구(동)임을 보여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47쪽
  • ○ 성북구의 월·납북 인사 - 조소앙(趙素昻, 1887~1958, 돈암동 거주) 1950년 5월 30일 제2회 총선거에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표(34,035표)로 당선 한국전쟁으로 서울에서 강제납북 납북된 후 전시하에서 가혹한 생활을 견뎌야 했고, 전후에는 박헌영(朴憲永)의 숙청 등 정치적 사건 때마다 번롱(翻弄)됨 김일성(金日成)의 요구를 거부하고 납북인사들과 함께 독자적인 ‘중립화통일운동’을 전개 1958년 9월 10일 비극적인 임종에 즈음하여 “삼균주의 노선의 계승자도 보지 못하고 갈 것 같아 못내 아쉽구나”,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다오”라고 말하였다고 전함 평양 남쪽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48쪽
  • 본적: 경기도 양주 주소: 돈암동 (납북) 계열과 단체: 임시정부 <활동 내용> 경기 양주(楊州) 사람이다. 1911년 3월 일본(日本) 동경(東京) 명치(明治)대학의 법과에 유학하던 중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재망명 길에 오른 이승만(李承晩)이 동경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유학생에게 행한 강연으로 인하여 반일민족사상과 조국광복의 독립사상을 갖게 되었다. 1913년 중국 북경(北京)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박달학원(博達學院)으로 개조하여 혁명청년들을 훈련시키며 진영사(陳英士)·황 각(黃覺) 등과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와 아시아 민족의 반일단체로서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였다. 1915년 구국종교로서 민족의 대동단결과 정신적 유도를 목적으로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하였는데, 이는 단군(檀君)은 '독립사상(獨立思想)', 불타(佛陀)는 '자비제중(慈悲濟衆)', 공자(孔子)는 '충서일관(忠恕一貫)', 소크라테스는 '지덕합치(智德合致)', 예수 그리스도는 '애인여기(愛人如己)', 마호메트는 '신행필용(信行必勇)'으로써 연결하여 육성일체(六聖一體)를 구상한 것이었다. 1919년 2월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의 밀명을 받아 일본 동경으로 파견되어 조선의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8독립선언의 계기를 조성하면서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19년 4월 10일 3·1독립운동 이후 국내 서울에서는 조선민국 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를 수립하고 정도령(正都領)에 손병희(孫秉熙), 부도령(副都領) 및 내각총리경(內閣總理卿)에 이승만(李承晩)으로 내각을 구성할 때 그는 교통무경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신규식(申圭植)과 함께 혁명당(革命黨)을 조직하여 이사로 취임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수립하기 위한 임시헌장(臨時憲章)과 임시의정원법(臨時議政院法)을 제정하여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이 개회됨으로 초대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구성되자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정보통신과 군자금 모집, 송금 및 임시정부의 선전과 독립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을 조직하게 되자 그는 외교특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이종욱(李鍾郁)을 통하여 이병철(李秉徹)·안재홍(安在鴻)으로 하여금 조직의 활동을 하게 하였다. 1921년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대회(共産黨大會)를 참관한 후 중국 북경에 돌아와서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만주리선언(滿洲里宣言)'을 발표하였으며,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고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1922년 6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연맹 강화회의(國際聯盟講和會議)에 김규식(金奎植)을 전권대사의 자격으로 파견하였는데 그는 김규식을 원조하는 사명을 가지고 프랑스 파리에 파견되었다. 1922년 12월 중국 상해에서 김상옥(金相玉)을 만나 재등(齋藤) 조선총독(朝鮮總督)을 죽이고, 일제의 관공서를 파괴함으로써 독립사상을 고취시킬 것을 역설하니 마침내 1923년 1월 김상옥이 국내로 들어와서 종로(鐘路) 경찰서에 투탄하는 거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1926년 8월 18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으며 학무총장을 겸임하다가 약헌개정에 따라 국무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11월 국내에서 민족유일전선으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의 활동과 때를 맞추어 중국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韓國唯一獨立黨) 촉성회를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홍 진(洪震)·이시영(李始榮)·김 구(金九) 등과 함께 결성하고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창당발기인인 이동녕·김 구·이시영 등과 함께 참여하여 정치균등·경제균등·교육균등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창시하고 당헌(黨憲)·당강(黨綱)을 기초하여 가결시켰다. 1930년 7월에는 국무위원장 이동녕과 함께 국무위원 외무장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적 공작을 목적으로 특무대(特務隊)를 조직하여 의생단(義生團)이라 하고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공작 일체를 김 구에게 위임한 후 애국단(愛國團)의 명칭으로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대의거를 일으키게 하였다. 1933년 1월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 내무장(內務長)에 취임하였다가 그해 3월 6일 해임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33년 7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합당파(合黨派)간에 통합하고자 하는 논의가 결의되어 새로운 민족단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당될 때 한국독립당을 해체하고 합당파를 이끌고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의열단의 김원봉(金元鳳)이 당권을 장악하자 1933년 9월경에 민족혁명당을 탈퇴하여 다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1934년 3월 일제가 1932년 1월 중국 상해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전승하게 됨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당시 전사한 일본군 장병들의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게 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강병학(康秉鶴)이 식장에 참여하는 유길(有吉) 상해일본공사와 금촌(今村) 제3함대사령관 등 일본 요인들을 폭탄을 던져 죽이고자 의거를 일으키자 그 의거에 대한 선언서를 작성하여 중국국민과 내외동포에게 독립사상을 널리 선전하였다. 1935년 항주(杭州)에 이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 외무장에 재선되었다. 1936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내무장으로 선임되었으며 3·1독립운동 제17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한국독립당의 명의로 된 기념선언을 발표하였다. 1937년 8월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을 계기로 광복전선을 구성하기 위하여 김 구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과 이청천(李靑天)의 조선혁명당과 제휴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중국 남경(南京)에서 결성하고 '대중전국선언(對中戰局宣言)'을 발표하였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외무장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 4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재건파 등 3당이 통합되어 한국독립당을 창립할 때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되고 창당 선언을 기초하여 한국독립당은 3??독립운동의 생명을 계승한 민족운동의 중심적이고 대표적인 당임을 성명하였으며 동년 9월 17일에는 중국 중경(重慶)에서 광복군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를 설립케 하여 전례식을 거행하고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941년 중국참정회(中國參政會)에 교섭하여 한국독립에 대한 원조와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였으며 1942년 1월 임정선전위원회(臨政宣傳委員會) 주임위원이 되어 선전계획의 수립과 전개의 중추적 활동을 하며 '고 국내동포서(告國內同胞書)'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1942년 3월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으로서 미·영·소·중 4개 연합국에 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속히 승인하여 줌으로써 연합국과 함께 일본을 공격할 수 있음을 천명하고, 한편 동년 10월 11일에는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를 성립시켜 협회장에 손과(孫科) 중국 입법원장이 되고 그는 김규식과 함께 한국측의 부회장으로서 선임되어 중한공동전선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1943년 6월 임시정부 외교부장의 명의로 중국 국민정부(國民政府) 군사위원장에 장개석(蔣介石) 총통에게 공한을 보내어 동년 7월 26일 김 구 주석과 김규식 선전부장, 그리고 이청천(李靑天) 광복군사령관과 함께 회담하게 되었으며, 이 석상에서 한국의 독립지원을 요청한 결과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문제가 논의되고 독립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44년 3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한국독립당의 임무〉라는 제목하의 논설을 발표하고 동년 6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의 비망록을 작성하여 발표함으로 중·한 양정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9월에는 중한문화협회에서 외교정책에 관한 연설을 행하여 내외의 이목을 끌고 우방의 여러 나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하였다. 1945년 2월 28일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의정원에 대하여 대독선전 동의요구안(對獨宣戰同意要求案)을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결의하게 되어 임시정부에서는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으며 동년 3월 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개최되는 연합국회의(聯合國會議)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가 참석할 수 있도록 정식요청하고 재미교포인 윤병구(尹炳球)외 8명을 선임하였다. 광복후에는 한독당 부위원장·사회당 당수·국회의원 등으로 활약하다가 6·25 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 ○ 민족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한용운과 조소앙 여기, 조국의 광복을 갈망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과 조소앙입니다. 다른 듯 비슷한 두 사람은 독립운동가를 넘어 ‘민족지도자’로 칭해지는 이들입니다. 같은 시기, 일본 메이지대학을 다니던 유학생 조소앙은 조국광복의 독립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관심은 곧 열망으로 번졌고 그는 조국독립을 꿈꾸며 1913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합니다. 이후 신채호, 박은식과 함께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에 가입하고 반일단체 대동당을 조직하지요. 또한 민족단결을 목적으로 단군, 석가,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연결해 육성교(六聖敎)라는 구국종교를 창안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 사이에서도 그의 활약이 두드러진 시기는 3·1운동에 즈음해서입니다. 조소앙은 1919년 2월, 무장항쟁노선이 집약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이를 독립운동 지도급 인사 39인의 공동서명으로 발표해 3·1운동에 큰 영향력을 떨쳤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30-32쪽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3년-조소앙 만주로 망명 후 동제사 활동 1919년-조소앙 대한독립의군부 조직, 대한독립선언서 기초 1931년-조소앙 삼균주의에 의거한 현실분석과 독립운동 방법론과 과제 정립 1941년-조소앙 「대한민국건국강령」 기초,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공식 채택 1943년-조소앙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 약속 1945년-조소앙 포츠담 회담 참여, 한국 독립 보장받음 1946년-조소앙 돈암동 거주 시작 및 비상국민회의 참여 1948년-조소앙, 배성룡, 김의한 등 남북협상에 참여 1950년-조소앙, 장건상, 안재홍, 조헌영 등 국회의원 당선. 조헌영,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손진태 등 주요인사 대거 납북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13쪽
  • ○ 중·일전쟁으로 변화를 맞이한 국외 독립운동 일본이 국내에서 민족문화말살 통치를 펼치고 있던 1930년대, 국외에선 여전히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앞서 1920년대 후반 북만주지역에 조직됐던 혁신의회는 한국독립당으로, 남만주지역의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으로 바뀝니다. 이들은 각각 그 산하 부대로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을 창군하지요. 이들은 각각 활동 근거지에서 일본군과 맞섭니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 지역을 침략하며 일어난 만주사변은 이전까지 일본에 협조적이던 중국인들이 한국 독립군들과 연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끊임없이 대륙 침략을 강행하게 되고 결국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일어나지요. 만주 지역이 거대한 전쟁터가 되다보니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점점 힘들어집니다. 한편 임시정부의 조소앙은 중·일전쟁을 계기로 광복전선의 강화를 기하기 위해 자신이 이끌던 한국독립당, 1935년 김구가 창당한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과 제휴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합니다. 그리고 1940년 3당을 통합해 한국독립당을 재건 및 창당하며 다시금 삼균주의를 정립하지요. 같은 해, 충칭으로 자리를 옮긴 임시정부는 민족주의 진영의 항일독립 요인들을 결집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3쪽
  • ○ 한국광복군, 가장 강력한 독립군의 등장 이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1940년의 국외 상황은 충칭에 한국광복군이, 화베이에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조선의용대가 독립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1942년에는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임시정부에 합류합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국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시킵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협약에는 임시정부의 요인 조소앙과 장건상이 있었습니다.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으로서 미국과 영국, 소련과 중국 등 4개 연합국과 일본을 공격하는 데에 승인을 얻고 중한공동전선 강화에 이바지합니다. 이로써 중국 각지에서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던 한국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의 요청으로 미얀마와 인도 전선에도 파견, 일본군과 싸우고 일본인 포로 심문과 선전 활동 등을 진행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14-115쪽
  • ○ 국외가 아닌 국내에, 임시가 아닌 정식의 정부가 수립되다 5·10총선 때 참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 세력은 2년 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대거 참여합니다. 그 결과 임시정부에서 일본과 맞섰던 조소앙, 장건상, 안재홍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됩니다. 조소앙은 성북구에서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로, 장건상은 부산에서 출마해 조소앙에 이어 전국 2위의 득표를 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9쪽
  • ○ 6·25전쟁의 발발과 납북된 독립운동가들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조헌영 등 독립운동가로, 건국 요인으로 활동했던 성북인들 또한 전쟁 중 납북을 당합니다. 이로 인해 납북 후 그들의 삶은 물론 지난 일제강점기 당시의 업적들까지도 자세하게 알 수 없게 됩니다. 기록의 단절은 곧 후세의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공백이 되는 것과도 같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30쪽
  • ○ 해방 이후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조소앙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1887~1958 / 대한민국장 / 돈암동 445-1(현 동소문동 1가 50) 거주 삼균주의를 제창해 임시정부가 어떤 이념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할지 기본방향을 정했습니다. 그는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으로 우리나라가 카이로 회담에서 결의한 우리나라의 독립보장을 포츠담 회담을 통해 재확인 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9쪽
  • ○ 독립을 위해 하나로 뭉친 각계의 사람들 1919년 2월 1일,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 39명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합니다. 무오독립선언 혹은 대한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입니다. 조소앙이 기초한 선언서에는 일본과의 병합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연서자 39인 중에는 조소앙을 포함해 김동삼 등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약 일주일 뒤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는 조선 유학생들의 주도로 2·8 독립선언문이 낭독됩니다. 무려 적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장소에서요. 유학생들의 든든한 의지가 되어준 인물이 또한 조소앙입니다. 상하이로 망명해 항일 활동을 하던 그는 신규식의 밀명을 받고 도쿄로 파견돼 조선의 유학생들과 접촉, 그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3·1운동이 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이 거족적 민족운동을 계획하고 지도한 사람들이 민족대표 33인이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39-40쪽
  • ○ 조소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를 세우다 전국적 규모의 항쟁이었던 3·1운동은 결국 일제의 탄압으로 끝나게 됩니다. 국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을 통해 사람들은 지도부의 중요성을 느끼고 마침내 외교 공사관들이 많이 모여 있던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두게 됩니다.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로 삼권분립에 기초한 공화정 정부였습니다. 입법을 맡은, 오늘날의 국회와 같은 역할을 한 임시의정원에서 활약한 인물로는 조소앙이 있습니다.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이승만이 초대 국무총리로 선출된 후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됩니다. 또한 임시정부의 선전과 독립사상의 고치를 위해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조직되면서 외교특파원으로도 활동하게 되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52-53쪽
  • ○ 조소앙,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다 먼저 조소앙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원 비서장이자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1921년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됩니다. 이듬해 파리 국제연맹 강화회의에 파견되어 임시정부의 전권대사였던 우사 김규식과 합류한 후 한국의 독립 승인 및 국제연맹의 가맹을 요구하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지요. 그리고 같은 해 상하이에서 김상옥을 만나 종로 경찰서 투탄 거사를 계획합니다. 1927년에는 국내에서 조직된 민족유일당 신간회의 활동과 때를 맞춰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결성하고 상임위원으로 선임됩니다. 그러나 다시금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당을 결성하지 못하고 1930년 이동녕, 김구, 이시영, 김동삼 등 28명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지요. 그리고 이때 처음 그의 삼균주의 사상이 공식 반영됩니다. 삼균주의는 독립운동가 조소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첫 손에 꼽히는 주제어입니다. 1941년 공표된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도 삼균주의에 입각해 만들어졌습니다. 삼균이란, 개인간·민족간·국가간 균등을 말하고, 정치적 균등·경제적 균등·교육적 균등의 실현으로 삼균을 이루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한다는 평등주의 사상입니다. 그는 이 삼균주의를 제창해 임시정부가 건국까지 좌·우파를 통합해 어떤 이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할지 기본 방향을 정합니다. 1933년에는 조선혁명당, 조선의열단,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 한국독립당의 합당 논의가 결의돼 새로운 민족단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이 창당됩니다. 의열단 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장건상 역시 무장투쟁을 지향하며 당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지만 상하이에서 일본 영사관 형사에게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후 약 1년 간 고문과 옥살이에 시달립니다. 한편 조소앙은 한국독립당을 해체하고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만 조선의열단의 김원봉이 당권을 장악하면서 사회주의 성향이 도드라지자 결국 같은 해 민족혁명당을 탈퇴해 다시 한국독립당을 재건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82-83쪽
  • 조인래 사무총장은 양주에 조소앙 기념관이 들어선 2016년부터 생업을 접고 조소앙 선생 기념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 성북구 국회의원 출마 당시의 명함 및 전단지 등 다양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성북문화원, 2019,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이 나, 63-64쪽
    조인래 조소앙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조소앙 선생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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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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