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현
1920.07.26 - 1981.11.24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교육가
인물 개인 언론인
문학평론가이자 출판인이다. 1933년 중동중학교에 편입하여 김광섭 시인을 담임으로 만난다. 1938년 한글동인지 『아(芽)』, 1939년 『시림』을 만들고, 이를 계기로 문학의 길을 걷는다. 1942년 창씨명으로 「동양에 대한 향수」를 발표하였고, 몇 편의 친일 관련 글을 남겼다.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과 교류하며 1946년 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어 문단 활동을 함께 하였고, 1949년 『예술부락』을 주재하면서 본격적인 비평활동을 전개했다. 1955년에는 순수 문예지인 『현대문학』의 주간을 맡는다. 1972년 정릉동에 이층 양옥을 마련해 이사하였다. 1981년 해외여행 도중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조연현문학상’을 제작하여 신진작가들을 양성하고 지원한 그의 뜻을 잇고 있다.
정릉동
  • 현대문학 창간호 표지(삼성출판박물관)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716-108호

근거자료 원문

  • 1971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 한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고심하던 조연현은 측근 몇 사람을 불러 사퇴의 뜻을 전했다. 측근들은 펄쩍 뛰었다. 2차투표로 가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며 조연현을 설득했다. 조연현은 가타부타 말없이 눈을 감고 듣기만 했다. 그들은 1차투표에서 패배한 원인이 서정주의 미온적인 태도, 그에 따른 서정주계 문인들의 이탈에 있다고 보고 휴회시간을 이용해 물밑작업에 나섰다. 서정주계 문인들은 서정주의 눈치를 살피기만 했다. 마침내 서정주가 입을 떼었다. “조연현 후보를 지지해주시오.” 서정주의 그 한마디 말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2차투표 결과 조연현은 20여 표 차로 김동리를 누르고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정규웅, 2010,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 이가서, pp.228~231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 103
  • 함안군 봉성마을의 유지이자 재력가였던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조연현은 어린 시절부터 시골 선비들의 풍류를 보고 들으며 자랐다. 사랑채 넓은 마루에는 늘 할아버지를 찾아온 손님들이 모여 바둑을 두거나 시를 읊곤 했다. 어른들 곁에서 심부름을 하며 본 사랑채 풍경은 어린 마음에도 멋스러움이 느껴졌다. 조연현도 어른들처럼 공부방에 친구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을 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동네에 극단이 오면 한동안 연극을 흉내 내고, 영화상영이 끝나고 나면 유리판에 그린 그림을 벽에 반사시켜 엉터리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무명시인이나 풍수쟁이들이 한두 달씩 사랑방에 묵어갈 때에는 몇날 며칠이고 그들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지냈다. 그 무렵 숙부가 읽던 탐정 소설을 몰래 읽는데 재미를 붙였고, 점차 시와 소설, 문학 전 분야로 눈을 넓혔다. 영어단어를 공부하기 보다 시를 외우거나 문학책을 읽었고, 학교에 가는 것 보다 영화관에 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1933년에는 함안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온다. 처음 들어간 보성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동중학교에 편입하는데, 이때 김광섭 시인을 담임으로 만난다.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담임선생님에게 제재를 가하는 학교 풍조가 싫어 자퇴를 하고 다시 배재중학교로 편입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에 빠져들어 마음에 드는 구절을 연애편지에 담기도 하고, 소설을 흉내 내어‘고독의 형벌’이란 글을 써보기도 했다. 당시 신문 학생란에는 대학생들의 작품이 발표되었는데, 중학생인 조연현의 글도 자주 지면에 실렸다. 이때 동인지 《아芽》와《시림詩林》을 만든다. 우리글을 쓰지 못하게 할 때 국문 잡지를 낸 조연현은 이를 계기로 문학의 길을 가고자 하는 목표를 세운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교정 북쪽의 성벽 위에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어제 읽은 책의 감동을 조용히 되새겨 보는 것이 그때의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때때로 노우트에 적어 둔 한두 편의 시가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되면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었다. 이러한 나의 위안과 즐거움은 결국 동인잡지를 만드는 대담한 행동에까지 발전되었다 - 조연현,「 나의 중학시절」- 배재중학을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도 생각해보았지만, 청년들이 전쟁에 징집당해 희생되는 것을 보며 학교도 공부도 의미 없는 일이라고 느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주로 떠난다. 그러나 1년 동안의 자유로운 생활 끝에 남은 것은 시간을 허송했다는 후회와 혼자만 뒤떨어지는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조연현은 다시 학교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에 입학한다. 입학과 함께 문예부의 책임을 맡는 한편, ‘조선문학연구회’를 만들었다. 이듬해 입학한 정태용과 조진대, 조영암, 이병철 등과 뜻을 모아‘조선문학연구회’의 이름으로 시낭독회를 열었다. 일본의 교육정책을 따르고, 일본인 학장과 교수진이 운영하던 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임을 따로 만들고, 우리말을 쓰는 행사를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학교 측에서는 연구회를 해체하고 문예부 주최로 시낭독회를 열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반발한 연구회 회원들은 준비한 시가 아닌 ‘나는 오줌을 누고 싶어도 오줌 눌 장소가 없다’,‘ 나의 얼굴은 식민지처럼 말랐다’같은 내용을 일본어로 낭송했다. 이 때문에 조연현은 학우들과 함께 유치장에 갇히고, 얼마 후 퇴교를 권고 받아 자진해서 학교를 나온다. 고향으로 돌아와 면서기를 하며 지내는 동안 김동리, 유치환, 정태용 등 경남 일대에 있던 문인들과 친분을 나눈다. 해방 후 동창 김영태가 자금을 대어 명동 한 곳에《예술부락》의 사무실을 내고 조연현에게 주간을 맡긴다. 당시 교류하던 주변 문학청년들의 글을 모으고, 서정주 시인에게 글을 받았다. 시 한 편, 소설, 평론 한두편뿐이었지만 우리말로 쓴 문학에 대한 호응인지 이십여 일 만에 1만부가 팔렸다. 《예술부락》을 계기로 유치환, 박용구,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의 젊은 문인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들의 교류는 1946년 ‘청년문학가협회’로 이어진다. 청년문학가협회는 발족 후 시, 소설, 평론 등 문학의 각 부분에 대한 보고강연을 하였는데, 이때 평론 분야를 맡을 사람이 없었다. 협회에서는 조연현이 1947년‘조석동’이라는 이름으로 경향신문 신춘현상에 평론「우리 문학의 성격」을 투고한 것을 알고 그에게 평론을 맡긴다. 해방 전부터 나는 조금씩 시를 써왔고, 해방 직후에도 얼마 동안은 시를 썼지만 해방 이후 점차적으로 나는 시에서 평론으로 아주 그 영역을 바꾸게 되었다. 이것은 내 취미나 기호의 탓에서보다는 해방 30년의 세월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해방 직후의 문단의 혼란은 새로운 이론을 요구했고, 좌우익의 대립이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 조연현,「 나와 광복 30년」- 1949년에는 잡지《문예》의 창간에 참여하며 주간을 맡았다. 조연현은 극우세력의 반발을 무릅쓰고 정치적 견해가 달랐거나 중도의 입장을 고수했던 염상섭, 계용묵, 최정희, 황순원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실었다. 《문예》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창간 1주년 기념특집을 준비하고 있던 중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 왕십리 친지 집에 숨어 지내다 몇 달 만에 국군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밖으로 나가려는데, 군인들이 조연현을 포위했다. ‘이 집에는 머리를 깍은 괴뢰군 패잔병이 숨어 있다’는 이웃의 고발 때문이었다. 신분을 밝힐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자신의 초상화가 담긴 잡지를 증거로 혐의에서 벗어났다. 9.28 수복 후 피난 간 부산 광복동에서 김동리와 함께 사무실 간판을 달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문예》전시판을 출간한다. 당시 문화계는 문학이나 미술, 음악 분야를 막론하고 서로 교유하였는데, 화가들은 책의 삽화나 표지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조연현은《문예》의 표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 화가 남관, 김환기, 도상봉, 장우성, 천경자, 박노수, 서세옥들과 장정과 삽화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이들과 교류는 조연현에게 다른 분야의 예술 감각과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954년 통권 21호로 종간된《문예》는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부족한 당시 천상병, 박재삼, 최일남 등 많은 작가들의 등단무대가 되었다. 전후 시기 우리 문단의 발판을 다지는 데 기여한 조연현은 서른네 살 젊은 나이로 최연소 예술원 회원이 되고, 숙명여대, 동국대 등 대학 교단에 선다. 1955년에는 소설가 오영수의 소개로 잡지《소년》을 발간하고 육영사업을 펼치던 사업가 김기오를 만난다. 새로운 월간지를 계획하던 김기오는 조연현의 설득으로 순수 문예지인《현대문학》을 발간하기로 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한다. 조연현은 주간으로서 모든 결정권과 운영권을 가지고 자신의 철학을 반영한 문예지를 만들었다. 편집장은 오영수, 편집사원은 시인 김구용, 박재삼이었다. 《현대문학》은 발간과 함께 대표적인 문학잡지로 자리 잡으며 우리나라 최장수 문예지가 되었다. 서울 생활을 한 지 20여 년만인 1972년 정릉동에 이층 양옥을 마련한다. 정릉 주택지 조성이 막 시작될 때라 주변은 집 몇 채 뿐인 벌판이었다. 40여 평의 마당에는 사촌여동생이 준 향나무와 단풍나무를 시작으로 지인들에게 선물 받은 나무를 심었다. 음악평론가 박용구는 나무의 품목과 수량까지 정성스럽게 적어 보내주었고, 소설가 방기환은 아끼던 향나무를 선물했다. 시인 김규동은 로댕의‘생각하는 사람’처럼 사색에 잠겨 있는 모양의 향나무를 가져와 심으면서“이 나무는 생각이 많은 나무입니다”라는 재미있는 풀이를 해주었다. 마당 한 편에는 옛선비들이 즐겨 키우던 파초를 한 그루 심어, 더운 여름 싱싱하고 넓은 잎이 자라는 걸 보는 것을 즐겼다. 또, 7~8평 되는 차고 위에 작은 밭을 만들고 화초와 푸성귀를 키웠다. 처음 차고를 지었을 때는 장독대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는데, 한 잡지에서 외국의‘옥상정원’기사를 보고 나름대로 작은 텃밭을 만든 것이다. 요새 우리 집을 찾는 손님이 있으면 나는 먼저 이 옥상 농장을 새마을을 시찰시키듯 구경시킨다. 그리고 이 농장에서 얻은 상치를 대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집에 와서 부러운 것은 오직 그것뿐인양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남에게 보여서 부러워할 만한 아무것도 가져 보지 못한 나에게 남이 부러워하는 것을 갖게 된 것이 매우 기쁘다. “나도 농장을 가졌다.”이것이 최근이 나의 보람이요, 자랑이다. - 조연현,「 옥상농장」-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조연현은 일본, 동남아 등지를 다닐 때면 신기한 소품들이나 국내에서 볼 수 없었던 영화테이프를 사왔다. 집안 곳곳에는 수집한 소품, 평생을 두고 본 서책, 문화예술인들과 친분을 나누며 받았던 작품이 있었다. 정릉 집에는 문인들과 바둑을 즐기던 지인의 출입이 잦았다.‘ 하루도 바둑을 안두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둑을 좋아했던 조연현은 이종환, 정태용, 김윤성들과 이층 서재에 모여 천장이 까맣게 그을릴 정도로 담배를 피우며 바둑을 두곤 했다. 공휴일에는‘삼일절, 광복절 배杯’라고 이름까지 붙여가며 바둑 대항전을 열었다. 문예지 주간으로서, 교육자로서 우리 문학의 발전을 위해 힘썼던 조연현은 1981년 회갑 기념으로 외국 여행을 하던 중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지금도 정릉 집에는 지인들이 선물한 나무와 그가 글을 썼던 서재가 그대로 남아있고, 조연현을 기리는 동상과 표석이 세워졌다. 1982년 ‘조연현문학상’이 제정되어 탁월한 조직력으로 광복 이후 30년의 문단을 이끌면서 신진작가들을 양성하고 지원한 그의 뜻을 잇고 있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62-68쪽
  • 조연현 1920년 경상남도 함안 출생 1940년 혜화전문학교(동국대학교 전신) 시낭독회 사건으로 자퇴 1947년 민중일보, 민주일보 기자, 민국일보 문화부장 겸 사회부장 1948년 《문예》창간, 주간 1955년 《현대문학》창간, 주간 1961년 서울대, 숙명여대, 연세대 등 출강, 동국대 전임교수 1970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 위원장 1973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76년 현대문학사 사장 1979년 동국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학위 1980년 한양대학교 부설 국학연구원장 1981년 한국 잡지협회 회장, 일본 여행 중 작고 대표작품 『우리 문학의 성격』, 『문학적 산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 『문학과 사상과 인생』, 『문학과 그 현장』, 『한국현대문학개론』, 『한국현대작가론』등 상훈 대한민국예술원상(1966), 국민훈장 동백장(1970), 3.1문화상(1972)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69쪽
  • 문학평론가이자 출판인이다. 서울에 올라와 중동중학교에 편입하여 김광섭 시인을 담임으로 만난다. 일제강점기에 한글 동인지 《아芽》와 《시림詩林》을 만들고, 이를 계기로 문학의 길을 택한다. 해방 후 《예술부락》, 1949년 《문예》, 이어 1955년에는 순수 문예지인 《현대문학》의 주간을 맡는다. 《예술부락》 주간을 하며 유치환, 박용구,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과 교류하며 1946년 ‘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어 문단 활동을 함께 했다. 서울 생활을 한 지 20여 년만인 1972년 정릉동에 새로 주택지가 조성 될 때 이층 양옥을 마련해 이사하였다. 문단의 주요 단체의 중진으로 참여하여 많은 문인들과 두루 어울렸다. 조연현이 세상을 뜬 뒤 1982년부터 한국문인협회에서 ‘조연현문학상’을 제정하여 후배 문인을 지원하고 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31쪽
  • ○ 조연현과 문인교류 「조연현 씨 日 호텔서 별세」, 『경향신문』, 1981.11.24.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쪽
  • ○ 조연현과 문인교류 「조연현씨 유해 도착 28일에 장례」, 『동아일보』, 1981.11.25.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쪽
  • 정의 해방 이후 『문학과 사상』·『문학개론』·『한국현대문학사』 등을 저술한 평론가. 문학평론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20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했다. 1933년 함안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했다. 1934년 중동학교에 편입했다가 1935년 그만두고 배재중학 3학년에 편입, 1938년 배재중학을 졸업했다. 1937년 시 동인지 『아 芽』(1938)·『시림 詩林』(1939)에 참여하면서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0년 만주 하얼빈에 잠시 있다가 귀국하여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에 입학했다. 창씨명으로 발표된 「동양에 대한 향수」(『동양지광』, 1942.5) 등이 있으며, 일련의 친일비평은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의 미학이론을 정치 논리로 파악해 수용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이밖에도 몇 편의 친일 관련 글을 남겼는데, 「문학자의 입장」(『동양지광』, 1943.1), 「청춘단상」(『동양지광』, 1943.5), 「문단현지보고」(『문화조선』, 1943.10) 등이 있다. 1945년 『예술부락 藝術部落』을 주재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좌익계 문학가동맹(文學家同盟) 측에 정면으로 맞서 김동리(金東里)·서정주(徐廷柱) 등과 함께 청년문학가협회(靑年文學家協會)를 결성했다. 『민주일보』·『민중일보』·『민국일보』 등 신문사에서 기자나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면서 민족진영 문화단체의 총본산인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全國文化團體總聯合會) 결성의 산파역을 맡았다. 이후 문예지 『문학정신 文學精神』을 주재하면서, 이때부터 문학가동맹 측의 문인들과 민족문학론(民族文學論)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전개, 순수문학을 적극 옹호하는 평론을 발표했다. 1948년 문예사(文藝社) 편집장을 맡고, 한국문학가협회(韓國文學家協會) 발족에 참여했다. 1953년 한국문학가협회 평론분과위원장을 역임, 1954년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 1955년 『현대문학 現代文學』을 창간하면서 주간을 맡았다. 1956년부터 대학 교단에 섰으며, 동국대학교 교수, 한양대학교 문과대학장을 역임하고, 서울대학교·성균관대학교·수도여자사범대학·숙명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다. 또한, 70년대 이후 문단의 여러 기구에 참여해 예술문화윤리위원장, 문학평론가협회장, 예술원 문학분과위원장, 펜클럽한국본부 부위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비평가로서 활동은 해방 후의 활동에서 두드러지는데, 1948년 처녀평론집 『문학과 사상』을 발간한 이래로 우익 민족문학론의 선두에 섰으며, 탁월한 인상비평(印象批評)의 새 영역을 구축하고, 또한 순수문학론적 입장에서 전통을 적극 옹호했다. 한편, 갑오경장 이후의 신문학사를 정리, 체계화한 『한국현대문학사 韓國現代文學史』(1961)는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조연현문학전집 』(1977)·『문학과 사상』(1948)·『문학개론』(1951)·『한국현대작가론 韓國現代作家論』(1952)·『문학적 인생론』(1959)·『한국현대문학사』(1961)·『여백(餘白)의 사상』(1962)·『문학과 생활』(1964)·『한국신문학고 韓國新文學考』(1966)·『문학과 사회』(1973) 등 20여 권이 있다. 주요 평론으로는 「논리(論理)와 생리(生理)」(白民 10호, 1947.9)·「근대조선소설사상계보론서설」(신천지, 1949.8)·「현대의 위기와 문학정신의 방향」(자유세계 5호, 1952.8)·「한국해방문단의 10년사」(문학예술 2호, 1954.6)·「문학논쟁 그 행방」(서울신문, 1965.9.14∼11.6)·「문학평론 60년의 문제들」(신동아, 1968.8)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문화포상(1963), 제4회 문교부 문예상 문학부분상(1965), 제11회 예술원상(1966), 국민훈장 동백장(1970), 3·1문화상(1972) 등을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조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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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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