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1920.12.03 - 1968.05.17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교육가
인물 개인 학자
시인이자 학자, 교육가이다. 1939년 『문장』에 시 「고풍의상」과 「승무」, 1940년에 「봉황수」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해방 후 성북동에 한옥을 마련하여 ‘방우산장’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근처에 살고 있던 김기창, 김환기, 윤이상 등과 교류했다. 그는 방우산장에서 박목월, 박두진과 모여 의견을 나누며 『청록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책의 장정은 김용준이 맡았다. 그의 작품은 민족정서와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활동 후기에는 혼란한 현실 정치를 비판하며 『지조론』(1962)과 같은 산문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성북동
  • 문학사상 제29호 표지(조지훈 초상)
  • 조지훈_풀잎 단장 표지(삼성출판박물관)
  • 성북동 조지훈기념 건축조형물(1)
  • 조지훈_돌의 미학 표지
  • 조지훈_조지훈 전집1 표지
  • 조지훈 집터 표지석
  • 성북동 조지훈기념 건축조형물(3)
  • 성북동 문학산책_성북동 조지훈 기념 건축조형물(1)
  • 성북동 문학산책_성북동 조지훈 기념 건축조형물(2)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36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0-44 (성북로16길 11)
  • 비고: 성북리 60-44번지

근거자료 원문

  • 심우장과 노시산방 1. 1937년 봄, 심우장 - 한용운, 김동삼, 조지훈 선생을 마지막으로 뵈온 것은 일송 김동삼 선생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셨을 때 때가 때인지라 일송 선생의 시신을 돌볼 사람이 없어 감옥 구내에 버려둔 것을 선생이 망명시절 고인에게 받은 권우眷遇와 지사志士 선배에 대한 의리에서 결연이 일어나 성북동 심우장까지 일송 선생의 관을 옮겨다 놓고 장사를 치르시던 모습이다. 위 글은 시인 조지훈이 1954년 잡지 『신천지』에 쓴 「한용운 선생」의 일부이다. 이 짧은 글에는 3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용운, 김동삼, 조지훈. 그리고 조지훈은 이 장례를 아버지와 함께 갔으니 아버지 조헌영을 더하면 넷이 된다. 실제로 조헌영은 장례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뒤에 한용운을 대신해서 조사弔辭를 낭독했으니 총 4명이 이 글의 당사자가 된다. 과연 당시의 상황은 어땠으며, 이들은 무슨 관계였을까? 심우장에서 치른 김동삼의 장례를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 가운데 한명이 바로 조지훈이다. 그는 조사를 낭독한 아버지 조헌영을 따라 한용운을 만나러 다녔다. 그에게 한용운은 여러모로 어려운 사람이었다. 조지훈은 1920년생, 조헌영은 1901년생이었으니 1879년생인 한용운은 조지훈에게 할아버지뻘이었다. 거기에 이미 한용운은 신화적 인물이었다. 난초 중에도 풍란의 매운 향기를 능가하는 한용운 선생의 향기를 나는 일찍이 어려서 들었다. 조지훈의 말이다. 청년 조지훈은 한용운이 이미 3.1운동 민족대표로 활약한 것, 3년간의 치열한 감옥생활, 신간회 활동을 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용운은 이미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뿐 아니다. 1926년 발표한 시집 『님의 침묵』은 그를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 문학가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그런 한용운을 조지훈이 만난 것이다. 당시의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는 추정하기 힘들지만, 오래 남았던 것은 확실 하다. 1954년 『신천지』에 「한용운 선생」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사조』 1권 1호에 「한용운론」을, 1966년 『사상계』 14권 1호에는「폭풍·암흑속의 혁명가-한국의 민족시인 한용운」을 발표 한다. 같은 해 ‘근대명언초’란 코너의 「방우한담」이라는 칼럼에선 한용운을 언급했고, 「지조론」이란 글에선 단재 신채호와 함께 민족의 지조를 지킨 대표인물로 한용운을 꼽았다. 「민족주의자 한용운」이란 글에서는 “선생의 님은 중생이요, 또한 한국”이라고 이야기하여 그의 문학도 이야기했다. 조지훈은 해방 이후 최초의 한용운 연구자였던 셈이다. 그의 아버지 조헌영은 한용운뿐만 아니라 김동삼과의 관계도 깊었다. 한양 조씨인 그의 집안은 대대로 경북 영양 주실마을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김동삼의 고향은 안동이었고 이 두 집안은 인척 관계로 엮이는 경우가 많았다. 조헌영은 단순한 고향 후배의 자격으로 조사를 낭독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성균관 뒤편에 살던 조헌영은 1941년경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긴다(기록이 없어 이유는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혹 한용운 때문은 아니었을까?’라는 상상은 한 번쯤 해봄직 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거하며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의 활동을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북한의 이른바 ‘모시기 공작’에 의해 잡혀가고 만다. 지금 성북동에 남아 있는 조지훈 집터는 아버지 조헌영이 살던 집이다. 조지훈은 이 집을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았지만, 혹여 아버지가 돌아오실까 죽는 날까지 이사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 이름으로 된 명의도 바꾸지 않았다. 지금 성북동 ‘조지훈 집터’는 사실 조헌영의 집터인 셈이다. 1937년 봄, 심우장에서는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가 있었다. 차가운 관속에 누워 있었을 김동삼 선생의 시신, 그 관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한용운, 묵묵히 조사를 읽어갔을 조헌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지켜봤을 청년 조지훈이 그곳에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상황이었고, 식민지 안에 심우장만이 조선 땅으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바로 그 장면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02쪽, 206-208쪽
  • 개울을 사이에 두고 후일 유럽을 뒤흔들 작곡가 윤이상이 길 건너 조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50쪽
  • 한편 이 세 사람과 모두 인연이 닿은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시인 조지훈이다. 처음 상경해서 그는 성북동과 가까운 명륜동에 살았다. 지금도 복구되지 않은 성북동과 명륜동 사이의 헐려버린 한양도성은 두 곳을 같은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1943년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은 성북동 한켠에 자리를 잡는데, 이때 조지훈도 같이 보금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인연의 공교로움은 가까운 집의 거리에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문장』이 발행되던 그해, 조지훈은 정지용에 의해 「고풍의상古風衣裳」이라는 시가 『문장』에 실리며 등단한다. 『문장』의 또 다른 중심인물이 이태준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이들이 알던 사이였기에 좋게 봐줬을 것이라는 불온한 생각까지는 아니더라도 ‘등단 이후 한 번 인사라도 하러 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피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다. 이태준, 정지용 등의 구인회가 그러했듯, 조지훈은 박목월, 박두진과 같이 청록파라는 문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게 된다.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은 이들의 시집 『청록집』이었다. 이 『청록집』의 장정을 맡은 사람이 바로 김용준이다. 『청록집』이 발간되던 해가 1946년이었으니 김용준은 당시 독보적인 장정가(혹은 북디자이너)였을 것이다. 소위 ‘청록파’들은 단순히 독보적 장정가인 김용준에게 장정을 부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지훈→정지용→이태준→김용준으로 이어지는 성북동 인맥도를 거꾸로 찾아올라 가보고 싶은 욕심은 떨치기 힘들다. 그리고 보니 그들의 집도 그렇게 성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차례로 만날 수 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23-224쪽
  • 조지훈 시인 별세(1) 청록파 시인이며 고대 교수인 조지훈씨가 17일 상오6시 「메디컬센터」에서 기관지 확장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8세. 고전적 소재와 전아한 시풍으로 시단에 많은 영향을 끼친 조교수는 근년 민족문화연구소를 개설, 국학의 분류사 간행에 분주했고 우리나라 민속학사를 집필중이었다. 시집으로 「풀잎단장」「지훈시선」「역사 앞에서」외에 「시의 원리」「시와인생」「창에 기대어」등이 있다. 유족은 미망인 김난희 여사와 3남1녀. 장례식은 21일 문단장으로 거행할 예정이다. 호상소는 서울 성북동 60의44 자택. 92-1053 『중앙일보』 1968. 5. 17.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24.
  • 시인 조지훈의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으로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에서 태어났다. 고향 마을은 조선시대 조광조 사화로 한양 조씨 일가가 낙향한 곳이다. 주실마을은 문필봉(文筆峰)이 있는 명당으로 조지훈뿐만 아니라 문인과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조지훈은 고향에서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친 뒤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불교를 배웠다. 열일곱 살 때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으로 한용운을 찾아 간 적이 있다. 이때 받은 영향으로 「한용운론」과 『한용운 전집』을 집필했다. 스물다섯 살에 한글학회 『국어교본』편찬위원이 되었다. 이듬해 2월에 경기여고 교사, 9월에는 서울여전(고려대 의과대학 전신)에서 근무를 하였다. 동국대학교 강사를 역임하면서 많은 시를 쓰기도 했다. 이무렵 성북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박목월과 박두진, 조지훈이 함께 시를 모아 『청록집』을 간행한다. 이때 성북동 조지훈의 집에 모여 원고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청록집은 근원 김용준이 장정을 맡았고, 김의환이 시인의 얼굴 소묘를 그렸다. 스물일곱살에는 고려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 조지훈은 집을 조금만 벗어나도 숲이 있는 성북동을 좋아했다. 그러나 자신의 집은 좋아하지 않았다.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 보다 바위와 나무가 많은 곳에서 고즈넉이 살고 싶어 했다. 성북동 집 대문으로 들어가면 문간 왼쪽에는 작은 툇마루가 있고, 문간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이 달려 있었다. 좁은 마당을 가운데 둔‘ㄷ’자형 남향집이었다. 서재로 사용한 사랑방은 서쪽은 문간방, 동쪽은 큰 마루, 남쪽은 마당으로 나가는 미닫이문과 통해 있어 온전한 벽은 북쪽뿐이었다. 당시 성북동은 교통이 불편해서 종로4가에서 돈암동행 전차를 타고 성북동까지 걸어 다녔다. 시내로 나올 때는 혜화동 로터리에서 보성학교 옆을 지나 고갯길을 걸어서 넘어 다녔다. 종로나 명동에는 조지훈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이 즐겨 찾던 다방이며 술집들이 있었다. 술을 좋아했던 조지훈은 지인들과 헤어진 후에 성북동 집까지 걸어오곤 했다. 술을 마시다가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파출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느 날은 자정이 넘었는데도 조지훈이 집에 오지 않아 가족들이 걱정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성북동파출소에서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 파출소에 계시니 모셔다드리겠다는 연락이 오기도 했다. 술에 취해 성북동 길 한복판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늘 친구들이나 제자들과 술을 즐겨 부인이 책을 언제 썼는지 모르겠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조지훈은 주로 성북동 집 사랑방에서 글을 쓰고 연구를 하였다. 사랑방을 서재로 쓰면서 손님도 맞고 잠도 잤다. 서재에 있을 때와 제자를 대할 때만큼은 진지한 학자이자 스승의 모습이었다. 사랑방은 서너 명만 모여도 꽉 차던 작은 방이었다. 그 작은 방에서 조지훈은 많은 시와 논문을 썼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키워냈다.
  •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성북동 집에서 방문을 열어 놓고 잠을 자던 중이었다. 박목월이 와서 잠을 깨웠다. 전쟁 소식을 들은 조지훈은“한 번은 오고야 말 날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구나”하고 중얼거렸다. 고생스러운 피난길. 가족과 헤어져 전쟁을 피하던 조지훈은 종군문인으로 활동하다 서울로 돌아와 식구들을 만났다. 전쟁동안 성북동 집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장소로 이용되었는지 마당 곳곳에 붕대가 널려 있었고 잡초로 가득했다.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은 한방학의 최고 권위자이며 제헌 국회의원을 두 번 지낸 인물로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혹시 돌아올지 모르는 아버지가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성북동 집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쟁 후에도 이사를 가지 않았다. 버려졌던 집을 돌보고 마당에 손수 화단도 만들어 돌나물도 심어 놓았다. 조지훈은 방우산장(放牛山莊)이라는 당호를 붙여「방우산장기」라는 수필을 썼다. 소를 몰수 있는 한가로운 곳이면 어디나 내 집이라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성북동 집을 대했다. 또한 성북동을 소재로 하여 「운무(雲霧)」라는 작품도 썼다.
  • 당시 성북동에는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많이 살았고, 서로 교류를 하며 지냈다. 조지훈이 살던 집 안방 쪽 축대 밖으로 개천이 흘렀는데, 그 개천 건너에 있는 한옥에는 서울대학교 최문환 교수가 살았다. 개울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면 운보 김기창 화백과 수화 김환기 화백이 살았다. 길을 건넌 곳에는 작곡가 윤이상이 살았다. 두 사람은 한국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어 친하게 지냈다. 조지훈이 작사를 하고 윤이상이 곡을 붙여 노래를 짓기도 하였다. 건강을 위해서 조지훈의 가족은 산자락 아래 지닌‘꿩의 바다’에 땅을 매입하고 새로운 집을 짓기로 했다. 집을 짓는 동안 거처할 전셋집을 계약해 놓고 이사를 준비하는 중에 조지훈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가 살던 성북동 집 60번지의 44호. 건평 35평짜리 한옥은 지금 자취를 찾아 볼 수 없다. 집을 헐고 새로 지은 건물 입구에 서 있는 시비만이 성북동에 살며 많은 업적을 남긴 조지훈을 기억하게 할 뿐이다.
  • 조지훈은 아버지인 민족운동가 조헌영과 집안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이 뚜렷했다. 한용운의 책을 읽으며 자라 열일곱 살에 심우장에서 한용운을 만났고, 후에 「한용운론韓龍雲論」을 집필하였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32쪽
  • 경북 영양 출생. 시인이자 학자이다. 1939년 《문장》에 시 「고풍의상」과 「승무」, 1940년에 「봉황수」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민족정서와 불교적 색채를 담은 작품을 남겼다. 고려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며 민족문화연구원 초대 원장을 맡아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였다. 해방 후 성북동 60-44번지에 ㄷ자형 한옥을 마련하고 ‘방우산장放牛山莊’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근처에 살던 화가 김기창, 김환기, 작곡가 윤이상들과 오가며 지냈다. 이 집에서 박목월, 박두진과 모여 의견을 나누고 『청록집』을 냈고, 책의 장정은 성북동에 살던 근원 김용준이 맡았다. 정지용이 《문장》에 추천하면서 등단한 세 사람은 서정성 있는 시 세계를 펼쳐 ‘청록파’라고 불렸다. 1960년대 사회 인식과 저항 의식을 담은 시를 발표하였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33쪽
  • 시인·교수 본명은 동탁(東卓). 경북 영양 출생 1936년경 혜화전문 입학을 위해 상경 후 명륜동에서 가족과 함께 살다 1941년경 성북리 60-44번지로 이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5쪽
  • 조지훈 시인 별세(2) 조지훈 씨가 17일 세상을 떠났다. 10여년내의 숙환이던 기관지 천식이 끝내 그를 앗아갔다. 그분은 최근엔 불과 몇 마디의 말도 잇지 못하고 쿨룩거렸다. 전화 받는 일조차 호흡이 가빠 사양했다. 『오늘날 주사엘 가도 시인은 옷자락을 스치기 힘들다. 터분히 마주앉아 막걸리잔 조차 나누기 힘들어졌다. 시인들의 소외는 시인들끼리만은 아니다. 오늘날 시를 읽으려는 독자는 아무도없다.』작년 7월 「한국신시60년기념사업회」를 발기하는 자리에서 그는 퍽 「페이소스」에 넘쳐있었다. 시인들의 적적함과 외로움은 비단 시인들 전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심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만년은 이처럼 쓸쓸했다. 한국신시의 면면한 맥박을 이어주었던 1930연대의 청록파 시절은 그의 황금기였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의 세 문학청년(목월·두진 등)은 지금 고인의 자택인 성북동 개울가의 그 기와집 사랑채에 모여, 밤이 늦도록 민족정신을 이야기하고, 한국의 고유한 전통에 탐닉해 있었으며, 잊혀져가는 우리의 고전적 풍습에 연연해 있었다. 『자연은 청록파의 마지막 구원을 희구한 신이었다』는 말을 고인은 최근에 한 적이 있었다. 그가 한때 자연에 몰입해 있었던 것은 암담한 현실을 비관하고 탄식하고 있을 수 없었던 일종의 구원의 길이었던 것이다. 1930년대의 그 암흑을 내면에서 밝혀준 것은 웅변가도 애국지사도 아닌 그 당시 몇몇 시인들의 조용하고 눈물겨운 음성이었다. 『비록 이 시대와 사회, 그 민족과 국가가 시와 시인을 버린다 해도, 시인은 언제나 이 시대와 사회를 지키고 제 민족과 조국의 정의를 드높인다. 이것은 그의 깊은 신념이었으며 언젠가 이 살벌하고 건조한 세상에 「시의 중흥」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오늘의 침체에서 떨치고 일어나 잃어진 시의 권위를 탈환하며 미래의 빛나는 설계를 이룩함으로써….』 그러나 그분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이 숨 가쁜 소망도 이루어지기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젠 그분의 기침소리조차 사라지고, 낭랑한 시들만이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다. 『중앙일보』 1968. 5. 17.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53-154쪽
  • ○ 조지훈 및 청록파 「문단이면사 21」, 『경향신문』, 1983.6.25.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185쪽
  • ○ 조지훈 및 청록파 「이호철의 문단골 60년 이야기」, 『한국일보』, 2011.6.7.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185쪽
  • ○ 조지훈 및 청록파 「나의 산하 나의 삶 114」, 『경향신문』, 1993.1.10.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185쪽
  • ○ 조지훈 및 청록파 「나의 산하 나의 삶 184」, 『경향신문』, 1994.5.22.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185쪽
  • ○ 조지훈 및 청록파 「청록의 시혼 속에 짧은 인생」, 『경향신문』, 1968.5.18.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185쪽
  • ○ 조지훈과 김기창의 필담 “필담을 주고 받던 기억은 성북동 골짝에 이웃해 사는 오늘까지 생생한 회고담으로 떠오르기도 한다.”(조지훈, 김기창 저 「화방여적」, 『경향신문』1962.12.1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조지훈 주소(현재): 성북동 60-44 분야: 문학(시, 한국학) 비고: 조헌영의 아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 ○ 성북인의 목소리 여섯 조지훈 역사 앞에서 역사 앞에서 만신에 피를 입어 높은 언덕에 내 홀로 무슨 노래를 부른다 언제나 찬란히 틔어 올 새로운 하늘을 위해 패자의 영광이여 내게 있으라. 나조차 뜻 모를 나의 노래를 허공에 못 박힌 듯 서서 부른다. 오기 전 기다리고 온 뒤에도 기다릴 영원한 나의 보람이여 묘막한 우주에 고요히 울려 가는 설움이 되라. 근대 한의학의 개척자이자 신간회 동경지회장으로 민족운동가의 길을 걸었던 조헌영. 그의 아들 조지훈 역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입니다.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약했던 조지훈은 성북동 집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청록파 세 사람의 작품을 모아 청록집을 발간하기도 했지요. 조지훈은 친일 문인단체의 가입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며 붓을 꺾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올곧은 성품을 지닌 문인이었습니다. 제자 임종국이 친일문학론을 쓰겠다고 조언을 구했을 때에도 묵묵하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습니다. 시 「역사 앞에서」는 1959년 발표한 작품으로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험난했던 시간을 보내고 난 후의 희망을 노래하는 작품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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